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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Aug 28. 2023

엄마를 싸그리 죽이는 이상한 드라마 <마스크 걸>

웹 드라마 <마스크 걸> 리뷰


요즘 핫한 <마스크 걸>의 전개나 서사가 썩 납득되지 않았다. 정주행은 단지 배우들의 ‘미친’ 연기 때문이었다. 특히 염혜란의 연기는 말이 필요 없었다.      


여러 미 납득 중에 모미(이한별)가 오남(안재홍)을 죽였을 때도 있다. 분노는 알겠지만 죽일 거까지야... 게다 사체 훼손까지야... 범죄 후 모미는 성형 수술을 단행한다. 예뻐지려는 게 아니라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이런 점에서 모미의 성형은 역설적이다. 그토록 주목받고 싶던 시간을 경과해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고 난 후에야 세상(남자)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성형을 했으니 말이다.      


오남의 엄마 경자(염혜란)의 성형도 미 납득이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고도 복수를 수행할 수 있는데 성형은 좀 오버 아닌가. 어쨌든 그도 얼굴을 감추기 위해 성형한다. 모미처럼 잡히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잡기 위해, 아들의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 얼굴을 갈아엎는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드라마는 말한다. 나는 경자의 그렇게까지 갈 이유 없는 복수심, 그리고 무엇보다 그 나이대의 여성으로서는 가공할 지치지도 않는 체력 때문에 놀랐다.    

  


고현정과 염혜란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캐릭터들의 괴물성의 근원을 단지 모성으로 보지 않기를 바란다고 피력했다.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복잡한 인간 심리가 단지 모성에 의해서 단일하게 구성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를 설득하려면 드라마의 촘촘한 상황 배치가 필요하다. 


모미가 왜 강간범의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는지, 그리고 이 아이를 맡긴 곳이 왜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믿은 엄마였는지, 그리고 경자가 그토록 지독한 복수를 하는 근저에 다른 어떤 심리가 똬리 틀고 있는지 말이다. 이런 설명이 불충분한 한, 배우의 연기가 아무리 역대급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괴물성은 모성 외에 달리 해석되기 어렵다.      


사실 경자의 별스런 모성은 별스럽지 않다. 가장이 무능하거나 부재한 가정의 경제는 언제나 엄마의 몫이었다. ‘주부’라는 말은 식민지나 전쟁을 겪은 시대엔 있지도 않은 상상 속의 언어였다. 아이들의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기 위해 생계를 책임진 엄마에게 주부가 가당키나 한 말이었겠는가. 


경자 역시 무능하다 먼저 죽은 남편을 대신해 가장이 되었다. 혼자 사는 여자라 얕보이지 않기 위해 입을 사납게 길렀고 하느님을 기둥서방 삼았다. 한눈팔 새 없이 오남 만을 위해 살았다. 언젠가 오남이 자신의 구정물 같은 서러운 삶을 대신 복수해 주리라 믿으며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헌신적인 엄마의 아들은 행복하지 않다. 애지중지 키웠지만 사나운 엄마에겐 결정적으로 자애로움이 없기 때문이다. 결락된 자애로움은 결격의 모성이 되어 마침내 아들의 변태나 범죄를 대속하게 하는 구실이 된다. 이것이 한국 드라마에서 반복해서 재생산되는 나쁜 엄마 콤플렉스다.   

   

드라마 <나쁜 엄마>에서는 자식의 성공을 위해 아들을 가혹하게 훈육하는 엄마를 보여준다. 그러다 결국 나쁜 엄마는 아들의 추락이라는 끔찍한 대가를 치르고, 다시 아이가 된 아들을 재활시키기 위해 분투하다 순직함으로써 아름다운 미담의 주인공이 된다. 참 징글징글한 모성이지 않은가. 잘되면 제 탓이고, 잘못되면 죄다 엄마 탓으로 돌리면 되는 참으로 편리한 책임 회피 이데올로기는 대체 언제까지 대중을 우려먹으며 엄마를 결박할 것인가.      


경자 역시 아들 뒷바라지를 살뜰하게 했지만 아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옘병”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거친 경자에겐 모성의 큰 덕목인 자애로움이 결여됐기 때문이다. 생계부양하면서 말도 우아하게 하는 품위까지 갖추어야, 사회는 제대로 된 모성이라 대접한다. 이런 면에서 경자는 헛 산 것이지만, 오남이 살아 있다면 죽을 때까지 보은했을(그럴 리 없지만) 여생을 박탈당했다고 우기고 셀프 보상을 위해 복수를 결행한다. 그리고 세상은 이를 괴물이 된 모성이라 부른다.      



해석불가한 모성은 모미에게서도 드러난다. 모미는 왜 딸 미모(신예서)를 낳고 어떤 친밀함도 느끼지 못하는 엄마에게 맡겼을까. 그리고 결국 딸 미모가 위험에 처하자 탈옥을 감행해 아이를 구함으로써 엄마 역할을 마무리한다. 죄수의 모성이다. 더 이상한 것은 모미가 딸을 위험에서 구하기 위해 미모가 오남의 아이임을 밝히면 될 것을 끝까지 발설하지 않음으로써 부계를 배반하게는 했다. 물론 여기서 경자가 미모가 오남의 딸인 것을 알고 마음을 바꾼다면 신파가 됐을 테지만, 아이를 구하는 게 우선이었다면 모미의 결행은 상당히 무모했다.      


결국 드라마는 모든 엄마 된 자들을 죽였다. 이 드라마의 제작진은 광기를 가진 독특한 ‘여성’ 캐릭터를 제시한 듯 보이지만, 결국 ‘엄마’로 수렴되는 광인들이 각자의 자식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자기 파멸의 신화를 완성하고야 말았다. 괴상하다. 종국에 엄마인 사람으로 든 생각은, “엄마 노릇 못해 먹겠다. 가족 돌봄도 지치는데 피 흘리는 전사까지 되라는 거냐, 아예 나를 죽여라.” ㅋㅋ     



내가 가장 걱정되었던 건 미모였다. 믿었던 사람에게 목숨의 위협을 당하고, 피 튀는 끔찍한 결투의 현장을 지켜봤고, 사랑했건 증오했건 친밀한 사람을 모두 잃은 미모는 정말 괜찮을까. 드라마는 미모의 이젠 괜찮다는 독백을 들으며 안심하란다. 


안심의 배후는 결국 자신을 구한 게 그토록 미워했던 할머니와 엄마이며, 그들이 목숨으로 대속한 사랑으로 아이는 다시 살아가게 될 힘을 얻는다는 것이다. 다행이다. 그런데 어딘지 찜찜하다. 엄마들의 묘지를 가르고 다시 태어난 아이라... 드라마가 끝까지 납득이 안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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