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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Mar 16. 2020

내 자궁에 손대지 말라니까!

[대리모 같은 소리] (레나트 클라인, 2019, 봄알람) 서평 에세이


‘대리모’하면 씨받이가 생각난다면, 당신은 옛날 사람임에 틀림없다. 씨받이로부터 유구히 이어져온 여성의 포궁(자궁)을 이용한 대리 임신과 출산의 역사는 이제, 생명공학이라는 가공할 테크놀로지의 등장과 함께 밀레니엄 여성들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난자와 정자가 체외수정된 배아를 대리모의 포궁에 주입하고 인공 포궁까지 실험되는 이 시대에, 여성의 재생산은 어떤 국면에 놓인 걸까.    


2018년 중국 과학자 허젠쿠이 남방과학기술대학 교수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기술로 에이즈 저항성을 지닌 쌍둥이를 탄생시켰다고 발표해 야단법석이 났었다. 이 뉴스는 자칫 경이로운 기술발전의 쾌거로 들릴지 모르나, 그 이면엔 실체가 전혀 드러나지 않은 여성들(대리모, 난자 공여자, 불임의 여성)의 고통이 숨겨져 있다. 게다 이 실험이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아이의 미래를 담보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류가 매우 심대한 위기에 처해있음을 의미한다.  

   

쌍둥이든 아니든 아이가 태어나려면 난자와 정자의 공여자가 있어야 한다. 정자는 후론하고 우선 난자의 공여를 보자. 난자는 정자와 달리 무시로 채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난자를 채취하기 위해선 과배란을 유도하는 호르몬 약물을 지속적으로 투입 받아야 하는데, 이로 인한 난소과잉자극증후군은 심각한 손상(암, 불임 등)을 일으킬 수 있고, 최악의 경우 사망에 이른다.     


영화 [청년경찰]을 보면 인신매매당해 난자 착취를 당하는 젊은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난자 채취를 했다고 저렇게 참혹한 상태가 되나 싶을지 모르지만, 위 언급한 것처럼 잘못하면 죽기도 한다. 청년경찰이 이 여성들의 목숨은 구할 수 있었지만, 건강한 모습으로 밝게 뛰어와 고마운 청년경찰에 안기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이 여성들의 몸은 이미 회복 불능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난자 채취는 여성의 몸에 매우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 또한 수정된 배아만 있다고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아닐 터, 수정된 배아가 자랄 여성의 몸(포궁)이 필요하다. 이를 이른바 ‘대리모’라 부른다.     



위 허젠쿠이 교수의 실험은 수정된 배아를 그저 포궁 속으로 이식한 것이 아니다. 에이즈 저항성을 가지기 위해 유전자를 조작한 것이다. 유전자 가위라는 기술로 흠결 있는 유전자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여러 차례의 힘든 산전검사와 선별낙태는 대리모의 몸을 혹사시킨다.


흠결 없는 아기의 탄생이라.., 그럴듯하게 들리겠지만, 오판이다. <이게 바로 유전공학으로  간판을 바꿔 달은 우생학의 밀레니엄 판이기 때문이다. 'T-4'라 불리는 장애인 안락사 프로그램으로 27만의 장애인을 없애고 유태인을 절멸시킨 나치의 우생학은 사라진 걸까? 으스스하게도 우생학은 ‘의료 유전학’으로 자리를 대체했을 뿐이다.> <[장애학의 도전] 참고>    


대리모에 반대하는 생물학자이자 사회과학자 페미니스트인 레나트 클라인의 책 [대리모 같은 소리]가 지난해 출판되었다. 앞서 허젠쿠이 교수의 실험을 예시한 건, ‘대리모’를 둘러싼 논쟁의 한복판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다. 레나트 클라인은 대리모논쟁의 가장 전위에 있는 핀레이지(FINRRAGE : 재생산 및 유전공학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 국제 네트워크)의 공동 창립자이며 ‘지금 당장 대리모를 중단하라(SSN: Stop Surrogacy Now)’의 원년 멤버로 대리모의 인권침해에 관해 줄기차게 싸워왔다. 그렇다면 그는 왜 대리모에 반대하는 걸까.

   

‘대리모’는 빈곤, 계급, 성, 장애가 얽힌 정의의 문제! 


“냉혹한 사실만 드러내보자면, 대리모란 여성의 포궁을 계약, 대여, 매매하여 포궁에 배아를 집어넣고 제3자가 그렇게 출생한 아이의 ‘양육자’가 되는 것이다.”(p19)

이 기술은 대리모와 난자 공여자 그리고 불임인 여성의 고통과 눈물을 감쪽같이 없앤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몸을 거래해야 하는 일과 불임이라는 낙인을 안고 살아야 했던 여성의 고통이 간단히 거래 행위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게다 ‘테이크아웃’된 아이가 겪을 정체성의 혼란, 자아존중감의 상처, 그리고 전 생애에 걸쳐 나타날 심리적 문제는 언급조차 되고 있지 않다.    


그럼 누가 대리모가 되는가. 어떤 상황이 여성을 대리모의 시장으로 내모는 걸까. 몸을 내주지 않고는 어떤 수단으로도 돈을 마련할 수 없을 때, 생애 내내 자신의 몸에 어떤 악영향이 미칠 지 설명조차 듣지 못한 채로, 여성은 난자를 내놓거나 대리모를 ‘결정’하게 된다. 이 부정의를 대리모 기업은 ‘선택’ 혹은 ‘행위자성’이라 부른다. 가난이 내몬 ‘강제된 선택’을 선택이라 부르는 일은 염치없는 일이다. 방글라데시, 인도, 캄보디아, 베트남 등의 빈곤국에 대규모 대리모 시장이 형성되고 있는 이유가 설명된다.     



대리모기업들은 대리모를 ‘임신 출산 캐리어’로 호명하여, 아이를 품으며 태아에게 “신체, 두뇌, 심장박동과 숨 등을 제공”하는 생모의 몸을 철저히 지운다. 대리모를 ‘인큐베이터’로 소비시켜 이들의 재생산 행위를 ‘일’로 등치시키는 시도에, 놀랍게도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이 함께 하고 있다.


이들은 상업적 대리모가 젠더화된 이분법을 전복할 수 있다고 믿는데, 가부장 하의 여성의 재생산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리모 아이의 정자 공여자인 ‘아버지의 권리’에 집중해 아이의 시민권을 논하는 현실은, 가부장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의 논거는 허약하다.


대리모의 재생산을 그저 ‘일’로 믿게 하기 위해, 대리모들에게 주입되는 말은 “태아가 대리모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난자와 정자가 수정된 배아를 운반하는 ‘수트케이스’로 대리모의 역할을 규정하지만, 임신과 출산을 겪은 대리모의 심리는 이와 다르다. 임신 과정 동안 아이와 생존을 공유하며 싹튼 생모와 아이의 연대감은, 출산 이후 사라져버린 아이로 인해 상상하지 못한 열패감과 상실감에 처하며, 생애 전반 큰 타격을 받는다.      


난자와 정자의 DNA로 아이가 구성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임신한 여성은 자신의 포궁 내에서 자신의 혈관으로 태반을 만들어 자신의 뼈로부터 나오는 칼슘으로 태아에게 영양분을 공급”(p36)하며, 아이와 수많은 것을 공유하는 과정 속에 생모의 유전자 일부 역시 아이에게 전해진다. 세포의 에너지 공장인 미토콘드리아 DNA는 오직 모체로부터만 유전되는데도, 대리모의 포궁에서 자라 세상에 나오게 되는 아이가 대리모인 생모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논리는 기이하다.

    

대리모 산업으로 피해당하는 여성들의 은폐된 고통을 수도 없이 지켜본 저자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대리모는 윤리적일 수 있는가.’


대리모는 인간 존재의 권리가 인간 존엄에 있다는 국제법의 기본 전제를 깡그리 무시한다. 가난에 내몰려 택한 재생산을 ‘선택’했다고 믿게 해 대리 임신과 출산을 재생산의 도구로 만들어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가하고, 무차별 난자체취로 몸과 정신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히고, 인신매매되어서는 안 되는 아동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은 국제인권협약의 중대한 위반이다.     


대리모 산업을 금지가 아니라 규제로 풀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꽤 그럴듯한 주장은, 불임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는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그러나 대리모 기업들이 규제주의자들에게 펼치는 로비의 규모, 그리고 이들과 공생하는 집단인 변호사, 브로커, 의사, 상담사 등이 벌어들이는 막대한 이익은, 실은 이들의 선의라는 것이 고작 신자유주와 공모한 ‘재생산성매매’일뿐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대리모는 실로, “빈곤, 계급, 성, 장애가 얽힌 정의의 문제”이다.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또 하나의 물음은, ‘아이를 가지는 것이 권리인가’의 문제다. 이는 불편한 질문임에 틀림없다. ‘아이를 가지는 것이 권리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불임의 고통을 외면하는 냉혹한 사람이 되거나 혹은 동성애 혐오자로 낙인 받을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대리모의 적지 않은 구매자가 게이커플인데, 이들은 자신들도 아이를 낳을 권리를 줄기차게 개진해 왔다.

    

아이를 가지는 것이 권리가 되는 경우를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생학의 폭거로 강제 불임수술과 낙태를 당해야 했던 장애인들과 약자들에게는 분명, 아이를 가지는 것이 ‘권리’여야 한다. 하지만 불임이나 동성 커플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이를 가질 권리를 획득하는 데엔 동의하기 어렵다. 아이를 키우며 즐거움과 보람을 얻는 방법이 아이를 ‘테이크아웃’해 ‘소유’하는 것밖에 없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가 자라 자신의 존재는 누구의 난자와 정자 그리고 누구의 포궁의 구성물이냐고 물을 때, 윤리적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렇게 태어난 아이들이 어떤 영향을 받으며 전 생애를 살아낼지 아직 누구도 모른다는 데에 있다.     

저자는 대리모 인권보호는 규제가 아닌 전면적인 금지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규제 논의는 가장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질문인 가부장에 근거한 여성 재생산의 착취적 구조를 회피하게 하기 때문이다. 가능하다고 여기지 않던 1926년의 노예제 협약과 1956의 노예제 폐지, 노예무역, 노예제에 준하는 조치와 제도에 대한 추가협약이 만들어진 것처럼, ‘대리모 폐지를 위한 국제협약’도 이루어져야 한다. 대리모가 치명적 인권침해라는 동의와 이를 근절하려는 의지가 절실하다.     


대리모를 합법화하지 않고 있는 한국은 대리모의 청정국가일까? 음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리모 계약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고 있다. ‘가난’이 여성들을 대리모로 이끌었을 한국의 상황 역시, 자본주의와 가부장이 공모해 여성 재생산성을 착취하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도 대리모에 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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