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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Jun 20. 2023

문제는 가족이라고!

<말 없는 소녀> (콤 바리에드 감독, 아일랜드, 2023) 리뷰


말수가 적은 사람들이 있다. 가족 중엔 언니 아들인 조카가 그렇다. 어려서부터 그러더니 쭉 그렇다. 말이 너무 많은 딸애를 둔 나로서는 한때 조카의 말 없음이 미덕으로 비쳤다. 조카애의 말 없음에 달리 무슨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태생이 그렇다. 그래도 꼭 할 말은 한다. 이 말 저 말 분수 넘치게 하는 게 문제지, 말수 적은 건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말 없는 소녀 이야기를 보았다. 제목도 <말 없는 소녀>다. 말을 잘하다 실어증에 걸린 건 아니니 이 소녀의 말 없음을 해석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소녀는 맡겨진 곳에서도 말을 적게 하지만, 관계의 밀도가 높아 말보다 감정에 주목하게 된다. 많은 말은 때로 관계의 공허함을 덮으려는 시도다.     


가족이라는 제도

    

말수 적은 소녀 코오트는 엄마에게 썩 달가운 아이는 아니다. 아이 다섯을 기르는 엄마에게 달가운 딸이란, 엄마 일을 돕거나 약간의 아부를 담은 말로 환심을 사는 아이일 텐데, 코오트는 이런 과가 아니다. 이런 성정의 코오트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소외당한다. 마음을 기댈 데가 없다.    

     

아이가 다섯이나 있는데도 또 배가 불러 있는 엄마는 산달이 다 돼간다. 아버지는 술과 담배에 찌들어있고 경마 도박에 중독되어 있다. 이미 가산을 탕진했고 딱히 생계를 책임질 궁리도 하지 않는다. 엄마는 연이은 출산과 이로 인해 많아진 아이들의 양육과 가난에 지쳐 이미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사실 우울하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다.      



엄마는 무거워진 몸으로 다섯 아이를 돌보는 것만도 보통 일이 아닌데, 당장 먹고 살 일이 막막하다. 그런데 아이를 또 낳아야 하니, 아이들 몰래 눈물을 훔치는 걸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다. 무기력한 엄마 무능한 아빠, 온기 없는 집 안 풍경과 눈 마주침조차 없는 가족 관계만으로도 이 집이 이미 가정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음을 감지할 수 있다. 바로 이것, 가족이 제일 문제인 것에서 코오트의 소외가 시작되었다.    

  

가족이 제도인 사회구조에서 부모를 잘못 만난 아이는 잘못된 구조의 피해자이지만, 이를 정상으로 간주하는 사회에서 피해자로 간주되지 못한다. 부모가 정신을 차리는 수밖에 없는데, 대부분의 불행한 가족사가 말해주듯, 이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기적이다.     


어쩌면 코오트가 에블린에게 맡겨진 것은 행운이었다. 하지만 낯선 곳에 던져진 아이는 침구에 오줌을 쌀 정도로 불안하다. 이를 알아챈 사려 깊은 에블린과 처음엔 코오트보다 더 말이 없다 우정을 쌓게 되는 션의 보살핌으로 어느새 유대가 생성된다. 가족만이 아이를 자라게 하는 곳이란 생각은 얼마나 강박적인가.      


코오트는 말수가 적다 뿐 알고 보면 야무진 아이다. 폐가 되지 않으려 하고 거슬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실상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는 것일 텐데, “먹는 만큼 일시키라”는 살벌한 가부장의 억압이 내면화된 때문인지 모른다. 아이는 점차 이 집 어른들에 익숙해지며 관계를 맺어 간다.      


에블린과 션은 농사와 소규모 목축을 한다. 먹거리를 자급하고 소들을 돌봐 생계를 꾸린다. 농사나 목축을 자본의 잣대 밖에서 평가하면 생명을 돌보는 일이다. 물론 목축은 고기와 우유를 얻으려는 철저히 인간 이기적인 돌봄이지만, 어쨌거나 소들을 키우는 한 방치하고 키울 수는 없다. 


우리를 청결히 관리하고 송아지에게 젖병을 물리고 소들의 몸 상태를 점검하는 모든 노동이 곧 돌봄이다. 기본적으로 션이 소들을 살뜰히 보살필 줄 아는 심성은 코오트를 돌보는 마음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동물이나 사람이나 거둔 생명은 보살핌 없이 양생할 수 없다. 이들 부부에게 아픈 상실의 상처가 있지만 놀랍게도, 코오트를 돌보며 과거의 상처를 회복한다. 이것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전부다.   


모두 돌볼 수 있다

  


나는 이 영화가 좋은 어른이 아이를 잘 보살핀 이야기로 해석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외된 아이는 좋은 어른의 보살핌으로, 상처 입었던 어른은 좋은 아이의 기운으로, 서로를 회복시켰다고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코오트는 그저 어른인 에블린과 숀에게 보살핌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어른들을 일으켰다. 마른 장작처럼 버석했던 어른들에게 온기와 웃음을 회복시킨 일은 실로 대단한 힘이다.   

   

코오트를 가만 들여다보다, “요즘 이런 애가 없다”고 발견한 것은 숀의 혜안이지만, 코오트가 이미 썩 좋은 인간으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는 아이를 맡기며 “겉도는 애”라고 폄하한 아빠의 평가가 애정과 관심의 결핍에서 나왔음은 물론이고, 부모 자식 관계 또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사랑과 관심 속에 맺어지는 노력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에블린과 션이 지금껏 견지해온 삶의 중요한 가치에는 마을 사람들의 대소사에 상호부조하는 것을 당연한 삶의 의무와 권리로 생각하고 실천해온 상호 돌봄이 있다. 돌봄이 공동체 모두의 일이라고 믿어질 때, 오히려 가족이라는 혈연으로 엮인 복불복의 위험을 상당히 상쇄할 수 있다.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아이는 정말 나쁘거나 준비 안 된 부모에게서만(그들이 단지 부모라는 이유로) 키워져야 하는가. 아이는 자기를 키워줄 곳을 선택할 수 없는가. 한마디로 코오트가 에블린과 션에게서 자랄 수 없는가 말이다. 코오트의 아버지는 아이를 맡기면서 “원하는 만큼 데리고 있어도 된다”고 비아냥 됐지만, 막상 코오트가 에블린과 숀에게 뜻밖의 유대감을 보이자 당황하며 불쾌해한다. 그는 그럴 자격이 전혀 없지만, 단지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코오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이를 권리인 양 악용한다. 이것이 폭력이 아니면 무엇인가.      



다시 코오트는 냉담하고 가난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에블린과 션 역시 마음이 아프다. 슬픈 이별이 이들 앞에 있다. 하지만 이들 모두 이별의 상실감과 동시에 가슴에 아주 작게 지펴진 불씨로 다시 살아갈 것이다. 영화는 혈연이 벌린 틈에 대안 가족이라는 관계를 자리시킴으로써 보는 이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며 끝맺는다. 하지만 삶은 이 낭만화된 감정으로 끝일 수 없다. 오히려 이 끝에서 다시 시작할 삶에 대해 가족이라는 자연화되고 제도화된 관계를 질문해야 한다.      


영화의 아름다운 풍경은 덤이다. 코오트를 샘의 요정으로 착각하게 하는 숲속의 우물, 싱그러운 여름 나뭇잎과 그 사이로 언뜻언뜻 쏟아지는 햇빛, 덩치 큰 나무가 도열해 만들어진 나무 돔 오솔길, 미세먼지 없는 푸른 하늘과 구름 모두 아름답다.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이곳에서의 코오트의 삶이 한낮의 꿈만 같다. 이 무해하고 소박한 낙원으로 소녀는 왜 돌아갈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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