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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Oct 26. 2024

장애여성들이 공연을 통해 던진 몸이라는 화두

장애여성공감 극단 춤추는 허리 <‘몸 이동’ 준비운동 <얼음 땡>> 리뷰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정은혜 배우가 다운증후군 당사자로서 직접 연기를 보여주어 호평을 받았다. 약간 어색하게도 보이는 그의 연기가 실상 연기의 어색함이라기보다, 그간 드라마 등의 콘텐츠에서 재현된 비장애인의 장애 연기가 오히려 어색했음을 역설하며 묘한 감동을 주었다.      


이는 연기의 리얼리티만을 중시해야 한다거나, 장애인만 장애 연기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장애인이 장애인의 몸으로 연기를 펼침으로써 사회가 무지했거나 경시했던 그들의 몸이 그 나름의 ‘고유함’과 ‘매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럼으로써 시청자는 비로소 장애인의 몸을 그들로서의 인간의 몸으로 바라보는 기회를 가진다. 정상 비정상의 이분법에 갇혀있던 비장애인의 특권적 몸을 면구스러워하면서 말이다.      


변호사이기도 한 김원형은 스스로를 배우라 부르는 게 아직 쑥스러운 장애인 배우다. 오래전 나는 그를 먼저 책으로 만났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은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였다. 부끄럽게도 나는 장애인이 그토록 매력적인 몸을 가지고 싶어 하는 욕망의 주체라는 걸 몰랐다. 


타인을 향해 특히 끌리는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은 몸을 원하는 건 자연스러운 욕망인데, 그들을 마치 몰성적인 존재로 여겼던 것이다. 그는 책에서, 몸의 일부인 휠체어를 묘기에 가깝게 타는 자신의 몸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매력적으로 보이길 간절히 바랐다고 고백했다.      



휠체어를 쓰는 장애인들은 전동 휠체어가 나오면서 신세계가 열리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누가 밀어주지 않아도 어디든 마음대로 갈 수 있다는 해방감을 맛본 것이다. 그런데 배우 김원영은 연극 무대에서 휠체어로 해방되었던 몸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시도를 감행했다. 


휠체어로 매끈하게 움직이는 몸만이 아니라, 바닥으로 기는 자신의 몸도 몸으로 바라보기를 관객에게 소구하는 것이다. 김원영이 배우로서 무대에서 보인 기는 몸은 이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포체투지 투쟁을 통해 현실에서도 재현되었다. 비장애인인 지하철 바닥을 기는 그들의 몸이 불편한가.     


불편하다고 회피할 수는 없다. 비장애인의 불편한 감정은 이들이 불편한 몸을 이동해 밖으로 나오면서 비롯되었다. 집에만 머물던 장애인이 그들의 불편한 몸을 움직여 연극 무대로 지하철로 나서자 그 낯선 출몰에 당황한 것이다. 


이들의 등장 혹은 진출이 충격을 던진 까닭은, 그동안 장애인의 몸을 볼 수 없는 상태로 살며 이 세상이 비장애인의 멀쩡한 몸으로만 구성됐다는 허위를 만천하에 깨부수었기 때문이다. 장애를 극복한 강인한 장애인이거나 장애에 굴복한 불쌍한 장애인이라는 이분법을 무시한 나대로의 몸을 내보이는 장애인의 몸 앞에서 비장애인은 쩔쩔매고 있었던 것이다.      



서두가 길었는데 앞선 얘기는 10월 22일 모두예술극장에서 있었던 장애여성들의 연극 공연 <‘몸 이동’ 준비운동 <얼음 땡>>의 프리퀄인 셈이다. 장애여성 단체 ‘장애여성공감’은 지난해부터 장애여성 극단 ‘춤추는 허리’를 진행해왔다. ‘장애여성공감’이 분기마다 보내주는 활동상에 이들의 ‘몸 이동 프로젝트’가 소개되었는데 매우 흥미로웠다. 지금껏 전원이 장애인인 연극단도 없었는데, 그것도 장애여성 연극단이라니 놀라웠다.  

    

하지만 모든 단체의 속성이 그렇듯이 서로 다른 여러 사람들이 다양하게 모였는데 원팀이 되는 일이 결코 쉬울 리가 없다. 장애하면 대부분 지체장애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춤추는 허리’의 구성원만 보더라도 장애의 형태가 다양함을 알 수 있다. 골형성부전증, 뇌성마비, CMT, 프리더윌리 증후군, 지적 장애 등 각각의 장애를 안고서 극단을 꾸린다. 장애인이라고 모든 장애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서로 다른 장애를 가진 몸을 알아가는 과정이 녹녹치 않았을 것이다.      


‘춤추는 허리’의 무대는 배우들이 여러 파트로 나뉘어 연기를 보여주었다. 첫 무대는 휠체어를 타는 쌍둥이 자매 진성선 진은선 배우가 등장해 자신들의 연기가 애매하다는 평에 대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득한다. ‘니들이 장애 연기를 알아?’라고 말하는 듯했다. 모든 연극이 비장애인에 의해 재현되고 장애인 연기도 비장애인이 수행하는 이 지형의 기준으로 장애인의 연기력을 재단하는 관객의 판단은 사실 매우 편파적이지 않은가. 뜨끔했다.     



휠체어를 매우 잘 타는 두 배우가 휠체어로 무대를 활보하거나 질주하자 무대가 너무 작게 느껴졌다. 이어 자신들의 근육 장애로 손목 부분이 마치 뼈가 없는 듯 흐물흐물 움직이는 것을 보이며 웃음을 유도하자 객석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장애 엄숙주의에 입각하면 이런 장면에서 웃음을 터뜨리면 몰지각한 비장애인의 행동이 되지 않는가. 그런데 비장애인도 몸으로 별짓을 다해 웃기는데 장애인이라고 금지해야 하는 것은 이상하다. 나는 묘한 해방감을 느끼며 신나게 웃었다. 경멸과 조롱이 담긴 비웃음이 아니라면 웃기는 몸을 보고 웃는 것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프리더윌리 장애를 가진 조화영 배우는 큰 몸으로 무대를 압도했다. 어눌한듯한 대사를 천천히 힘있게 전달하는 그의 연기는 매우 매력적이었다. 15번 염색체 이상으로 장애를 가진 자신의 몸을 설명하며 “장애냐 비장애냐 이것이 문제로다”라고 던지는 대사는, 그 고민에 휩싸여있다기보다 ‘이런들 저런들 내 몸이다’로 해석되며 몸에 대한 긍정감을 고조시켰다. 관객과 함께 “프리더 윌리 파이팅”을 외치는 그의 몸 연기가 일품이었다.      


뇌병변장애로 언어 전달이 쉽지 않은 서지원 배우의 등장도 인상적이었다. 그의 대사는 자막과 수어 통역으로 전달되었다. 경증의 뇌병변장애 배우 고나영과 함께 선 무대에서 이들은 각기 정도가 다른 장애로 겪는 갈등을 서둘러 봉합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부의 차이에 의한 갈등을 비집고 나온 소통의 문제를 직시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이보다 장애인 내부의 차이가 더 큰 것처럼, 이들은 서로 다른 자신들의 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이러한 과정은 종국에 동료의 몸을 이해하고 조응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몸에 대한 이해가 더 필요하다는 성찰에 이른다.     


장애로 비틀리거나 왜소하거나 거대해진 몸을 무대에서 만나는 경험은 경이로운 쾌감을 주었다. ‘춤추는 허리’의 배우들은 장애인이 저 정도면 잘했다는 칭찬은 사양할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더 원대하다. 개성 있는 장애로 특별한 배우가 되는 것, 매력적인 배우가 되는 것이다. 신선하지 않은가. 


비장애인의 차별적 시선으로 꽁꽁 결빙된 편견의 얼음덩어리가 마침내 녹아내리고 있다. ‘얼음 땡’이다. 이제 장애여성 몸의 욕망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당신은 이를 목도할 준비가 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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