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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Nov 23. 2023

'아직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파주시 용주골 행정대집행 저지 행동에 함께 한 연대지의 후일담

  

아침부터 조마조마했습니다. 오늘은(11월 22일) 파주시 용주골 성매매 집결지 행정대집행(철거 용역)이 예고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행정대집행은 계고 후 90일간의 이의신청 기간을 두는데, 파주시가 이를 무시하고 들이닥칠 모양입니다. 불법입니다.  

   

보통 용역이 들어오는 시간은 오전 9시랍니다. 헌데 파주시가 워낙 막가파 행정을 벌이다 보니, 밀고 들어올 시간을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집결지 종사자들과 연대자들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대집행에 대비해 이른 아침부터 집결지 입구에 도열했습니다.   

  

연대자 인원이 많지 않다 보니 집결지로 진입하는 모든 출입구를 막을 수 없어 주 출입처인 두 구역의 입구만 막아서게 되었습니다. 연대자들은 서로의 양팔을 나누어 힘껏 끼고 두 손은 굳세게 깍지를 꼈습니다. 용역과 대치하다 대열이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안간힘이었습니다.     

 


9시가 가까워 오자 올 것이 오고 있었습니다. 집을 부수기 위한 크레인과 집회자들을 강제해산시키려는 공무원과 경찰이 밀물처럼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폭력 중에 가장 무서운 폭력이 뭐겠습니까. 공권력 아니겠습니까. 공권력의 현장에서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포를 뭉그러뜨릴 뜨끈한 뭔가가 속에서 치밀지 뭐겠습니까. 분노였습니다.    

  

집결지에 모인 연대자들의 행동은 신고된 합법 집회였지만 파주시는 아랑곳없었습니다. 모든 환경이 집회 참가자들에게 비우호적이었습니다. 경찰은 합법 집회를 보호하기는커녕 집회 참가자들에게 심리적 위협을 가하기 위해 불법 채증을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파주시가 새겨진 조끼를 입은 일단의 공무원들이 집회 참가자를 압박하기 위해 대열을 갖추고 한 발짝씩 집결지 연대자 쪽으로 접근해 왔습니다. 

     

이때 쫄 줄 알았겠지만(좀 쫀 건 맞습니다ㅎㅎ), 연대자 중 한 분이 “크레인? 나를 밟고 가라. 한 발짝도 안 움직일 테니”라며 분기탱천을 보이셨습니다. 허세가 아니라는 걸 현장의 모두가  감지했습니다. 사실 연대자들 대부분 동종의 마음이었을 겁니다. 쫄보인 저도 오늘은 여기서 뜯기든 끌려가든 절대 물러설 마음이 없었으니까요.    

  

이 와중에 코앞까지 바짝 다가선 공무원들과 마주 보고 있자니, 그들의 면면이 세세히 보이지 않겠습니까. 낡아 보이는 얼굴, 피로한 얼굴, 무감한 얼굴 중 상당히 앳돼 보이는 얼굴도 있었습니다. 제겐 아들 벌이고 몇몇 연대자에겐 동생 혹은 친구 벌일 사람들이죠. 친구 벌일 한 연대자가 익살을 떨었습니다. “나하고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분들도 있네요. 반갑다 친구야. 먹고살기 힘들지?” 하하하.    

  

맞습니다. 다들 먹고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그렇다고 심각히 분할된 신자유주의의 신분인 갑 을 병 정...이 동일한 피,가해자의 맥락에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두 가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괴상한 세상에 살게 되었습니다. 종종 자신의 포지션을 망각하고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넘치는 건 사회 병리적 징후일 겁니다.


      

이를 오늘의 상황에 빗대보면 이런 겁니다. “나도 파주시장(상급자)이 까라니까 까는 거다. 나도 피해자다.”라는 변과 사회가 돌보지 않아 집결지로 스며들 수밖에 없었던 집결지 여성들의 피해를 동급에 놓고 같은 피해자라고 겨룰 수 있냐는 겁니다. 그럴 수 있습니까? 지금 파주시가 벌이는 행태는 ‘을’과 위치도 보이지 않는 흐릿한 ‘정’을 대치시켜 싸우게 하고 있는 겁니다. 참 부정의하지 않습니까? 

     

파주시가 부정의한 도시인 것은 집결지에서 벌이는 막무가내 행정만 보아도 알 수 있지만, 행정대집행을 막아내기 위해 스크럼을 짜고 서 있는 집회 참가자들의 면면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민망하게도 연대자들 중 파주 여성 인권 단체나 시민 단체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집결지 종사자와 관계자를 제외한 연대자들 모두는 파주 관외에서 오신 분들이었습니다. 성노동자 해방행동 차차, 반성매매 인권행동 이룸, 성적 권리와 재생산을 위한 센터 셰어, 이름이나 소속을 다 파악하지 못한 개인 등의 활동가들이 연대하고 있었습니다.  

    

파주의 어떤 시민단체건 여성인권단체건 일절 개입하지 않고 있는 현실이 참담한데요, 이것이 파주시 여성인권 감수성의 현주소입니다. 이상한 게 더 있습니다. 가부장의 가장 대표적 구조적 피해자인 성매매 여성들에게 이토록 냉담한 도시가 ‘여성친화 도시’임을 표방하고 있는 겁니다. 참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다시 얼굴을 외울 정도로 가까이 대치 중이던 공무원들로 돌아오겠습니다. 지난 10월부터 파주시는 공무원 대상으로 대대적인 교육을 진행해 왔습니다. 기지촌과 이어진 70년 집결지 역사에 얼마나 많은 여성의 인권 착취가 있었는지를 반성과 진실 없는 편향된 폭로가 주를 이루는 교육이었습니다. 이렇게 맥락을 소거한 역사의 주입은 강자의 논리로 오염되고, 그 결론은 악의 소굴(사실은 최약자의 주거지죠)인 집결지를 부숴야 한다로 종결됩니다. 

     

70년간 여성을 착취해 온 가해자가 바로 파주시였음은 철저히 은폐하고 오직 집결지와 집결지 종사자만을 불법의 주체로 만드는 겁니다. 오늘 연대자 스크럼 앞에 위협적으로 서 있으라 명을 받은 저 공무원들도 집결지 종사자들만 낙인찍는 염치없는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호도된 정의는 혐오를 낳고, 혐오는 쉽게 폭력을 승낙하게 합니다. 



다시 크레인에 시동이 걸리는 게 보입니다. 그런데 크레인이 주춤하는 사이 이번엔 컨테이너를 싫은 트럭이 들어왔습니다. 좁은 길에 몇 차례 들고나고를 반복하더니 이내 집결지 바로 입구에 컨테이너를 떡하니 내려놓지 뭡니까. 그곳은 토지 소유자가 엄연히 있는 땅인데 허락도 없이 컨테이너를 부려 놓은 겁니다. 집결지를 ‘불법’이라 호통치면서 파주시가 버젓이 ‘불법’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유권무죄 무권유죄이지 않습니까?      

지루하고 두려운 시간이 드문드문 오가는 농담과 간간이 터지는 웃음을 타고 아슬아슬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한 연대자의 기운을 북돋우는 구호 선창과 이에 호응하는 ‘중단하라’는 후창이 불현듯 깃드는 불안을 밀어내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중천에 오른 해가 꽤 뜨거워지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만 해도 영하를 오가던 날씨가 풀린 게 그나마 오늘의 유일한 다행이었습니다. 팔짱과 깍지를 장시간 하고 있다 보니 팔과 손이 저려 왔습니다. 잠깐씩 주물러가며 대치를 이어가는데, 공무원들과 경찰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갔습니다. 어딜 가나 했더니, 밥때가 된 모양이었습니다.     

 

대치가 잠시 중단되고 연대자들도 잠시 휴식을 취했습니다. 점심으로 준비된 김밥이 손에서 손으로 전달되었습니다. 각자 배당받은 호일 두른 찬 김밥을 스크럼 짰던 주변에 대충 걸터 앉아 우물우물 씹어 삼켰습니다. 다들 이른 집회에 서둘러 나오느라 아침을 걸렀을 테죠. 이 마당에 무슨 입맛이 나겠느냐만, 기운을 내야 하니 각자의 분량을 성실히 해치웠습니다.   

   

점심시간이 지나니 어김없는 밀물처럼 다시 그들이 들어왔습니다. 또 얼마를 버텨야 할까, 연대자들은 잠시 시름맞았을 겁니다. 그런데 보자니 밥 먹고 배불러선지 아니면 그러라는 명을 받았는지, 대치하던 공무원들의 표정에 나른함이 스며있었습니다. 피곤하기로 따지면 연대자들이라고 다르겠습니까. 대치가 길어지고 느슨해지자 연대자들도 스티로폼을 깔고 앉거나 누웠습니다. 위험 경계가 알려지면 다시 대열을 정돈하고 경계가 이완되면 휴식 취하기를 반복하며 오랜 대치가 이어졌습니다.   

 


집회 처음부터 눈길을 끄는 외국인들이 있었는데 잠시 그분들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미국인 여성 한 분과 프랑스인 남성 한 분이었습니다. 두 분 모두 영화를 만드는 분들인데 집결지 종사자들에게 관심이 많아 집회에 오게 되었답니다. 이 중 한 분이 대화 중 뜻밖의 말을 했습니다. 프랑스 남성분의 배우자가 어떤 자리에선 한국 페미니스트들이 성매매 종사자들에게 관심이 없다고 얘기했다 된통 봉변을 당했다는 얘기였습니다. 후후후... 저는 그게 뭔 말인지 단박에 알아들었습니다. 이 해프닝이 지금 여기서 적나라하게 증거되고 있으니까요.      


집결지 종사자들의 인권을 위해 어떤 페미니스트건 어떤 여성인권 단체건 모두 입을 다물고  어서 집결지를 폐쇄하라는 파주시의 거수기 노릇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들은 집결지 종사자의 인권을 옹호하는 것이 곧 집결지 존치의 찬성이며 가부장을 수호하는 것이라는 도그마에 빠져있습니다. 여기서 묻고 싶습니다. 특히 파주의 여성인권단체에게, 더 특히 파주 성매매 여성 지원 단체인 ‘쉬고’에게 묻습니다.      


집결지 종사자들의 인권을 옹호함과 동시에 집결지 평화적 해체와 가부장을 부수는 일이 양립 불가능한 일입니까? 그래서 당신들은 오직 탈성매매만이 해방이라고 주장하는 겁니까? 그렇다면 당신들은 어째서 탈성매매 적극적 시도를 위해 이들이 폭넓게 수용할 수 있는 지원정책을 만들라고 촉구하지 않는 겁니까? 파주시 지원정책이 당신들의 주장대로 그토록 파격적이고 관용적이라면, 왜 지금껏 단 3명의 자활지원조례 대상자만이 나온 겁니까? 당신들의 가공된 선의가 진정했다면 조례상 계획한 20명이 모두 채워져 있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다시 대치 중인 집회장으로 돌아오겠습니다. 3시쯤 다른 쪽 집결지에 대기하고 있던 연대자들이 대치 중 다쳤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다음은 여기구나, 긴장감이 돌았습니다. 119 구급차 몇 대가 분주히 오갔습니다. 인접 지역인 법원 119 말고도 교하 119까지 보였습니다. 다친 몇 명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착잡했습니다.     


4시 30분경, 어정쩡 서성대며 감시하던 공무원과 경찰들이 서서히 빠져나갔습니다. 잠시 후 집결지 다른 쪽 입구에서 대기했던 연대자들이 지치고 안도한 표정으로 하나둘씩 모여들었습니다. 집회 주최 측이(집결지 종사자 모임 자작나무회와 차차) 오늘의 집회를 마무리하겠다고 알려왔습니다. 안타깝게도 몇 명이 다쳤지만, 오늘 하루는 이곳을 지켜낸 모양입니다.      



얕은 안도감으로 한숨을 내쉬는 연대자들끼리 격려와 위로가 오갔습니다. 다시 벌어질 위기에 대한 두려움을 애써 밀어내면서, 오늘 하루는 잘 싸웠다 다독이면서요. 아직은 누구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또 침범한다면 연대자들은 다시 모여 싸울 겁니다.   

   

끝으로 이 글을 읽는 당신께 진지한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다음 싸움에는 연대자가 되어 같이 막아주지 않겠습니까? 너무 과한 부탁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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