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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Sep 05. 2023

억울한 죽음의 추도에 국가 이데올로기가 개입해선 안된다

'간토대지진 추도회' 참석한 윤미향 의원을 물들인 색깔론을 보다...


일본군 위안부 김학순의 증언이 있기 훨씬 전 배봉기가 있었다. 1975년이었다. 그런데 그는 어째서 ‘최초’의 증언자가 되지 못했을까?      


배봉기는 일본군 위안부로 도카사키 섬에 있다, 미군의 어마어마한 폭격을 맞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오키나와로 끌려갔다. 일본의 투항으로 전쟁은 끝났지만 어떤 연고도 없는 낯선 곳에서 사는 것은 죽느니 만도 못한 곤경이었을 것이다. 곤경을 증명하듯 1975년 발견되었을 때 그는, 집이라고도 할 수 없는 움막 같은 곳에 홀로 기거하고 있었고 한국말을 잊은 상태였다.      


배봉기를 찾아낸 이들은 총련(조선총련총연합회) 오키나와 지부 일꾼이었던 김수섭 김현옥부부였다. 배봉기의 존재는 큰 충격을 준 사건이어서 한국 언론에도 전달되었지만 어쩐 일인지 기사화되거나 가시화되지 않았다. 총련이 북한의 지원을 받는 조직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배봉기는 총련과 아무 상관 없는 삶을 살았는데도 말이다.      


일제는 패망 후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추방하고 싶었을 것이다. 추방의 명분으로 시행된 외국인 등록령은 조선인을 외국인으로 분류했다. 대부분 징용이나 군속으로 끌려왔을 조선인들은 하루아침에 불완전한 신분이 되어 살아가야 했다. 물론 상당수는 해방된 조선으로 돌아갔지만 당연히 그럴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재일조선인에게 조국은 어디였을까? 전쟁으로 분단되기 전 이들에게 조선은 한 곳이었다. 북조선도 남조선도 아니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북과 가까우니 ‘빨갱이’고 남과 친하니 ‘우리 편’이라고 편협하게 재단하는 몰 역사적 사고는, 홍범도 장군이 러시아 공산당에 적을 둔 적이 있으니 불순세력이라고 몰아붙이는 선동과 동일하다.      


당시 재일조선인들이 겪어야 했던 수난은 막대했다.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일본인들의 위협 속에 살아남아야 했던 조선인은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기도 했다. 곤경에 처한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준 쪽은 북측의 총련이었다. 조선인학교 지원도 총련에서만 했고 남한은 관심조차 없었다.  

    

이런 이데올로기가 대립했던 배경은 재일조선인 유학생을 북의 첩자로 몰아 끔찍하게 고문하고 옥에 가두는 사건을 낳는다. 1971년 ‘서승, 서준식 형제 구속사건’이 대표적이다. 남한을 조국이라 생각하고 분단 상황에 처한 민족 현실에 간여하고자 남한에 유학 온 이들에게 조국은 무슨 짓을 했는가?   

       


이처럼 총련이 활동하는 일본은 남한 위정자에게 거의 빨갱이 소굴이나 다름없었다. 어릴 적 내가 보던 수많은 드라마에 등장했던 총련의 존재는 남한을 위기에 처하게 만드는 북한의 첩자들이었다. 당시엔 총련과 ‘빨갱이’가 동일어인 셈이었으니 프로파간다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가. 어쩌다 힘없는 나라에 태어나 강제로 적에게 끌려가 노예처럼 부림을 당하다 겨우 살아남았지만, 또 어쩌다 보니 남으로도 북으로도 갈 수 없어 일본에 남아야 했던 조선인들의 심정은 얼마나 심산했을까. 

       

다시 배봉기로 돌아와서, 그럼 그는 왜 1975년이 되어서야 존재가 드러났을까? 이는 그가 오키나와라는 곳에 살았기 때문이다. 오키나와(류큐)는 본래 지금의 일본인과 다른 종족으로 고유한 문화를 가지고 살았지만 오키나와현으로 강제 편입되었다. 이후 일제의 패전으로 오키나와는 미군에 의해 점령되어 류큐열도 미국군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군의 관할이 된다. 일본군 위안부였던 여자들은 다시 미군 위안부가 되어야 했으니 혹독한 시간이었다. 그러다 1972년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된다. 총련은 오키나와 조선인들의 강제 연행 실태 조사에 착수한다. 남한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몇 년간에 걸친 조사 끝에 마을 주민의 정보를 통해 마침내 배봉기를 발견하기에 이른다. 1975년이었다.   

   


나는 배봉기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어가며 살아가야 했던 삶은 어떤 것일까. 비록 그의 존재가 총련에 의해 알려졌더라도, 남한은 그를 그렇게 지워도 되는가? 그가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스스로 공언한 건 아니지만 분명 밝혀진 사실이었다. 김학순을 ‘최초’의 일본군 위안부 증언자로 호명할 때, 물론 나는 김학순의 용기를 존경하지만, 종종 희미한 분노에 휩싸이곤 한다. 대체 역사란 무엇인가? ‘첫’ 증인으로 기록되는 것조차 이데올로기와 권력에 의해 규정되었다.    

  

며칠 전 간토대지진 100주년이었다. 한겨레 보도를 보니 한 일본인이 간토 학살의 첫 공문서를 찾아냈다고 한다. 반가웠다. 간토대지진 100주년을 맞아 일언반구 없는 윤석열 정부는 대체 어떤 생각일까? ‘귀찮은 일이 생겼군, 일본이 조작된 증거라고 하면 따라 해야지’라고 할까?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1107096.html


일제 식민지 시기 조선인의 억울한 희생은 얼마나 많았나? 간토 학살 시 수천 명, 히로시마와 나카사키 원폭 희생자 수만 명, 풍찬노숙하며 일제에 저항했던 수많은 독립군과 조력자들이나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가거나 강제 동원되어 스러진 이는 또 얼마겠는가? 이들의 억울한 희생에 정부나 대통령은 통한의 심정을 표해야 하는 게 마땅하지만,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년 도쿄동포추도모임’에 참석한 윤미향 의원에게 “반국가행위에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 추도 모임은 총련뿐 아니라 일본 시민사회가 반세기 넘게 꾸려온 연대의 행사다. ‘반세기’다. 그 많은 시간 동안 한국 정부는 추도사 한 줄 써 띄우지 않았고, 억울한 죽음의 후손인 재일조선인이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닌 채 혐오와 차별을 겪으며 살아가야 하는 삶의 지위 개선을 위해 무엇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반국가적이고 반민족적이지 않은가. 영화 <유령>의 유령들처럼 귀신으로라도 화해 반민족행위자를 단죄해 주었으면 좋겠다. 살아있는 사람이 상대할 후안무치가 아닌듯하다.   

   

* 위 글은 <오키나와와 조선의 틈새에서>, <공생을 향하여>, <서경식 다시 읽기>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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