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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Jun 22. 2023

죽은 유대인을 최고의 유대인으로 만드는 사람들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데어라 혼, 2023, 엘리) 서평


유대인은 전 지구적으로도 세계사적으로도 환영받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홀로코스트가 이를 극단적으로 증명한다. 과거사만은 아니어서 유대인 혐오는 아직도 곳곳에서 혐오나 테러로 출몰한다. 유대인에게 씌어 진 온갖 편견과 혐오(사악하다, 탐욕스럽다, 추하다 등)는 사실무근임에도 여전히 기세를 떨치고 있다.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의 경험을 기록한 책은 많은데, 나는 이중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가 인상 깊었다. “나치 체제는 용의주도하게 노예와 주인이 최소한의 접촉만 하도록 마련”했기에, 책의 기록 중 독일군이 유대인을 자극적으로 가해하는 장면은 드물다. 수용인들 간 계급을 만들어 억압자의 명령과 가해를 대리시켰기 때문이다. 프리모 레비는 “인간이 다른 인간의 눈에 하나의 사물일 뿐인” 상황을 견디다 독일 패전으로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는 여러 권의 홀로코스트 관련 책과 증언을 통해 “사물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보겠다는 의지”를 보였지만, 결국 자살로 삶을 마쳤다.  

    

치명적 사건에 살아남은 생존자에겐 기대되는 상이 있다. 홀로코스트 유대인 생존자들에겐 피해자다움은 물론 ‘구조된 자’로서의 면모도 요구됐다. 피해자다움은 여일하지 않고 구조된 자라는 정체성은 거북하다. 피해자 각각의 피해는 같고도 다르기 때문에 집단화된 단일한 피해자로 상정될 수 없지만, 사회는 그 체제나 이데올로기에 들어맞는 피해자상을 주조해 끼워 맞춘다. 살아서 다른 증언으로 이를 거스르면 피해자답지 않거나 가짜 피해자라고 비난한다.      


하얼빈에서 사라진 유대인들     


유대계 미국인 소설가 데어라 혼은 죽어야만 온전한 피해자가 되는 유대인의 오인된 피해자성을 논픽션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에 담았다. 죽어서 침묵한 유대인만이 피해자로 환영되고 인정된다는 저자의 메시지는 사자(死者)는 말이 없고 피해는 만들어진 진실이 된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도 함의를 던진다.    

  

저자는 죽은 유대인의 흔적을 좇는다. 화석이 된 유대인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하얼빈의 유대인이었다. 독자들은 ‘유대인이 하얼빈에 있었다고?’ 의아해할 것이다. 헌데 이 정도가 아니다. “하얼빈 시는 유대인들이 세운 도시였다.”     



우리에겐 안중근의 하얼빈으로 익숙한 이곳에, 뜻밖의 유대인이 등장한 연유는 이랬다. 제국주의 러시아가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철도를 놓는데 중간 기착지가 필요했다. 유대인을 마땅치 않아하던 러시아는 이 허허 벌판을 유대인을 내몰 장소로 낙점한다. 1889년 도착한 유대인은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호텔, 은행, 약국, 보험회사, 백화점, 출판사 등을 세워 5년 만에 번듯한 도시를 탄생시켰다. 점차 유대인이 증가해 1909년에는 약 2만 명이 되었다.      


도시를 세운 유대인은 영광을 누렸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이후 러시아 혁명, 일본의 만주 점령, 중국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반유대주의가 이들이 운명을 어떻게 비극으로 만들었는지는 긴 설명이 불필요할 것이다. 대대적인 홀로코스트 이전에 이미 이들은 절멸되고 있었다. 하얼빈 유대인 역시 거의 모두 죽거나 사라짐으로써 도시는 유대인의 이름을 완벽히 지웠다. 하얼빈을 유대인이 세웠다는 사실을 처음 듣게 된 이유다.   

  

<쉰들러 리스트>의 허상


하얼빈의 유대인처럼 유대인은 세계 곳곳에 있었지만, 어느 곳에서도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혐오된 유대인들은 끝내 홀로코스트 재앙을 맞았고 저항할 능력이 없었다. 나치 독일만 이들을 혐오한 게 아니라 거의 유럽 전역이 동조했다. 홀로코스트는 나치 독일에 의해서 주도되었을 뿐, 전 유럽의 방조와 협조 아래 진행되었다. 나치 점령지 중 오직 덴마크만이 학살을 거부했다.      


그렇다면 전 유럽의 묵인 하에 벌어진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구조’된 자들이라 부르는 게 마땅할까. 불의의 사고가 아니라 계획적으로 진행된 대규모 절멸 프로젝트에 가담한 거악을, 극소수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소수의 유대인(살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유명 예술인이나 학자 등)만을 선별해 살려냈다고 ‘구조’라 부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가 대표적인 유대인 ‘구조’ 판타지 서사다.      



이렇게 항변하는 살아남은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사람들은 불편하고 불쾌하다. ‘선의’로 포장한 자신들의 치부 혹은 범죄가담이 누설되기 때문이다. 양심과 정의감으로 죽을 사람들을 살려낸 ‘구조한 자’의 위치에서 강등될 판이니 짜증이 나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죽은 유대인을 사랑’하는 까닭이 선명하다.     

 

저자는 하얼빈 외에도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의 흔적을 좇는다. 이 기록들에 쏟은 저자의 열성은 형형하며 글은 매우 다이나믹하다. 하지만 역동 속에 있던 저자가 직면해야 하는 현실은 무섭고 암울하다. 아직도 이름을 달리한 유사 나치들이 곳곳에 준동해 유대인들을 살해하고 있다.      


미국에 사는 저자가 이 책이 나온 2021년 까지 겪은 유대인 혐오 테러만 세 건이었고 많은 유대인들이 죽었다. 게다 테러의 원인이 마치 한 유대인 공동체의 “고급 사유지화”가 빚은 탐욕 때문인 듯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는 저자를 더 분노하게 만든다. 유대인은 탐욕스럽다는 편견을 재생산해내 사회를 오해와 분열로 이끌었던 과거의 프로파간다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사랑한 ‘죽은 유대인’   

 

죽은 유대인이 죽어야만 살아나는 피해자화의 과정은 독자로 하여금 한국 사회의 피해자화를 성찰하게 한다. 죽어서도 정당한 피해자가 되지 못하는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피해자들. 피해자가 죽어 하지 못한 말을 대신하려는 유족들과 친지들에게 혐오와 멸시로 입을 막으려는 사람들. 진실은 다투어져야만 밝혀지지만 죽은 채로 아무 것도 말하지 말라는 사회적 가해는 죽은 유대인의 은유와 닿아있다.      


이 책의 해설을 쓴 정희진은 죽은 유대인을 향한 은유의 방향을 조금 더 틀어 깊은 통찰로 이끈다. 그는 한국 사회의 ‘죽어서 사랑받는, 죽어서야 인정받는’ 유대인 같은 존재들을 지목한다. 계급의 가장 밑바닥에서 천대받던 기지촌 여성들이 그들이다.    


 


살아서 ‘양공주’라 멸칭되던 이들 중 한 여자가 죽었다. 25세의 기지촌 여성 윤금이. 그녀는 1992년 백인 미군 병사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그녀가 죽자, 사람들은 그를 ‘양공주’에서 ‘민족의 순결한 딸’로 승격시켰다. 살아서는 인권이 없던 여자가 죽어 민족의 피해자가 되어 시민권을 얻은 것이다. “우리 사회는 올바른 피해자를 찾는다. 일제 강점기나 미군 범죄 피해자들은 비참한 죽음을 통해서만 한국 사회에 수용된다.” 

     

시점을 1992년에서 현재로 이동시키면 우리 사회의 ‘죽은 유대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까. 대구 이슬람 사원은 무슬림 혐오로 멈춰졌다. 대구 홍준표 시장은 성소수자 퀴어문화축제를 ‘성다수자의 권리’를 위해 막아섰다. 인천의 한 마을은 늘어난 외국인과 이주민 때문에 범죄가 늘었다고 불만과 혐오가를 쏟아낸다. 국민의 힘은 중국인에게 투표권을 주지 말자고 선동한다.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사실과 진실은 소거되고 인종화된 혐오만 증폭된다.   

   

이러한 저자의 논지에 대부분 동의하지만 책을 덮은 후 다른 고민으로 복잡해진다. 죽은 유대인의 피해는 너무나 명확하지만, 시오니즘이 팔레스타인에서 벌이는 가해 또한 명확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피해자성을 가해해도 되는 권리로 승인한 것인가. 피해와 가해를 구분하는 선이 명확히 그어지지 않는 난감함, 누구도 온전히 피해자이기만 할 수는 없다는 불편한 진실이 곤혹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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