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 격리, 박탈> (김보람, 쉬징야 외, 2024, 서해문집) 서평
지난해 초겨울 화성에 있는 외국인보호소(이하 보호소)에 갔다. 다양한 이유로 보호소에 있는 외국인들을 조력하고 있는 시민모임 ‘마중’이라는 단체가 있는데, 지인이 ‘마중’의 활동가라 은근히 청을 넣었었다. 혹시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보호소 방문할 때 한번 데려가 달라고. 다행히 ‘마중’이 이해해 주어 보호소 외국인 접견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내가 사는 파주에서 화성 보호소까지는 멀었다. 대중교통이 불편해 자차로 두어 시간 달려 도착한 보호소 풍경은 삭막했다. 관공서인 건물의 외관이 경직돼 보여서만은 아니었다. 그곳이 위치한 주변이 살풍경했기 때문이다. 화성 변두리에 위치해 있어 인적이 없는 채, 보호소가 면한 도로를 살벌하게 달리는 화물차들만이 굉음을 내며 오가고 있었다.
보호소를 첫 대면하는 현관 출입구에는 ‘法(법)과 秩序(질서)의 확립’이라고 쓰인 슬로건 현판이 걸려 있었다. 보호소라며 법과 질서가 왜 핵심 모토일까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보호소 외국인 접견을 위한 절차를 마치고 지인을 따라 들어선 접견실에서 나는 깜짝 놀았다.
외국인과 면담하기 위한 창구인듯한 작은 창이 있었고, 그 옆에 이제는 보기 힘든 벽걸이 전화가 걸려 있었다. 그나마 작은 창은 수직으로 쳐진 창살로 막혀 있었다. 어디선가 본듯한 이 광경, 바로 교도소의 접견실 모습이 아닌가. 보호소 외국인들은 단지 한국 체류에 적절한 비자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것뿐인데 범죄자 취급을 받고 있었다.
이런 이들을 우리는 손쉽게 ‘불법체류자’라 부른다. ‘불법’이란 말은 굉장한 위화감을 준다. 체류에 적절한 비자를 가지고 들어왔다가도 이런저런 사연으로 조건을 맞추지 못하면 미등록 상태가 되는데, 득달같이 ‘불법’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낙인을 찍는다. ‘미등록 이주민’이 맞는 호칭이지만, 사람들은 쉽게 ‘불법’이라 부르고 냉담함과 경계심을 키운다.
접견실 작은방으로 들어온 외국인은 “헬로우”라고 인사한 후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내성적인지 트라우마 때문인지 잠깐 그의 말 없음의 이유를 추측해 보다, 창살이 쳐진 창 너머로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영락없는 수인의 형상일 것을 알고 있을 그의 상태가 역지사지로 가늠됐다.
활동가인 지인 역시 처음 만난 외국인과 전화로 대화를 시도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어서 진땀을 빼고 있었다. 막상 줄 수 있는 도움은 필요 물품을 제공 해주는 정도고, 갇혀있는 그가 정작 궁극적으로 원하는 탈소를 시켜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일정을 마치고 보호소를 나서는데 생각보다 더 마음이 무거웠다. 한 인간을 ‘불법’이라 규정하고 마음대로 가두고 억압하는 공권력이 무서웠다. 나는 한국의 특권적 ‘국민’이기에 저들이 당하는 일과 무관하게 살아가도 된다고 안심해도 괜찮은 걸까.
책 <수용 격리 박탈>을 보다 이때 경험이 떠올랐다. 책은 제목 그대로 어떤 인간이 사회에서 살 자격이 없다고 내쳐질 때, 그의 신체를 가두고 인간답게 살 권리를 빼앗는 공권력 구조적 폭력과 이 때문에 붕괴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밝히고 있다. 이렇게 많은 수용과 격리 그로 인한 박탈이 존재한다는 것에 경악했다. ‘나’는 전혀 안전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특권적 인식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깨달았다.
이런 경우로 독자는 어떤 상황을 상상할 수 있을까? 홀로코스트 정도가 보편적으로 떠오를까? 홀로코스트의 아이러니는 현재는 상황이 완전히 전도되어 가자 지구(팔레스타인)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시계를 한반도 역사로 돌리면 수많은 ‘수용, 격리, 박탈’이 있었다. 책에서 소개하는 대규모 한센인 수용, 전쟁으로 발생한 수많은 (피)난민 수용 외에도, 장애인 수용, 정신병자 수용, ‘부랑자’ 수용, 부녀자(성매매 여성) 수용 등, 헤아릴 수 없는 수용과 격리로 인권을 침해해왔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자. 위 열거된 어떤 경우가 그들을 가두어도 되는 이유로 충족되는가. 장애인은 장애를 보완해 줄 시스템으로 보조해야 하는 것이고, 아픈 사람은 적절한 치료를 해주어야 하는 것이고, ‘부랑자’, 부녀자(성매매 여성)는 살길을 열어 주어야 하는 것이지 않나.
보호하고 돌보는 것이 국가의 책임이지만, 이를 회피하고 손쉽게 관리하기 위해 수용소를 짓고 이들을 가두었다. 누구나 장애를 가질 수 있고, 누구나 아플 수 있고, 누구나 부모를 잃고 거리에서 살 수 있고, 누구나 가난으로 몸을 던질 수 있다. ‘나’는 이런 폭력적 상황에서 예외적 존재로 안전할 수 있었을까?
책은 국내를 넘어 해외 사례도 소개한다. 이 사례들 모두는 일본이 ‘탈아입구(脫亞入口)’라는 제국주의적 광기로 저지른 결과였다. 한반도뿐 아니라 타이완 수용소, 인도네시아 수용소 등, 일제가 점령했던 모든 곳에서 대규모의 ‘수용, 격리, 박탈’의 인권침해가 있었다. 문제는 일제가 패망하고 수용소가 사라져도 식민의 잔재는 변형된 채로 남아 지속된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모든 수용소 역시 일제 식민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1950년부터 일본 나카사키현 오무라 시에서 조선인을 관리한 오무라 수용소는 지금 한국의 외국인보호소와 큰 틀에서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이곳은 ‘4.3’이나 ‘6.25’를 피해 밀입국한 밀항자, 노동 이민자, 형법 위반자 등을 가두었다. 주지하듯 ‘4.3’에선 엄청난 학살이 있었고 살아남기 위해 오사카 등으로 피난한 제주민들이 많았다. ‘6.25’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서 발생하는 난민처럼 이들은 전쟁 난민이었다.
노동 이민자의 경우 역시 주지하듯 대부분 징용으로 갔거나 조선에서 먹고살 길이 없어 도일한 사람들이다. 이 모든 이주가 일제의 침략과 수탈 때문이었는데, 전쟁이 끝나자 순식간에 ‘비국민’으로 낙인찍어 내쫓으려 한 것이다. 일제가 책임을 회피하고 오직 추방을 위해 조선인들을 가둔 오무라 수용소에서 온갖 고난과 수모를 겪은 이들은 보호소에 있는 이들과 얼마나 다른가?
보호소에 갇힌 이들 대부분은 한국이 필요해 불러들인 사람들이고 입국 시 적법한 비자를 받았다. 대부분 턱없이 부족한 3D 업종 일자리를 메우기 위해, 유학생을 받아 대학의 재원을 채우기 위해, 전쟁과 살해의 위협을 피해, 부모를 따라 들어온 아이들, 동포의 나라라고 안심하고 입국한 동포 노동자들 모두 정부가 불러들인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그에 걸맞은 ‘보호’ 조치를 취해야지 마치 흉악범이라도 되듯 잡아들여서 가두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단 말인가.
지난 10월 20일 ‘마중’이 기획한 시민모임 <“불법”이라는 장벽에 가로막힌 목소리들>에서 활동가들은 보호소의 외국인을 조력하는 ‘마중’의 역할이 보호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활동으로 비쳐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다. ‘마중’의 궁극적 주장은 보호소는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어떤 인간도 그 자체로 불법인 존재는 없기 때문이라고. ‘No One is illegal’이라는 그들의 호소는 곧 보호소 외국인의 외침이다. 장벽에 가로막혀 소리 없는 아우성이 되고 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