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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Jun 12. 2024

일회성 이벤트 여행으로 모녀관계가 회복될까?

JTBC 예능 <엄마, 단둘이 여행 갈래> 리뷰


얼추 30년 전 얘기다. 생애 첫차를 사고 운전에 익숙해질 즈음 엄마를 모시고 강화 전등사로 향했다. 환갑을 넘어도 부엌 구석을 벗어나지 못하는 엄마에게 콧바람을 넣어주고 싶어서였다. 점심 메뉴는 엄마가 좋아하는 갈비탕이었는데, 어찌나 맛있게 드시던지 흐뭇했던 기억이다. 반나절 여행이었지만 내겐 좋은 추억인데 엄마에게도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JTBC 예능 <엄마, 단둘이 여행 갈래>를 보다 떠올랐다.  

    

엄마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다. 당신 입으로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여행이라는 취향을 기르지 못한 척박한 삶 때문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여튼 여행 비호감의 엄마를 알아선지, 딸 효리와 첫 모녀 여행을 떠나며 엄마가 보인 비적극성이 나는 이상하지 않았다. 떠나기 전이나 떠나는 순간엔 설렐지 모르나, 늙으며 여기저기 성한 데가 없는 몸으로 종일 걸어야 하는 여행이 그리 환호할 만한 아이템은 아니지 않은가. 왜 ‘노세 노세 젊어 노세’라는 노래가 있겠는가.     


그래도 딸과의 ‘첫’ 여행(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에 방점을 찍고 엄마는 경주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엄마는 동산만 한 왕릉이나 첨성대 등의 문화 유물이 보고 싶어 경주를 골랐다. 보고 싶었던 곳이라도 막상 보면 별로일 때도 있고, 보고 싶다는 마음이 어쩌면 남들은 다 가봤다는데 나만 못 가본 곳에 대한 타자화된 욕망일 수도 있어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런데 효리는 엄마가 보이는 심드렁한 반응에 어이없어하는 기색이었다.   

  


이런 장면들, 엄마의 미온적 표정과 반응에 효리가 보이는 실망 내지 삐침이 조금씩 표출될 때, 프로그램을 같이 보던 딸애도 효리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효리는 엄마에게 이벤트 성 사진을 찍자거나 장난감 총으로 인형을 맞추는 게임을 제안하며 분위기를 띄우려고 하는데, 효리의 노력에 비해 엄마가 뚱하다는 타박이었다.      

나는 불끈해 “저게 저 나이 할머니가 하고 싶겠냐”고 반박했다. 후후후 우리 모녀의 간극이 효리 모녀에게 있었다. 여든의 주름지고 구부정한 노모가 흰 카라가 달린 교복을 뻘쭘하게 입고 들이댄 카메라 앞에서 어색한 웃음을 짓는 것이 무엇이 즐겁겠는가. 


효리가 내내 “못 해본 거 다 해봐”라며 노모에게 ‘도전’을 추동했지만, 엄마는 그 의미 없는 ‘도전’을 왜 해야 하는지 마뜩잖다. 교복을 입어본다고 소망했으나 이루지 못한 학업에 대한 박탈감이 해소되겠는가. 오히려 꼬질꼬질한 교복을 입고 마음에 없는 미소를 짓는 노모가 어쩔 수 없이 희화화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본래도 사진 찍거나 찍히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요즘 들어 더 싫다. 희끗해진 머리나 주름 깊어진 얼굴을 보고 있자면 이물스럽다. 누군가는 이런 불편감을 나이 듦을 사랑하지 못하는 비주체적 사고라 타박하겠지만 할 수 없다. 싫은 건 싫은 거다. 효리 엄마에게 사진 찍고 찍히는 일도 그럴 수 있다. 효리는 20년 넘게 연예인 생활을 했고, 지금은 전 국민적 사랑을 받는 인플루언서로 사진 찍거나 찍히는 게 일상이겠지만, 엄마에겐 고역일 수 있다.      



이처럼 30년이 넘는 세대(디지털) 격차와 독립과 결혼으로 엄마 곁을 떠난 시간이 엄마와 같이 지낸 시간보다 길어진다는 것은 서로를 잘 모르게 된다는 의미다. 나만 해도 옥수수를 좋아하던 엄마에게 찐 옥수수를 사다 드렸다가, 틀니를 해 넣은 뒤로 옥수수가 짤각거려 안 먹는다며 그것도 몰랐냐는 지청구를 들은 적이 있다. 자주 들여다보고 돌본다고 해도 이런 일이 생긴다. 사람은 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큰 변화는 단연 몸이다.      


효리가 엄마와 떨어져 지내는 동안 효리의 몸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겠지만, 엄마의 몸은 급격한 노화를 겪으며 완전히 다른 몸이 되었을 것이다. 뼈와 피부의 구부러짐과 뒤틀림으로 몸의 형태가 변한 것은 물론이고, 여기저기 쓸모를 다한 관절과 근육은 움직일 때마다 고통을 준다. 


늙은 몸은 비틀리고 줄어들고 느려지고, 어느새 취해지지 않는 자세가 많아진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몸과 마음은 분리되지 않는다. 삐걱대는 몸만큼이나 마음도 비활성화될 때가 잦다. 이는 아직 젊은 효리가 엄마와 같은 늙은 몸이 되기 전까지 절대 알 수 없는 진실이다.      


처음으로 떠난 여행이 효리의 연예인다운 기획대로 신바람 나게 진척되지 않는다면, 효리가 변한 엄마의 몸과 마음을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또한 여행이란 즐겨본 사람이 향유할 수 있는 고도의 문화생활이다. 농번기에 김매야 할 작물을 밭에 널브러뜨리고 있는 엄마에게 여행은 내일 일이 두 배로 가중되는 초과노동을 의미한다. 바쁜 효리가 초과노동을 기꺼이 나누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일회성 이벤트인 장기 여행보다 나들이 삼아 짧은 반나절 여행을 종종 하는 것이 노인에게 반가우며, 반짝 해프닝보다 일상을 나누는 것이 더 소중할 수 있다.      



그래서 효리가 나쁜 딸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딸에겐 딸의 입장이 있다. 프로그램에서 얼핏 노출되는 과거의 가난, 크레파스가 없어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릴 수 없었던 어린아이의 난처함, 피할 곳도 없는 단칸방에서 벌어지는 아버지의 폭력을 견뎌야 했던 고통 등 다 드러낼 수 없는 아픔으로 할퀴어진 상처도 있을 것이다. 그 상처를 언제까지 어린아이이지 않은 자식은 성장 후 반드시 어떤 방식으로든 복수한다. 자식의 복수는 때로 정당하다.   

  

딸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지어진 이름에 대해 웃으며 건네는 비난, 여전히 구태한 노모의 삶의 방식에 대한 지적, 적절한 리액션을 하지 않는다는 농담 섞은 타박, 그리고 이제는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알아보는 명실상부한 톱스타로 부모 조력 없이도 성공했다는 떳떳함은 부모에게 열패감을 안기는 자식의 대갚음이다. 


이미 기선을 제압당한 노모의 엄마 됨은 성공한 자식 앞에 “너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살라”는 속죄로 되풀이된다. 모녀간의 권력관계가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늙어가며 유실되는 체력과 경제력은 물론이고, 보잘것없는 부모를 자식이 찾아봐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관계의 소멸까지 노모는 두렵다.     


여든의 노모 세대는 식민지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처참한 삶을 살아낸 세대다. 굶지 않는 하루가 삶의 목표일 정도로 ‘목구멍이 포도청’이던 삶을 살았다. 노모의 경우 일찍이 부모를 잃고 일찍 부모가 되었다. 부모가 무엇인지 학습할 기회도 여유도 없이 줄줄이 자식을 낳고 키웠다. 자식 교육에 대한 문화적 유산이 없는 채로 궁핍을 딛고 엄마 노릇을 잘해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모성은 양가감정을 가질 수 있다. 나처럼 살지 말라는 경구를 딸에게 새기는 가부장에 대한 희미한 반동과 나보다 잘나 성공한 딸의 성취에 당황하는 시기심이 동시에 존재하기도 한다. 나처럼 살지 말라며 딸의 애착을 착취하고, 자기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절대적 ‘이생망’을 저주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이해되고 해석되지 않은 비틀린 모성은 모녀 관계를 어렵게 한다. 하지만 엄마 세대의 이중 구속을 효리 세대는 더는 보편적으로 가지지 않는다. 훨씬 나은 환경에서 ‘제도적’ 관계가 아닌 서로가 우선이 되는 ‘관계적’ 모녀로 나아갈 수 있다.       

 

지금까지 풀어낸 <엄마, 단둘이 여행 갈래>에 대한 생각은 이 프로그램 전부가 작정하고 연출한 기획이라면, 즉 모녀가 투닥대고 적당히 갈등하다 눈물로 화해하고 이것이 진정한 모녀라며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모녀 관계를 여행 판타지로 주조한 것이라면, 내 감상 모두를 기각한다. 모녀 관계에 판타지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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