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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May 03. 2023

무정한 딸은 이제야 엄마의 고향 땅을 밟았다

돌아가신 엄마의 고향 철원을 다녀와서


‘죽은 자식 XX 만지기’라는 속담이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미련을 가지지 말라는 경구일 텐데, 지금 내가 그렇다.    

  

두어 주 있으면 엄마의 기일이다. 두 번째 기일이다. 돌아가시고 한동안 친한 사람조차 만나기 싫을 정도로 우울과 무기력과 허무에 젖어 있었다. 그러던 내가 이제 종종 엄마를 잊고 지낸다. 생과 사의 경계가 이리 엄연하다.      


다행히 엄마는 자주 꿈에 등장한다. 옛날 젊은 모습이기도 하고 중년 또는 노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꿈에서 깨고 나면 꿈이 휘발되어 기가 막힐 정도로 하나도 기억이 안 나지만, 꿈속에서나마 엄마를 볼 수 있어 좋다. 

    

지난겨울부터 자꾸 엄마의 고향에 가보고 싶어졌다. 이 무슨 뜬금없는 짓인지, 엄마 생전에 모시고 갈 생각은 하지도 못하다가, 왜 이제 와서 이러는가 말이다. 나도 내가 싫다.    

 


엄마는 1936년 철원(김화)에서 태어났다. 그 너른 철원 평야 지주의 딸이었다. 호의호식했다. 엄마 인생의 화양연화였다. 전쟁이 나지 않았다면, ‘우리 00는 꼭 박사 시킨다’던 조부의 계획은 높은 확률로 실현되었을 것이다. 엄마는 전쟁 때문에 망한 인생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포탄으로 고래 등 같던 집이며 번화하던 시가지며 다 무너져 사라진 전쟁터에서, 낮엔 국군이 밤엔 인민군이 지배하던 살벌한 이데올로기의 땅에서, 조부모와 엄마는 겨우 목숨만 건져 맨몸으로 탈출했다. 험난하고 헐벗은 피난 생활이 시작되었다.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했던 말이 ‘피난민’이었다. 당시 ‘피난민’은 도둑, 상거지와 같은 뜻으로 천대되고 혐오되었다.     


엄마는 영광과 쇠락을 동시에 말해주곤 했다. 지주의 딸에서 ‘피난민 여자애’로 추락한 삶의 격차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엄마는 그 괴리를 읊으며, 자신의 얘기를 책으로 쓰라고 진정으로 애원했다. 난 번번이 나의 무능을 구실로 거절했다. 그때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무한 재생하는 엄마의 옛 영광과 치욕이 지독하게 지겨웠다. 이제 후회한다.      


만시지탄이지만 엄마의 일상과 작은 행복이 서려 있을 그 땅에 가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일지 미안함일지 모를 충동이었다. 엄마의 고향이 내가 갈 수 있는 남한에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처음으로 고마웠다. 백마고지를 피로 물들이며 지켜준 선열들께 염치없는 감사를 드려야겠다.     

 


인터넷에 철원군청을 접속해 보니 DMZ 관광 코스가 있었다. 사전 접수 없이 현장 신청하란다. 떠났다. 목적지를 내비에 치니 90킬로가 조금 넘었다. 달렸다.      


버스 투어인 줄 알았더니 개인 차량으로 이동하란다. 투어 단임을 알리기 위해 각자의 차 위에 푸른색 경광등을 하나씩 달고 일렬로 전진했다. 살다 이런 투어는 처음이군, 하며 키득댔다. 집을 나선 오전엔 날씨가 괜찮았는데 이곳에 오니 바람 불고 비가 흩뿌렸다. 엄마가 부리신 조화신가요?      


엄마는 많은 장소와 사람을 얘기했지만, 나는 그 흔적들을 찾을 수 없었다. 막막했지만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엄마가 이 지역 어디선가 아이에서 소녀로 커가며 살았다는 사실이 짠했다. 엄마의 어릴 적 사진이 단 한 장도 없기에, 나는 어린 엄마를 상상하지 못한다. 엄마는 어떤 아이였을까. 어떤 소녀였을까. 무척 궁금했다.     

문득 셀린 시아마 감독의 <쁘띠 마망>이 생각났다. 어린 소녀가 타임슬립으로 과거로 돌아가 그곳에 사는 자신과 동갑인 어린 엄마와 만나 친구가 되는 이야기다. 딸애는 그 영화를 보며 자신도 시간 여행으로 과거의 어린 나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어린 엄마를 만난다면 나도 영화 주인공처럼 내 비밀을 간직한 채 어린 엄마와 우정을 나누게 될까. 상상만 해도 가슴 두근거린다. 엄마라는 존재도 처음부터 몰개성한 어른이 아니라, 갖은 사건과 서사를 알록달록 겪으며 성장한 어린아이이고 소녀인 시절이 있던 역사적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 영화였다. 아이였고 소녀였을 나의 당신이여...     


관광 코스는 간단했다. 평화 전망대-월정역사-노동당사를 둘러본다. 평화전망대 전에 제2땅굴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폐쇄했단다. 전망대에 오르니 익숙한 풍경이다. 내가 사는 파주에도 오두산 전망대가 있는데 유사한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다만 철원 전망대에서 조망하는 너른 비무장지대가 훨씬 비장하고 웅장하게 느껴졌다. 엄마가 저 들 어느 곳에서 조잘대고 뛰어놀았을까. 저 들과 강에서 동무들과 실컷 놀다 해지면 들어간 집에선 조부모님께 어리광을 받쳤을까.  

    

월정역엔 그 유명한 고물 철마가 전시되어 있었다. 북으로 가다 폭탄을 맞아 거꾸러진 군수물자를 나르던 철마는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있었다. 이 기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하니 웃음이 싹 가셨다.     

 


엄마는 김화에서 기차를 타고 금강산에 갔다고 회고하곤 했다. 우리 엄마 금강산 가 본 사람이라고, 남편에게 자랑질을 한 적이 있다. 그 시대 누구나 누리던 부귀영화가 아닌 게 자랑스러웠나. 아닐 것이다. 지금은 저렇게 쇠락한 노인인 엄마도, 옛날엔 치맛자락 살랑이며 엄마의 엄마의 손을 잡고 나들이 다닌 사랑 받은 소녀였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투어의 마지막 장소는 노동당사였다. 엄마는 당시 노동당사가 굉장히 컸다고 했다. 내가 인터넷에서 찾은 노동당사 건물을 생전에 보여드렸을 때, 엄마는 이렇게 작지 않았다고 의심했다. 어릴 때는 커다래 보이던 초등학교가 어른이 되어 가보면 작고 볼품없어 보이는 왜곡과 같은 현상이었을까. 


실제로 본 노동당사는 옛날 규모로는 결코 작지 않았다. 벽돌을 다중으로 쌓아 올려 지은 벽은 굉장히 견고해 보였고 삼층으로 되어 있었다. 노동당사를 지을 당시는 북의 땅이었고, 그들은 이곳을 호령하리라 믿었을 테니 잘 지었을 테다.      


노동당사 근처엔 철원의 옛 도시를 어설프게 재현해 놓은 세트장?이 있었다. 음식점이나 의상실 등의 갖은 점포와 약방, 근대식 병원, 우체국 소방서? 그리고 영화관까지. 아, 엄마가 변사 나오는 영화를 보았다고 했는데... 저런 의상실에서 비로도 오바를 맞춰 입었는데, 그런 값비싼 코트를 입은 아이는 엄마가 유일했다고 했는데, 칼 찬 일본 선생님 때문에 학교 가는 게 무서웠다고 했는데, 조모랑 장에 오면 장을 잔뜩 보고 큰 음식점에 가서 곰탕을 먹었다고 했는데... 


나는 옛 모습과 거리가 멀 조악한 모형 건물을 보면서 하염없는 상상에 빠져들었다. 자꾸만 엄마를 불러 보았다. 엄마, 이번 제사에는 엄마께 들려드릴 이야기가 많아요. 생전에 모시고 오지 못해서 정말 정말 미안해요. 많이 그리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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