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 낙검자 수용소(성병 관리소) 철거 저지 투쟁과 용주골 투쟁의 다름
동두천에 일명 ‘몽키 하우스’로 불리던 곳이 있다. 기지촌 여성들의 성병을 관리하던 곳으로 성병 검사에서 떨어지면(‘낙검’) 이곳에 끌려와 감금된 채 성병이 치료될 때까지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엔 ‘낙검자 수용소’라 불렀다.
성병을 치료하던 약이 미국에서 공급받은 페니실린이었는데 워낙 독한 약이다 보니 치료 과정이 매우 고통스럽고 자칫하면 쇼크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곳에서 죽어간 여성들은 어디로 보내졌을까. 동두천 상패동 무연고자 공동묘지에는 유명을 달리한 상당수의 기지촌 여성들이 이름도 없이 묻혀 있다. 그들도 이곳에 누워있을까.
동두천 성병 관리소는 낙검자 수용소라고도 불릴 만큼, 한 번 들어오면 마음대로 나갈 수 없는 감옥 같은 곳이었다. 당시 떠도는 많은 얘기 중에는 아내나 딸이 실종돼 찾아보니 이곳에 잡혀와 있더라는 설이 난무했다. ‘민간인을? 말도 안 돼’ 하겠지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토벌’이라고 불릴 정도로 살벌했던 경찰 단속은 기지촌 일대의 여성들을 검문하며 검진증이 없으면 무지막지하게 잡아들여 낙검자 수용소로 끌고 가 가뒀다. 왜?
미군에게 공여할 여자들의 몸을 깨끗하게 관리하라는 미국의 요구와 미군의 달러를 벌어들일 정부의 탐욕이 공조한 것이다. 일명 ‘동맹 속의 섹스’. 낙검자 수용소의 폭력은 국가와 미국이 사실상 포주 행세를 한 국가폭력이자 트랜스내셔널 폭력이다. 성병 검진소라는 말은 국가의 폭력을 설명하기에 지나치게 순화된 말이다. 낙검자 수용소 혹은 기기촌 여성 대상 수용소라 부르는 게 더 적확하다.
이러한 국가폭력은 2022년 대법원 최종 판결로 국가 책임이 일부 인정되었다. 기지촌 여성들이 입은 국가 폭력의 피해를 인정했다면, 그들의 피해를 증명하는 곳을 왜 없애지 못해 안달인 것인가. 낙검자 수용소가 위치하고 있는 동두천 시는 이곳을 밀어버리고 공원을 조성하겠다고 나섰단다. 이 사건은 벌써 여성단체에 회람되며 비판받았지만 동두천시도 경기도도 정부도 모르쇠다.
국가폭력의 현장을 그것도 지자체가 소유하고 있다면 제대로 복원해 그 역사를 알리고 가르쳐 훌륭한 인권교육과 성교육의 장이 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텐데 알 수 없는 일이다. 자랑스러운 것만 역사인가? 그렇다면 왜 일본군 ‘위안부’가 당한 폭력에는 그토록 사과하라고 일본에 요구하고 있는 것인가.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는 다르다? 그렇지 않다. 공적 권력이 여성을 성적 제물로 삼아 착취한 젠더 폭력이라는 본질에서는 같다.
낙검자 수용소를 없애면 안 된다는 동두천 시민들과 시민단체들이 모여 ‘동두천 옛 성병 관리소 철거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 위원회’(이하 공대위)를 꾸렸다고 한다. 이들은 낙검자 수용소가 있는 소요산 입구 쪽에 농성장을 차리고 약 50일에 이르는 날들을 노숙하고 있다. 이제 날이 차가워져 고충이 더 클 것이다.
동두천시의 철거를 막기 위해 국회 국민 동의 5만 명을 달성했고, 경기도 청원은 1만 명을 달성했다.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물론이고 정치가들도 책임 있는 답변을 주어야 하는 데 어째서 응답하지 않는 것인가. 공대위의 제안은 이곳을 평화공원으로 조성하여 시민의 공간으로 남기자는 것인데, 좋은 제안을 숙고하지 않고 시나 경기도 그리고 정부는 왜 이곳을 부수려고만 하는 걸까.
1996년 동두천 기지촌 여성 윤금이가 26세의 나이에 미군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되었을 때는 시민이고 국민이고 모두 나서 ‘순결한 민족의 딸’이라고 한탄하더니, 그 역사는 아득한 옛이야기가 되었나? 그때 들끓던 ‘민족의 딸’이라는 언설은 성매매 여성들이 죽어야만 살아나는 사람이라는 기막힌 역설을 보여주었다. 살아있는 기지촌(성매매) 여성들은 죄인이고 죽어야만 ‘민족의 딸’이 되는가.
낙검자 수용소를 없애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공대위가 저녁마다 문화제를 한다기에 지인 A가 다녀왔다.(나는 하필 코로나에 걸려 못 갔다) 당일은 영화를 상영했는데, 동두천시에서 전기를 끊어 발전기를 돌려 사용하느라 전기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다고 한다. A와 나는 지난해 파주시의 용주골 닥치고 폐쇄 발표가 있던 때부터 용주골에 연대하고 있다.
성매매에 반대한다고, 이곳에 사는 여자들을 대책 없이 내쫓는 것엔 도저히 찬성할 수 없고, 이곳의 여자들을 정책의 협상 대상으로도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는 것(파주시는 성매매 종사자들의 면담 요청을 묵살했다)을 용납할 수 없으며, 유인이나 감금 등 인신매매의 피해자가 아니면 피해자가 아니니 지원금을 줄 수 없다는 파주시 성매매피해자지원조례의 부정의함에도 동의할 수 없어서다. 동두천 낙검자 수용소 얘기하다 왜 갑자기 용주골로 빠지냐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A와 나는 동두천 시민 연대가 주최한 동두천 기지촌의 유산을 탐방하는 프로그램에도 참가한 적이 있다. 동두천 시민 연대가 낙검자 수용소를 평화공원으로 조성하겠다는 비전을 발표하는 모임에도 간 적이 있다.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파주 역시 동두천 못지않은 대규모의 기지촌이 있던 곳이었고 그 상흔은 크디컸다. 그중 시민에게 ‘수치스럽게’ 남아있는 유산이 용주골이다. 여기서 ‘수치스럽다’는 감정은 대체 무엇을 수치스러워한다는 것일까.
미군에게 몸을 판 이른바 ‘양공주’들이 그 대상이라면 이는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다. ‘양색시’에 기생해 돈을 벌어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킨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여자들의 삶을 비하하는 것은 결국 자기부정이 아닌가? 나는 ‘양색시’의 빨래를 했을지언정, 나는 ‘양색시’가 빼낸 미군 물품을 팔아 많은 먹고살았을지언정, 몸을 팔지는 않았다는 자부심은 그토록 떳떳해도 되는 것일까?
국가가 가난한 여성들을 유인해 미군에게 제공할 생각이 없었다면, 윤락행위방지법이라는 성매매 금지법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에 용주골이 동두천 뺏벌이 특구로 지정되어 성매매를 조장하도록 묵인되고 관리될 수 있었을까? 국가와 미국이 한국의 가난한 여성들을 착취할 동안, 그들을 ‘양갈보’라고 손가락질만 했지 그들이 국가 기획의 성매매 피해자라는 생각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일까. 가난한 여자들이 몰려들수록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어 좋아라 하던 사람들 중에 자신은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용주골이나 뺏벌의 이런 역사를 시민 전반이 보듬고 성찰할 능력은 왜 가질 수 없는 걸까.
파주에는 기지촌 여성들을 돌봐주고 성매매 여성을 지원한다는 단체 쉬고가 있다. 이들의 본분은 성매매 여성들을 지원하는 것이지만 현장 활동을 제대로 한 적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파주시장이 용주골을 폐쇄하겠다고 일성을 토하니 그의 곁에서 깃발을 높이 쳐들었다. 성매매 여성들을 지원한다면서 단 한 번도 이들을 만나보지도 않은 채 시장의 폐쇄 정책에 쌍수를 들고 나선 것이다. 이럴 수 있는 일인가. 이런 쉬고가 동두천 공대위 연대단체에 떡하니 이름이 올라있었다. 씁쓸했다. 성매매 여성들이 죽어간 현장은 보존해야 하고 지금 성매매 여성들이 살고 일하고 있는 곳은 부수고 없애야 한다는 것인가. 이 무슨 극도의 위선이란 말인가.
공대위 문화제에 참석했던 A가 이런 사정을 주위에 있던 분들과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러자 공대위 관계자가 연대를 깨칠 수 있는 그런 발언은 삼가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속칭 ‘입틀막’을 당한 셈인데, 성매매 여성의 인권을 외치는 사람들이 이래도 되나?
부언하지만 나와 A는 낙검자 수용소를 허물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성매매 여성에 대한 연대가 산 사람이 아니라 죽은 자만을 위한 것이 되어서도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시민단체의 연대나 여성 간의 연대가 죽어서 말이 없는 자만을 위한 것이 된다면 누구의 무엇을 위한 투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