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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May 02. 2023

<오마이TV>에 나온 '조국, 조민 부녀'로 생긴 불화

  

유튜브를 검색하다 우연히 불쾌한 장면을 보았다. 유튜브 <오마이 TV>에 조민 씨(조국 씨 딸)가 나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몰랐기 때문에 처음엔 조민 씨인지 몰랐다. <오마이 뉴스> 대표이사 오연호 씨가 조민이라 소개해서 알았다.      


잠시 보다 보니 이 방송은 ‘오연호가 묻다’ 코너에서 조국 씨 책 <법고전 산책> 출간 인터뷰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내가 잠깐 보았던 장면은 진행을 맡은 오연호 씨가 ‘절친’ 조국의 고통에 과 공감하며, ‘조국 사건’의 공동 피해자(오연호의 생각으로)로 조민을 소환하던 중이었다. 


그녀는 청중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마이크를 받았다. 문득 스친 생각은, ‘아, 권력자의 딸은 아버지(부모)의 잘못에 대해서도 변론할 마이크를 가지는 구나’였다. 세상 수많은 힘없는 부모의 딸들은 부모의 억울함조차 공개적으로 말할 마이크가 없는데... 착잡했다.     


더 이상 보지 않고 넘겨 버렸다. 그러다 이상한 곳에서 이 방송이 빌미가 되어 지인들과 불화하고 말았다. 어쩌다 얘기가 진보담론으로 넘어갔고, 나는 진보라는 허구에 대한 반동으로 위 방송을 언급하게 되었다. 이후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나는 조국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다만 나는 그가 한국 ‘진보’의 표상으로 과 평가되었다고 생각했다. 금수저로 태어나 좋은 학벌로 근사한 직업을 가지고 사는 그가 표방한 PC함이 그리 대단히 추앙받을 일인가. 그랬기에 ‘조국 사건’으로 드러난 민주당 계열의 과한 분노에 전혀 동의되지 않았다.      



당시 녹색당 당원인 한 지인은 ‘조국 사건’을 검찰 적폐라 규정하고, 이글거리는 분노를 SNS에 올리며 검찰 개혁 시위에 동참하자고 부추겼다. 그는 파주 지역에서 한 녹색당 당원이 ‘박원순 성폭력 사건’과 관련한 망언을 쏟아내었을 때, 지역 녹색당 핵심당원으로 입장을 밝혀달라는 나의 요청을 묵살했고, 여타 불공정 지역 현안에도 침묵했던 사람이다. 그런 게으른 ‘진보’가 ‘조국 사건’에는 팔 걷어붙이고 서울 원정 시위를 독려하고 있었다. 나는 흔히 ‘진보’라 퉁쳐지는 이들이 보이는 ‘조국 사건’에 대한 일그러진 잣대를 목격하면서부터 이에 대한 반동으로 조국이 싫어졌다.      


물론 정경심의 형량은 과도하며 ‘조국 사건’이 마녀사냥화되었다는 것엔 동의한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조국 지지자들이 보인 ‘추앙’에 버금가는 옹호 반응도 합리적 수준을 넘었다고 판단한다. 이렇게 흘려보냈던 사건이 왜 지인들과의 대화로 이어졌는지는 오리무중이다. 얘기라는 게 화자들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제멋대로 흘러가니 말이다.      


지인 A는 꽤나 소상히 표창장 위조 부분을 언급하며 마녀사냥화를 지적했다. ‘그 정도를 가지고’라고 표현했다. ‘조국 사건’에 조국 지지자들이 보인 전형적 반응이었다. 나는 그가 표창장 위조의 세심한 사항을 체크하는 게 놀라웠다. 다른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마녀사냥화에는 한 번도 저리 상세한 반응을 보이지 않던 그가 권력자의 곤경에 뭘 그리 애달파 속속들이 파고   든단 말인가. 조국에겐 그를 구할 천군만마가 있는데 말이다.      

지인 A의 반응에 공감하며 지인 B는 ‘진보 순결주의’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점입가경이었다. 진보가 어디 있다고 ‘진보 순결주의’를 언급하나. 과거 운동권 집단이 있었을 뿐, 우리 사회는 진보도 보수도 없다. 보수는 국가가 아니라 자신의 진영 이익만 좇는 극우만이 있을 뿐이고, 진보는 약간의 PC함을 과시하는 극도로 보수화된 집단일 뿐이다.      



만일 진보가 있다면, 우리 사회가 이토록 심각한 불평등을 앓도록 두지 않는다. 이토록 교육이 학벌주의로 엉망이 되지 않았을 것이며, 노동 현장이 이토록 처참한 죽음의 행렬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재벌이나 부자들의 이익에 이토록 복무하지 않았을 것이며, 부동산이 이토록 개판이 될 수 없으며, 젠더에 이토록 무식할 수 없다. 


군사정권의 폭압에 저항하던 일부 학생운동 집단이 스스로 근사하게 개명하고 진보를 자처했을 뿐, 단 한 번도 사회를 개혁하려는 진보는 없었다. 수 십 년 전 대학을 졸업할 즈음 학교 시위 현장에서 돌 던지던 형들이 대부분 대기업으로 취업하는 걸 목격했다. 믿을 수 없었다. 그들보다 학점도 능력도 뛰어난 나 같은 여자애들에겐 단 한 번도 주어진 적 없는 사회 진출권이었다. 진보 같은 건 어느 때고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조국 사건’의 진면목은 ‘진보 순결주의’로 내몰린 곤경이 아니라, 흔히 ‘강남 좌파’라 불리는 집단의 민낯이 드러난 사건이다. 그들은 강남이라는 고가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아이들을 강남 학군에서 교육시켜 좋은 학벌을 대물림시키는 기득권 집단일 뿐이며, 이게 하필 진보의 허상을 좇는 사람들이 영웅화한 조국에게서 확인되었을 뿐이다.      


진실은 강남 좌파라는 기득권이 재테크(부동산 주식 등)에 능했고, 아이들의 일류대학 진출을 위해 엄마가 완벽한 입시 전문가로 활약해 (이는 성역할이기도 하다) 아이들에게 고급 스펙을 만들어주어 특권층인 금수저의 ‘넘사벽’을 재생산해 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팩트인데 사람들은 이를 진보 보수의 대결로 명명하고, 진보에게 흠결 없음을 강요하면 안 되니 ‘그 정도는 봐줘야지’하며 조국을 수호했다.      



‘그 정도’에 대해서 말해보자. ‘그 정도’는 누구의 ‘그 정도’인가. 나 같은 사람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동원할 수 없는 문화자본이 ‘그 정도’로 보편화될 수 있나. 나는 조국 부부처럼 아이의 대학 진학을 위해 표창장을 부탁할 어떤 인맥이 없으며, 30억을 호가하는 아파트를 구매할 여력이 없으며, 몇 억이나 되는 주식을 가질 돈이 없다. 


이런 부가 누구의 ‘그 정도’인가. 왜 저 계급 사람들은 강자 동일시를 하며 ‘넘사벽’의 기준을 ‘그 정도’라고 허용하는 것일까. 당신의 ‘그 정도’는 보통 사람의 기준이 아니다. 저 계급이 분노로 이입해야 할 ‘그 정도’는, 강남 좌파에겐 사소한 돈일 1억 정도의 전세 보증금을 사기당하고 좌절해 목숨을 끊은 사람들의 기준이어야 하지 않나.     


‘조국 사건’에 불을 뿜는 사람들의 면면을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이상하리만치 저 계급이 많다. 중산층이 열을 냈다면, 자신들의 기득권 수호라는 차원에서 역겹지만 입장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넘사벽’의 벽을 넘지 못하는 그들은 왜 부자인 권력자에게 그리 너그러운가. 나는 그들의 조국 동일시가 그들의 열등한 욕망에 있다고 생각한다. 초라한 과거 운동권보다야 잘나가는 ‘강남좌파’가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가. 


한마디로 말해 ‘강남 좌파’라는 네이밍엔 비싼 집, 대물림할 학벌에 대한 커다란 욕망이 숨겨져 있다. 그래서 그토록 그를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못했지만 그가 대리해 주고 있는 욕망마저 무너져서는 안됐기 때문이다. 지긋지긋한 식민지성이다.     

 

사람들은 조국이 사라질까 굉장히 걱정되나 보다. 그의 좌절이 미치겠나 보다. 쓸데없는 애달픔이다. 이번 정권 인사에서도 보듯이, 이름도 잊었던 잘 먹고 잘 살던 ‘올드 보이’들이 ‘나  여깄어’하며 기어 나오지 않던가. 민주당이 권력을 탈환하면 조국은 더 신성하고 아름답게 부활할 것이다. 걱정 붙들어 매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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