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냥 Apr 26. 2023

여성 혐오 가득한 이 책이 걸작이라고요?

<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 (한승혜 외, 2023, 문예출판사) 서평


얼마 전 지인과 통화하던 중이었다. 책 이야기를 나누다 요즘 그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있다는 말에 그만 짜증을 내고 말았다. 좋은 책도 많은데 왜 하필 여자를 비하하고 모욕하고 (성)착취하다 못해 강간까지 하는 광인의 얘기를 읽고 있는 거지 하는 속내였는데, 이것이 짜증으로 드러난 것이다. 내 싸한 반응에 멀쑥해진 그는 “안 그래도 읽다 보니 이건 좀 아니다 싶다”며, “어떻게 이런 책이 고전의 반열에 올랐느냐”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참 이상하다 싶은, 좀처럼 동의되지 않는 고전 혹은 인생 책으로 꼽히는 책 중 단연 으뜸이 <그리스인 조르바>다. 독서 모임을 오래 하고 있는데, 참 이상하게도 읽어보자고 꾸준히 제안되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책 좀 읽는다는 사람들에게서 자주 회자되면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불량 데이터가 꾸준히 쌓여 명작으로 등극한 때문일 것이다.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이 책이 과평가되었다고 생각한다.   

  

한 번은 이 책을 인생 책으로 선정하는 이가 있어 정말 궁금한 마음에 물어본 적이 있다. 어떤 점이 이 책을 인생 책으로 꼽는 이유인가를. 그는 이렇게 말했다. “조르바 너무 멋있잖아요.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생각해요.” 난 약간의 ‘멘붕’ 상태였다. 그가 꼽은 어느 지점에도 전혀 동의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독법으로 그 책을 읽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보편적 인간으로 상정된(남성주의는 여자를 보편적 인간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남자 조르바에 이입했을 것이다. 대단한 몰입감이지만, 자신의 위치성을 전혀 고민한 적 없는 게으른 독서다. 그는 조르바의 경험에 이입할 수 없다. 여자인 그에게 그런 삶은 단 한 번도 용인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허용된 적 없는 삶이 보편적으로 간주된다면, 오히려 상당한 인지부조화를 겪으며 분열되어야 정상이다.      


페미니즘에 접속하기 전에도 나는 이 책과 불화했다. 조르바의 끔찍한 행적, “도둑질도 해봤고 사람도 죽여봤고 거짓말도 해봤고 계집들도 무더기로 데리고 자 본 사람, 계명이라는 계명은 깡그리 어긴 인간”에 진저리가 났다. 그가 불한당으로 자유를 누리며 남성성을 영위하기 위해 언제나 제물 삼았던 것은 여자였다.      


세상의 모든 여자가 다 제 여자였고, 자신에게 사랑받고 싶어 안달 난 ‘암말’, ‘씨받이’, ‘요물’, ‘늙은 세이렌’이었다. 성욕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실상 정신병자이지만, 그는 터무니없게도 ‘자유인’, ‘남자다움’, ‘결연함’, ‘강인한 생명력’으로 표상화되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수많은 여자들을 거리낌 없이 마녀화하고, 속물화하고, 퇴폐화한 건 광인 조르바를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명작 고전에 대한 과잉 평가에 반기를 드는 이들도 생겨났다. 한 후배는 <달과 6펜스>를 보다 책을 집어던졌다고 토로했다. 그럴듯하게 기억하고 있던 주인공이 세상에 둘도 없는 개XX라는 걸 각성하고 도대체 자신이 어떤 세상에 살았던 건지 모르겠다며 분노했다. 남자의 관점과 남자의 언어로 형상화된 영웅에 이입했던 자신의 내면화된 가부장주의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독자는 이 글이 <그리스인 조르바>등에 관한 불평이겠거니 하겠지만, 실은 아니다. 이 글은 <여자를 모역하는 걸작들>에 관한 이야기다. 내 입장에선 <그리스인 조르바>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책이지만(이 때문에 서설이 길어졌다), 더듬어보면 숱한 걸작들이 그랬다. 남성의 언어로 독점된 문학 등의 텍스트에서, 여성은 철저히 타자화되고 대상화되고 주변화되면서 왜곡되고 뭉개지고 지워졌다.    

 

<여자를 모역하는 걸작들>에 비평된 책들은 제목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꽤 유명한 책들이다. 한승혜가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박정훈이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김용언이 레이먼드 첸들러의 <안녕, 내 사랑>을, 심진경이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이라영이 앙드레 브르통의 <나자>를, 조이한이 니코스 카잔스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정희진이 이상의 <날개>를, 장은수가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를 낱낱이 해부하고 있다.      


언급된 책들을 오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읽을 이유는 없고, <여자를 모역하는 걸작들>을 읽고 오염되었던 정신과 언어를 씻어내면 된다. 그간 위 언급된 책들을 읽고 뭔가 찜찜하고 기분 나쁘고 화가 난 경험이 있다면, 이 책을 통해 커다란 해방감과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저자가 이상하고 미친 건 여자가 아니라 여자를 배제하고 고립시킨 남성중심주의라는 걸 적확하고 통쾌한 언어로 부숴주고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만 한 위로는 없다.     


모두 사이다 같았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비평은 정희진의 <날개>였다. 정희진의 글을 읽으며 문득 영면하신 김윤식 선생의 말씀이 생각났다. 식민지가 끝나자 문인들인 ‘멘붕’ 상태였다고 했다. ‘그간 일본어를 내면화해 문학을 해왔는데 이제 어떻게 조선말로 돌아간단 말인가’가 그들의 커다란 고뇌였다고 한다. 자신의 민족과 나라를 강점한 가해자의 말로 식민지 남성을 재현해온 식민지 조선 남성 문인들에게는 돌아갈 언어가 없었던 것이다.      


이 역설의 자리에 이상이 있다. 이 책도 <그리스인 조르바> 못지않게 불쾌한 책인데, 욕을 하자니 찜찜한 구석이 있다. 바로 그 모순된 지점에 내면화된 식민지 경험이 있고 식민지 남성성이 자리한다고 정희진은 주장한다.      



<날개>의 ‘나’는 일하지 않는다. 게으르고 무능하면서 지식인으로서의 ‘초월감’은 누리고 싶어 한다. 지식인인 ‘나’는 진토의 오욕을 감당할 수 없으니, 이 구질구질한 노동을 대리해 자신을 먹여 살릴 사람이 필요하다. 다름 아닌 ‘매춘부’ 아내다. ‘나’는 매춘하는 아내에게 연민도 분노도 없다. 다만 경멸이 있을 뿐이다. 매춘한 돈에 의존해 먹고살면서 부양하는 아내를 악마화하며 자신을 피해자화한다. 여성 혐오의 정수라 아니할 수 없다.      


<날개>는 “식민지 시대 실업자의 골치 아프고 유치한 자의식 이야기”이자 “여성 착취의 이야기”이다. 정희진은 자의식 과잉으로 자신을 직시하지 못하고 만만한 타인인 여성을 경유해서만 자신을 표현할 수밖에 없던 무능한 식민지 남성성을 ‘미소지니’와 잇대어 해석하고 있다. 이렇게 명징하고 탁월하게 식민지 남성성을 해부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정희진밖에 없다. 혼자 읽기 아까운 글이다. 정독을 권한다.           

작가의 이전글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투병한다는 것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