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 별> (정기혁 감독, 2024) 리뷰
울산 하면 현대자동차를 떠올리곤 했는데, 영화 <울산의 별>을 보고 조선소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또 조선소 하면, 배나 남성 노동자가 아니라 한진중공업 고공농성자 김진숙이 떠오르는데, 영화에서 조선소 용접공으로 분한 주인공을 발견해 놀랍고 반가웠다.
20년 차 조선소 노동자 윤화(김금순)는 정리해고를 통보받는다. 왜 나여야만 하냐는 그의 항변에 관리자는 ‘시스템’이 그렇다고 답한다. 조선소에서 일하다 죽은 남편을 대신해 채용된 윤화가 이제 해고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남편의 목숨 값을 다했기 때문인가. 윤화는 억울하다.
윤화는 직장에서 ‘형수’로 불린다. 심지어 죽은 남편을 생전에 알지도 못했던 젊은 동료들조차 그를 ‘형수’라고 부른다. 이는 당당한 여성 노동자를 ‘형수’라는 가족의 호칭 안에 가두고, 언제든 다른 적확한 ‘노동자’로 대체될 수 있다는 암시를 줄곧 주어온 셈이다. 그는 당연히 여느 남성 노동자처럼 가장이지만 생계부양자 남성 노동자 모델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간주된 것이다. 그래서 ‘형수’인 윤화는 가장이자 용접공으로 열심히 일했어도, 다른 가족이 벌면 되는 부수적 노동자로 취급되어 해고 1순위가 된 것이다.
어떻게든 해고 위기를 벗어나야 하는 윤화는 주택 담보 대출을 받아 이를 상납하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이미 1억이 대출됐다는 은행 직원의 말을 듣고 기함한다. 1억의 행방은 아들 세진(최우빈)이 코인에 투자하기 위해 들어갔고 이미 대부분 날린 상태다. 취업이 어렵고 우울증을 앓고 있는 세진에게 탈출구가 필요했으리라. 그렇다고 1억이라는 큰돈을, 윤화의 표현을 빌자면 ‘아버지 목숨 값’이라는 집을 담보 잡는 행태는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
세진이 제 맘대로 담보 대출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가부장적인 ‘시스템’이 허락한 예견된 재앙이었다. 죽은 아버지라도 그 아버지의 대를 잇는 건 아들이니 이 철없는 아들에게 집의 소유권을 넘긴 것 아닌가.
코인을 한다고 세진처럼 다 사기를 당하는 것은 아닐 테다. 단 몇 백만으로 몇 십억을 벌었네 하는 소리가 코인 판에 횡행하고, 실제 소액으로 큰 부자가 된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도박을 해서 큰 수익을 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거의 폐인 수준으로 틀어박혀 관련 책과 인터넷과 컴퓨터 차트를 보며 나름 고군분투로 실력을 쌓았기 때문이다. 세진은 왜 그럴 수 없었나. 코인 사기꾼에게 가족의 명운이 걸린 거액을 넣고 금방 황금알이 되어 돌아올 줄 알았다는 그가 딱하기만 하다.
영화를 보던 20대 딸애는 세진에 전혀 이입되지 않는다고 했다. “취업이 어려워? 그건 인정.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남자가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없어? 여자보다 기회는 더 많아.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조금씩이라고 벌어 살면 되잖아. 내 친구들 다 그렇게 살아. 한심하다.”라고 일갈했다. 우리의 연민은 오히려 드러나지 않게 우울증을 앓고 있는 고등학생 딸 경희(장민영)에게 향했다.
웃음기가 없고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말수가 적은 딸 경희는 오빠처럼 빼돌릴 돈도 없고 객기도 없다. 하지만 꿈은 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 해서 답답한 울산을 떠나 서울에 가고 싶지만 엄마에게 의논해도 핀잔만 듣는다. 경희가 닥친 상황은 1999년 거제를 배경으로 한 영화 <빅토리>의 필선(혜리)과 대조를 이룬다.
<빅토리>에서 필선은 춤 재능을 발휘하고 싶어 안달이고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이다. 타고난 낙천과 대놓고 우쭈쭈 하지는 않지만 딸을 아끼는 ‘싱글 대디’라는 기댈 언덕이 있다. 회사에서 잘리지 않기 위해 곤욕을 치르는 아빠에게 “니는 세상이 그리 무섭나”라고 대거리할 수 있는 배짱도 있다. 폼생폼사라도 의리를 아는 친구들이 다정하다. 하지만 경희에겐 이 모든 것이 부재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1999년의 필선보다 2024년의 경희에게 닥친 현실이 더 가혹하고 끔찍하게 착취적이다.
꿈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아 낙담하던 경희는 친구들과 간 노래방에서 혼자 악을 쓰듯 노래 부르고 있는 엄마를 발견한다. 친구가 엄마를 보고 ‘아재’라고 부를 때 경희는 놀랍고 슬프다. 바짝 밀어버린 머리에 화장기라고는 없는 엄마. 일별로는 당연히 남자지 여자라고 볼 수 없는 외모와 차림새로 중성화된 엄마가 문득 가엽다.
엄마라고 소박한 꿈을 꾼 소녀 시절이 없었겠으며, 아빠를 잃기 전 제법 꾸미기 좋아했던 여자가 아니었겠는가. 그런 엄마가 짊어진 가장의 무게가 무거워 여자임을 완전히 탈각하고 딸에게 살가운 말 한마디 건네줄 여유도 없이 살았을 세월을 가늠해 보게 된다. 같이 올 친구도 없이 혼자 샤우팅 하듯 노래하는 엄마에게 그날이 얼마나 힘든 하루였을지 짐작해 본다. 해서 경희는 친구와 서울로 떠나기 전 잠든 엄마에게 곱게 화장을 해 준다. 남편 잃고 자식들 키우느라 버렸던 여성성을 조금이라고 되찾아 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경희가 해 준 화장을 지우지 않고 문 앞에 앉아 있는 엄마를 보고 귀신을 보듯 놀란 세진은 첫 출근을 하고 있다. 엄마의 상실된 여성성을 생각해 보지도 않았을 아들의 뒷모습은 타인이다. 아들의 첫 출근은 엄마 윤화의 해고를 대신한 보상이자, 남편의 목숨 값을 대신해 윤화에게 임시로 이전됐던 고용이 적확한 남자 생계부양자 모델을 찾아 이전된 것이다. 아들의 취업을 받았으니 이제 윤화는 해고 투쟁은커녕 끽소리 없이 물러나야 하는 것이다. 이는 노동시장과 가부장의 부조리가 한데 얽혀 드러난 타락한 한국 노동시장의 현주소다.
억울한 윤화는 이렇게 소리 지른다. “조선소가 대한민국을 먹여살렸다고!” 이 일성을 지르며 남편을 죽게 했고 자신을 하루아침에 자른 회사의 깃발을 끌어안는 윤화는 모순된 존재이자 한국 노동시장이 소외시켜온 여성 노동자의 표상이다. 이 영화에 대한 어떤 평은 무너지는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라던데, 동의하지 않는다. 유토피아는 남성 노동자이자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가족에게만 해당되는 이상향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히 짚고 싶다. 윤화가 언급한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 노동’은 조선소 등의 대기업 중심의 중공업만이 아니다. 미싱을 타고, 부품을 조립하고, 벤젠에 노출된 채 반도체를 만들며 단 한순간도 노동시장을 떠나지 않았던 여성 노동자들의 몫이 혁혁하다. 그들이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도 고도성장을 이룬 지금의 한국도 없다. 모두 이를 잊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