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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Nov 24. 2022

누가 그녀를 죽였는가?

EBS 다큐프라임 <여성 백년사> 1부 김명순 편을 보고


2018년 문정희 시인이 발표한 <곡시(哭詩)-탄실 김명순을 위한 진혼가>를 읽으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 그 감정은 지금도 선명하다. 그는 시의 형식을 빌려 김명순의 여성 혐오 살해를 낱낱이 까발겼다(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다면 그저 그의 시를 읽으시라).      


분노로 초조히 뛰는 심장과 떨려 나오는 목소리를 애써 누른 흔적이 역력했던 그의 시를 읽고서야 번득 깨달았다. 이토록 오랫동안 여자들이 살해당한 이유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리도 지금도 여자들이 같은 방식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강남역 살인 사건’에 김명순이 호명된 이유     


2016년 강남역 페미사이드 이후 여성들의 분노가 들끓어 오르고 ‘미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여자라서 모욕당하고, 여자라서 배제당하고, 여자라서 성폭행당하고, 여자라서 죽임 당했던 범 사회적 성차별과 여성 혐오가 맨몸뚱이로 거리로 튀어나왔다. 이런 날 것의 증언과 분노와 혼돈을 목도하던 문정희 시인 역시 여성혐오로 죽었던 한 여자를 호명해내야 할 책임감을 느꼈을 테다. 그가 부른 이름은 김명순이다.      


분노가 잠재워지지 않아 서성대던 그 시절, 여성혐오와 페미사이드를 다룬 책 <누가 여성을 죽이는가>를 만났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묻지마 살인이 아님을 증명하기위해 연구자들은 누가 여자를 죽이는가, 그리고 누가 여자들의 죽음을 묵인하고 은폐하는가를 파헤치다 김명순에 이르렀다. 백 년 전 김명순 페미사이드가 사후 부검됐다. 원통했다.  

   


사무치던 그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건, 입소문을 타고 있는 EBS 다큐프라임 <여성 백년사-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를 보면서다. 다큐가 보여준 낡은 사진 속 그녀는 묵묵했다. 자신을 능멸한 사내들에게 ‘조선아, 이 사나운 곳아, 이담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라고 절규했던 그녀라 믿기지 않았다.      


댜큐는 타임 오프를 통해 과거 속으로 들어갔다고 상정한 후 패널들의 대화를 통해 김명순을 재조명하고 있었다. 대강의 역사는 이랬다. 김명순은 일본 유학 중 소개받은 이응준(일본군이었다 해방 후 한국군으로 신분 세탁한 그는 호의호식하다 사망 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에게 ‘데이트 강간’을 당했다.


이로 인해 비관해 자살하려다 오히려 방탕한 여자라는 오명을 얻고 내쳐졌다. 경성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학업을 이어갔다. 어떻게든 살아가려 했다. 왕성한 지성으로 글을 쓰고 투고했다. 이광수에게 좋은 평을 듣고 문단에 데뷔했지만, 남자 문인들에게 걸출한 재능을 가진 그녀는 눈엣 가시였다. 이내 ‘김명순 죽이기’가 시작됐다. 


평론가 김기진이 대놓고 그를 모욕하기 시작했고, 차상찬, 신형철, 방정환(우리가 추앙하는 어린이 운동가 방정환, 맞다)이 이름을 속인 채 가세했다. 여자 문인 하나 매장시키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다큐는 그녀가 당한 잔혹사를 여기까지만 다룬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김동인은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 있을 정도로 한국의 대표적 문인이다. 김동인의 이름을 딴 문학상에 대해서 그의 친일 행적을 문제 삼아 이의 제기가 있었지만, 그가 한 여자를 인격 살해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던 범죄를 문제 삼아 비판된 적은 없다.      



김동인은 김명순과 <창조> 동인이었다. 김기진이 ‘김명순씨에 대한 공개장’으로 그녀를 공개 저격하자 김명순은 법적 조치를 시도하지만 누구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녀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저항하는 김명순의 마지막 숨통을 끊기 위해 김동인은 음탕한 여자를 상정한 <김연실 전>을 연재한다. <김연실 전>의 김연실이 김명순인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지만, 소설 속 이야기는 사실인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남자들은 강간 피해자인 그녀를 꽃뱀으로 만들어 단두대에 올렸다. 피폐해진 김명순은 조선을 떠났다. 아니 쫓겨났다. 그 후 그가 일본에서 어떻게 살다 정신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는가에 대한 기록은 부족하다. 오래 살지 못했다. ‘모단 걸’은 이렇게 처형당했다. 가부장이 허락한 모더니즘은 여성 혐오를 권력의 휘장 삼고 여자 문인을 제거했다. 그리고 ‘모단 걸은 불행하다’는 콤플렉스를 만들고 유통시키고 전승시켰다.     

 

‘멋있다’는 말, 아직 미안하다     


이 모든 오욕의 역사가 과거형이기만 하다면, 오늘 우리는 충분히 슬퍼하고 애도하고 눈물 훔치면 된다. 하지만 여성 혐오와 페미사이드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교묘하고 악랄한 방식으로 여자들을 학대하고 있다. 문화계 성폭력을 증언한 이들에게 예술계는 어떻게 응답했던가. 증언한 이들을 괴롭히고 따돌리고 회유하고 협박하고 마침내 매장시키지 않았던가.     


고은 시인의 만행을 <괴물>이라는 시로 폭로한 최영미 시인은 어떤 고초를 겪었는가. 그는 문단에서 도려내졌고 시집을 출판할 곳조차 찾을 수 없었다. 출판사를 찾을 수 없자 일인 출판을 통해 자신의 시집을 출간하는 의욕을 보였지만, 이를 ‘멋있다’고 상찬하기엔 참담하다. 그 많은 출판사가 모두 고은 시인의 것이란 말인가.  


    


다큐에서 한 패널은 여성 혐오로 살해당한 김명순을 ‘멋있다’고 했다. 물론 나는 그가 그렇게 말하는 까닭을 안다. 그는 갖은 곤경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김명순의 의지를 그렇게 북돋고 기리고 싶었을 것이다. ‘불쌍하다, 비참하다’ 등 피해자를 낙인찍는 표현에 대한 거부감이 반영된 것일 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의 삶을 ‘멋있다고’고 표현하는 데 불편함과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낀다. ‘멋있다’고 그녀를 칭송하기 앞서 우리는, 누가 그녀를 죽였는가 그리고 누가 그녀의 살해를 묵인하고 승인했는가를 충분히 규명하고 성찰하고 있는가? 그녀의 삶과 죽음에 대한 사회적 규명과 인정이 있은 후, 우리는 충분히 슬퍼하고 애도하고 ‘멋있어’해도 되지 않을까? 그녀의 억울한 죽음에 사과할 이, 누구인가?   

   

* 이 글은 <김은주의 시선- 최초의 근대 여성작가 김명순> (연합뉴스), <가장 슬픈 사람의 울음을 대신 울어주다> (경향신문) <누가 여성을 죽이는가>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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