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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Apr 27. 2023

실습생이 된 딸애에게서 '소희'가 겹쳐졌다

 

치위생학과를 다니는 딸애가 7주간의 병원 실습을 마쳤다. 해방된 노예의 심정이라고 했다. 딸애의 카톡 프사가 ‘I'm free’라고 말하는 골룸(반지의 제왕 등장인물)으로 변해있었다.     


일주일마다 실습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그간 겪은 수모를 좔좔좔 엮느라 저녁밥 먹는 속도가 평소 반의반이다. 뒷담화하는 대상과 상황을 3인칭 시점으로 전달하는 게 아니라 1인칭으로 직접 연기하느라 일어났다 앉았다 성대모사까지 바쁘다. 웃프고 생생하다. 옛날에 태어났으면 시대를 풍미하는 변사가 되었을 거다. 아, 그것도 여자라고 안 시켜줬겠구만.  

    

딸애가 실습한 곳은 한국 최고?의 병원이다. 처음엔 그래도 ‘일류’라니 뭐 좀 배우고 오려니  했다. 오판이었다. 되려 지역 치과 전문병원에도 못 미치는(이곳에서도 실습했다) 낡은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인력 관리도 엉망이어서 필요한 곳엔 사람이 없고 필요 없는 곳엔 많았다고 한다.     


병원에서 실습생의 위치는 어떨까? 먼저 병원의 위계를 보자. 의사는 교수, 레지던트, 인턴이 있고, 치위생사는 치프, 치위생사, 간호조무사가 있다. 그렇다면 실습생은 어디쯤일까. 맨 밑바닥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모두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우선 종일 서있어야 하는데(족저근막염이 있는 딸애에겐 무척 고역이다) 진료를 하지 않을 때에도 그랬다. 앉을 곳도 없는데, 휴식할 곳이 있을 리 없다.      


점심을 먹으려면 구내식당을 이용해야 하는데, 늘 초만원이라 조금만 늦어도 긴 줄이 서있어 점심을 포기해야 한다. 맛도 없다. 만만한 게 편의점 음식인데 편의점이 비좁아 앉아 먹을 데가 없다. 마침 날이 춥지 않아 병원 내 벤치에서 몇 번 먹었단다. 그랬더니 즉각 보기 싫으니 벤치에서 먹지 말라는 훈령이 내려왔다고 한다. 편의점에 먹을 데가 없어서 밖에서 먹게 된 것을 어쩌라는 말인가. 그리고 벤치에서 먹는 게 뭐가 그리 보기 안 좋단 말인가.      



점심은 문제가 하나 더 있다. 실습생이라고 하지만 관찰만 하는 게 아니다. 바쁠 때면 의사 보조도 서고 이런저런 일에 조력한다. 막말로 아무 때나 아무 곳에 써먹는 인력인 것이다. 어떤 때는 너무 바쁘고 힘들어서 점심을 못 먹을 때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 실습생에게 조곤조곤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니들이 눈치껏 알아서 배우라는 식이다. 이렇게 알뜰히 부려먹으면서 임금은커녕 어떻게 점심도 안 줄 수 있단 말인가. 지역 치과병원에서 실습할 땐 그래도 점심은 줬다.      


치과 의사의 면면은 또 어떻고. 드라마에서 보는 쩐 서열 의식과 학대에 버금가는 인턴 구박은 드라마를 초월한다. 야단인지, 짜증인지, 모욕인지 모를 언설은 물론이고, 욕설도 난무한다. 교수는 자기 아래 의사들을 시종 취급하는 것도 모자라, 되도 않는 질문에 답을 못할 시 세상에 살 이유가 없는 존재로 추락시킨다. 


가장 큰 문제는 환자를 대하는 태도다. 면박주기 야단치기는 예사고, 진료 시간 지각과 엄수 안 하기, 개인사로 진료 예약 파기하기, 자기 피곤하다고 진료 중단하기 등, 딸애가 증언한 게 아니면 이게 대체 한국 최고? 치과 의사들의 면면인가 경악할 정도다.      


이런 사람들이 가장 밑바닥 계급인 실습생을 어떻게 대할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보통은 투명인간 취급이고, 조금 실수하거나 버벅대면 꺼지라는 비하를 듣기 일쑤고, 그런 대학은 수능 몇 점 맞아야 가는 데냐고 대놓고 조롱하는 등, 저 인사들이 엘리트는 고사하고 어른들이긴 한 건가 혀를 차게 한다.    

 


교수에게 구박당하는 인턴끼리도 위계는 선명했다. 교수한테 그렇게 당하면 인턴끼리는 연대감이 생겨야 정상 아닌가? 그런 일은 없었다. 같은 학교 인턴이 아니면 아예 말을 섞지도 않고 뭘 물어도 대답도 하지 않는 등 유치해서 볼 수 없는 지경이란다. 인격은 어디 보관소에 맡기고 다니나? 교수가 저리 막되 먹은 것도 인턴 때부터 꾸준히 익혀온 악습이지 않은가. 언젠가 저 자리에 오르면 똑같이 대해주겠다는 강자 동일시만 있을 뿐, 낮은 곳에서의 연대가 태동할 토양은 아예 없었다.      


딸애가 가장 기함했던 사건은 이거였다. 실습 첫날 오티를 하는데 내리는 주의사항이라는 게  기가 찼다고 한다. 인턴과 절대 말 섞지 말 것, 인턴과 전화번호 교환하지 말 것, 사진 촬영하지 말 것 등, 교육에 관한 것은 없었고 인턴과 절대 엮여서는 안 된다는 경고만 있었다. 같이 일을 하는데 어떻게 말을 안 할 수 있단 말인가. 무턱대고 실습생들을 인턴 꼬시는 꽃뱀 취급하는 저급한 여성 혐오가 명백했다. 인턴에게는 저런 주의를 주지 않으면서 여자 실습생들에게만 강제했다.     


위생사들 간에도 간극이 컸다. 타고난 성정 탓이기도 하겠지만, 실습생을 대하는 기본 매뉴얼이 있는 게 아니어서, 그저 복불복 행운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람 좋은 위생사를 만나면 면박을 덜 당하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딸애가 전하는 지들 표현으로는, X되는 거라고 한다.      


위생사 군기도 고달픈데 간호조무사 텃세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간호조무사들이 대부분 연배가 좀 있는 편이었는데도(딸애 표현으로는 엄마 나이 대라고 했다), 너그러움 같은 것은 저당 잡혔는지 온데간데없고 살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한다. 한 동료 실습생은 간호조무사의 시집살이를 못 견디고 탈출했다고 한다. 탈출하면 학점은 빵점인데도 말이다.   

   


‘태움’이 이렇게 현실적으로 다가온 적이 없었다. 딸애와 같은 과에 있던 간호조무사는 딸애를 늘 ‘학생님아’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무슨 네이밍인가. 간호조무사의 거친 태도는 물론, 고용 불안정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병원 내 구조적 불평등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도 낮은 이들끼리의 보살핌이 없다면 약자에게 무슨 무기가 남겠는가.   

   

실습 끝내고 돌아오는 주말마다 별의별 에피소드를 가지고 와 불만과 토로의 보따리를 풀던 딸애는, 실습이 거의 끝나갈 무렵 그래도 자기가 그나마 ‘꿀 빠는 보직’이었다고 했다. 같이 실습 나간 친구들의 얘기를 듣자 하니, 지 곤경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라는 걸 자각한 것이다. 같이 실습 나간 친구 중에 참 참한 아이가 있었는데, 평소 거친 언설은 물론 욕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그 애가 4주 차를 지나며 욕을 입에 달고 다니더란다. 이 애뿐 아니라 실습 나간 친구들 전체가 의기소침하고 침울해졌다고 한다.     

 

이유 없는 무기력이나 우울감은 없다. 한 친구는 멍멍이 인성을 가진 한 의사를 보조하다, 들고 있던 진료 도구를 집어던지며 ‘너 나가’라는 폭력을 경험했고, 수술실에서 실수한 친구는 ‘나는 사람하고 일하고 싶다’는 모욕을 듣고 쫓겨 났다. 실습생이 실수하는 건 당연한 과정이지만 필설로 다할 수 없는 모욕주기가 일상이었다. 진료실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실습생이 멍멍이들의 욕받이가 되고 있는 현실을 이대로 용인해도 괜찮은가?      


얼마 전 봤던 울분과 죄책감을 불러온 영화 <다음 소희>가 생각났다. 딸애의 실습은 물론 소희의 그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실습생을 도구로 여긴다는 것, 실습생이 실습을 거부할 경우  대체할 대안이 전무하다는 것, 실습생이 잘못되었거나 억울한 관행을 어필할 어떤 수단도 없다는 것, 실습생을 인격적으로 관리하는 공식 매뉴얼이 제도화되어있지 않다는 것 등엔 근본적인 차이가 없었다.     

 

딸애 친구 하나는 실습 중 병원의 비인격적 행태를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탈원한 후 자퇴했다고 한다. 그 애가 애로를 호소하자 담당 교수는 ‘니가 잘해야지’라며 모든 잘못을 그 애에게 돌렸다고 한다. 소희가 콜센터에서 사고 친 후 담임 선생이 하던 말과 똑 같았다.      


그 애는 다른 대학을 다니다 취업에 유리한 전공으로 유턴한 후 정말 잘 해보려고 무척 애썼다고 한다. 그런 아이를 세상 어느 한구석도 품어주지 못했다. 이게 제대로 돌아가는 세상인가. 이 거지 같은 세상은 도대체 왜 사람을 사람으로 대할 줄 모르는 건가. 젊은 여성들의 치솟는 우울과 자살이 아무 이유 없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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