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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Sep 27. 2023

<마스크 걸> '오남'의 '미소지니'


근래 좀 오래 생각해왔던 문제를 매조지었다. 실마리를 준 것은 책 <다운 걸: 여성 혐오의 논리>였다. 얼마나 고맙던지. 저자인 케이트 맨 선생님께 감사와 경의를 보냅니다.     


이 벽돌 책을 소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여름내 벽돌 책들을 끼고 있었는데, 공부가 짧아 어느 벽돌 하나도 격파가 안 됐다. 이 책은 ‘여성혐오’가  #YesAllWomen처럼 모든 여성을 대상으로 한 젠더 기반의 보편적 혐오 정서의 형태가 아니기도 하다, 특정한 개인에게 여성이라는 이유로 표출되는 공공연한 적대감이 그 증거이며, 이런 현상은 이미 만연해 특정 여성 대상 폭력 범죄(모욕, 상해, 살해)로 드러나고 있다고 진단한다. 더 자세히 명쾌히 알고 싶다면 일독을 추천하고, 저자가 준 힌트에 기반해 고민했던 문제를 풀어 보겠다.     

딱하긴 한데 찜찜했던 ‘오남’에 관하여     


고민의 대상은 드라마 <마스크 걸>의 ‘오남’이었다. ‘오남’은 문제적이다. 그는 각종 포르노에 심취해있고, 포르노를 통해 성적 욕망을 충족한다. 포르노를 보는 남자들에 관대한 것은 남자들의 성적 욕망이 권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포르노로 사전 시뮬레이션을 하고 성 구매 등으로 이를 실현한다. 게다 실현했다고 여기는 성 자아의 대상을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하고 공유해 전시 소비한다. 

     


‘오남’의 실전은 드라마 상 아직 미 실현이다. 실현을 대리해 ‘벗방’을 열열이 시청하거나, 포르노나 리얼 돌을 매개해 자위한다. 이렇게 보면, 실제 성 구매를 하는 것은 아니니 착하지 않냐, 할 수 있다. 이 판단은 후술로 미룬다. 어쨌거나 포르노 등을 보는 남자가 포르노 등을 보지 않는 남자보다 성 구매할 확률이 현저히 높다.     

‘오남’이 대놓고 상남자가 아니고 대놓고 ‘여성혐오’를 하지 않았기에, 그리고 결정적으로 모미를 지지하고 모미의 약자성에 연대를 표명했기에, 시청자는 모미가 그렇게 나쁜 놈도 아닌 ‘오남’을 죽인 것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오남’은 명백한 ‘여성혐오자’였다. 그러면 죽여도 되냐고? 뭐 그거는 아니다.  

   

여기서 ‘여성혐오’를 잠시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평화학자 정희진 선생은 ‘여성혐오’라는 말에 거북함을 표시하는 학자인데, 이 말이 ‘misogyny’라는 원어의 함의를 다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성혐오’라고 하면 화들짝 놀라는 남자들이 하는 반론 대부분은, ‘나는 우리 엄마 마누라 다 좋아한다. 미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여성혐오자냐’다. 이런 반문이 나오는 이유가 ‘여성혐오’라는 용어가 불충분하게 번역되어 오해를 부르기 때문이다. ‘misogyny’는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여기고, 여성을 가부장에 기반한 여성의 성 역할자로 못 박아 타자화하는 고정관념을 말한다.    

    

저런 반문을 하는 남자들의 주장처럼 남자들은 여자를 미워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어떻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즉 가부장이 허락한 한의 여자여야만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또한 핵심은 남자 일반이 “아낌없이 주는 여자”가 당연한 것이고, 당연하기에 “아낌없이 주는 여자의 모든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서비스’는 사회 노동은 물론이고, 감정 노동, 돌봄 노동, 성적 노동 등을 아우르며, 이에 애정, 흠모, 아량, 존경심, 수용, 안정, 관심, 배려, 위로 등의 감정이 당연히 수반되어 제공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가부장적 질서를  행하지 않을 때, 여자들은 ‘나쁜’ 여자가 되어 적대감의 표적이 된다.      


다시 ‘오남’에게 돌아와서, 그의 포르노물 중독과 리얼 돌을 향한 자아도취적이고 망상적인 애정과 섹스 행각은 어떤 혹은 모든 여자에게 받을 성적 ‘서비스’를 혼자 연출해온 셈이다. 그러다 어느 날 이를 현실에서 실현할 대상인 모미를 찾은 것이다. 망상 속에서 내 여자로 점찍고 흠모한 ‘마스크 걸’이 회사 동료인 모미라는 것을 알고, ‘나는 너를 알고 있다’는 협박성 메시지를 보내 긴장시킨 그의 감정을 순수한 애정으로 볼 수 있을까.      

못생겼지만 마스크를 쓰면 내가 바라는 여자로 변하는 모미는 자신의 소외되고 비틀린 자아와도 일치한다. 이는 양가감정을 자아낸다. 비슷해서 좋지만 또 그만큼 증오하게도 된다. 게다 약점을 포착했다. 약점은 자신의 여자로 만들 비장의 무기가 된다. 


‘오남’이 모미를 위해 살해 현장을 수습하고 적극 조력한 것은, 이를 통해 모미를 자신의 여자로 취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남’에게 모미의 애정을 동반한 성적 서비스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가부장의 지침이 은밀히 하달되었던 것이다. 내 것이니 내 마음대로 강간해도 되었던 것이다. ‘오남’의 선의는 뿌리 깊은 가부장을 감추기 위한 위장이었다.      


곳곳에서 기생하고 드러나는 ‘여성혐오’     


‘여성혐오’의 또 다른 사례를 위해 나는 얼마 전 겪은 심한 빡침을 얘기해 보겠다. 정치적 올바름으로 무장한 한 남자는 공적 장소에서 아무렇지 않게 젊은 남자의 성적 권리를 화제로 꺼냈다. 요즘 젊은 남자들이 실업으로 의기소침하고 소위 일본식 ‘히키코모리’가 늘어나 큰 사회문제라고 했다(여기까지는 동의한다). 



그가 만나본 젊은 남자들이 취업이 안 돼 집에 있다 보니 여자를 못 만나고, 여자를 못 만나니 섹스를 못하고, 섹스를 못하니 엄청난 스트레스가 쌓이고, 이것이 각종 (성)범죄로 연결된다고 천인공노할 진단을 했다. 대책으로 공적인 섹스 창구가 필요하고, 젊은 남자들의 성적 소외를 사회적 차원에서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무코리타’ 살의를 느꼈다.      


그가 만난 젊은 남자들이 말하는 섹스를 들여다보면, 여남 간의 성적 쾌락에 방점이 찍힌 것이 아니라, 남자들이 당연히 누릴 재화로서의 성적 서비스를 말하고 있다. 남자들의 성적 욕구는 참을 수 없는 본능이기에 여자들이 이에 응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이 망할 풍토는 20대 초반인 딸애의 전언으로도 짐작된다. 딸애 친구들의 섹스가 자신들의 욕구 때문이 아니라, 사귀기 시작한 남친의 그칠 줄 모르는 섹스 푸쉬 때문이라는 토로가 그것이다. 여자는  누구든, 저 혼자 친밀감을 느껴도 곧장 성적으로 대상화해 섹스로 나아가는 남자들의 이 미친 기대감은, 모든 여자는 내 것이고 나는 성적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가부장의 주문을 승계한 때문이다.    


뭐가 당연하다는 말인가? 취업이 안 되는 것인 남자 청년들만의 고통인가? 그 고통을 달래기 위해, 어떻게 점점 심대해지는 양극화와 불평등을 조금이라도 해소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성적으로 이 가여운 남자들을 달래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인가. 젊은 남자들의 비틀린 자아에 대응한다는 것이 고작 나이 든 남자의 ‘여성혐오’였으니, 이 사회의 남성 연대가 얼마나 천박한 지경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섹스를 권리로 습득한 젊은 남자들은 이미 가까운 관계건 아니건 여자들의 성 착취에 능하다. ‘N번방’이 이를 참혹하게 입증하지 않았나. 스마트폰 하나면, 인터넷만 연결되면, 언제 어디서 건, 젊거나 늙거나,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구별 없이, 모두 골고루(이것의 평등은 이루어졌다) 촘촘히 성 산업이 침투해있는 이 나라에서 젊은 남자들의 섹스를 사회적 이슈로 고민까지 해야 하는가? 고민은 이 끔직한 ‘여성혐오’를 어떻게 발본색원할 것인가 여야 하지 않은가.  

    

이렇듯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아낌없이 받아야 한다고 간주되는 모든 재화가 제 것이 되지 못할 때, 즉 섬김을 받지 못할 때,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곳곳에서 적대감을 표출한다. 이것이 ‘여성혐오’다. 가부장의 규범에 순응하지 않는 여자들을 의심하고, 조롱하고, 모욕하고, 증오하고, 때리고, 강간하고, 죽인다. ‘오남’ 역시 이 혐의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한 블로그 이웃이 사랑받고 관심받고 싶었던 미약한 존재로 연민했던 ‘오남’의 약자감은 개인적 심리적 차원에서는 공감될 수 있다. 그 또한 가부장의 수혜자인 동시에 피해자일 수 있음 또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여성을 공격하는 사회문제인 ‘여성혐오’를 개인의 심리적 차원에서만 바라본다면 이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케이트 맨의 주장처럼, 시각을 가해자의 개인 심리가 아니라 피해자가 당한 폭력 행위로 이전시켜야만, 한 가해자의 심리적 일탈로서가 아닌 이를 가능하게 한 메커니즘인 ‘여성혐오’를 직면하게 된다.      


‘오남’에게 향하는 연민 또한 어쩌면 그가 남자이기에 누리는 ‘himpathy’일 가능성이 크다. ‘얼마나 힘들었으면’이라는 관용에 어떤 젊은 여자가 등가의 저울에 놓여봤는가. 또한 ‘himpathy’가 남성뿐 아니라 여성 일반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는 데서, 여성 또한 ‘여성혐오’의 가해자이자 공범일 수 있음을 망각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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