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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Oct 01. 2024

삼가 Y의 명복을 빌며...

트랜스젠더 여성 Y의 영면 소식을 들었다.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용주골 연대 시민이라는 공동 감각을 공유했을 뿐 얼굴을 익힌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전혀 친숙한 사이가 아니었는데도, 견디다 못해 떠난 사람의 죽음은 충격과 아픔을 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성별 정체성에 갈등을 겪다 마침내 성별정정을 하고 여성으로서의 신분을 획득했다. 성별정정이라고 쓰면 말은 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성별정정을 위한 의료적 처치는 매우 위험하고 고비용이고, 국내에선 가능한 곳도 없다고 들었다. 원하는 성별로 살고 싶어 어려운 성별정정 수술을 감행하다 사망한 사건이 적지 않았으며, 영화 <대니쉬 걸>이 이런 비극을 잘 다뤘다.      



이런 불행을 피하려면 반드시 수술을 하지 않고도 원하는 성별로 살 수 있는 법적 기반과 사회적 지지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잔혹하다. Y가 남긴 글을 보면, 그가 성별정정을 하고 여성임을 인정받은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고도, 다시 말해 국가로부터 ‘당신은 여자야’라고 지정받았어도, 여성으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다. 고 변희수 하사가 성별정정을 하고 변함없는 군인 정신과 애국심으로 국가를 위해 충성하겠다고 했지만, 사회는 그에게 여군으로 살아갈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결국 그를 외롭게 떠나게 만들지 않았는가.  

    

트랜스젠더인 것이 주홍글씨라도 되는 양, 사람들은 Y를 함부로 조롱하고 경멸하고 혐오했다. 그가 산 많은 날은 폭력과 차별과 혐오를 직면하는 날들이었다. 한국 사회는 왜 이럴까. 자신이 원하는 성별로 살아가겠다는데 왜 이토록 가혹한 징치를 하는 걸까. 자신들에게 무슨 권한이 있어 타인의 성별 정체성에 간섭한단 말인가.       


성소수자를 지칭하는 LGBT의 T는 Transgender를 의미한다. 그런데 LGBT에서 T를 빼자는 움직임이 해외에서 있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소수자라고 해서 항상 소수자 편이 아니듯이, 게이, 레즈라고 해서 다 트랜스젠더를 옹호하는 게 아니다. 동성을 사랑하는 것은 선천적인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자신의 성별을 바꾸려고 하는 건 정신병이고 자기학대라고 생각하는 게이 레즈가 많다. 그래서 해외에서는 LGB의 권익만을 위하는 단체도 있다.” Y의 브런치 글 <drop the ‘T’>를 옮긴 것인데, 어이가 없다.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에도 금을 긋고, 너는 들어오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닌가.   

   


알다시피 애플의 CEO 팀 쿡은 게이다. 이는 상징적 위상이다. 게이여도 세계 최고 기업의 경영자가 게이라는 것은 그가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매우 특별한 정체성이 된다. 그야말로 멋진 ‘퀴어’인 것이다. 하지만 노숙자가 게이라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게으르고, 의지박약이고, 정상이 아니니, 그 꼴로 산다고 단박에 손가락질을 당할 것이다. 세상이 이렇다. 성소수자라고 해서 다 같은 성소수자가 아니다. 내부의 차이는 크고 깊다.     

 

Y는 그저 사람답게 차별받지 않고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힘겨운 성별정정을 감행하고 여자로 살아가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자 대접?을 받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았다. 트랜스 여성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가 속한 곳의 공기가 싸늘하게 변하는 것을 한두 번 당한 게 아니고, 은밀하게 혹은 대놓고 쏟아지는 경멸과 혐오를 겪었다.


아무리 당당하게 살아가려 해도 주위의 시선이 냉담과 혐오로 가득하다면, 어떻게 자신을 붙들고 살아가겠는가. 사람들이 꺼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자신을 긍정하고 사랑할 수 없다면, 삶은 이미 반쯤 파국의 구덩이에 발이 빠져 있는 셈이다.  

    

미디어 등의 콘텐츠에 재현되는 트랜스젠더를 보면 사회가 이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트랜스 여성으로 분한 배우 박정민의 연기가 이를 보여준다. 그의 연기가 좋다는 평이 많았는데 어이없었다.      



과장된 말투와 행동, 과한 메이크 업이 마치 트랜스 여성의 전형이라도 되는 듯, 괴상한 외모를 하고 오버스런 연기를 한 그에게 돌아간 상찬은 한국 사회가 가진 트랜스 여성에 대한 이해가 딱 그만큼인 것을 증명했다. 영화는 트랜스 여성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편견을 전시했고 조롱했다. 나는 마치 내가 모욕을 당한 듯 불쾌했는데, 당사자 트랜스 여성은 어땠을까. 저런 우스꽝스러운 재현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상상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떳떳할 수 있을까.     


우리는 트랜스젠더를 잘 모른다. 무지를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다. 모른다는 것이 폭력의 이유가 돼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모른다고 그 상대를 적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또한 누구든 타인의 성별 정체성에 관여할 권리가 없다. 그들이 자신의 성별로 살아가는데, 누구의 무슨 권리를 침해하는가.    

  

Y는 용주골 성매매 집결지를 폭력적으로 폐쇄하려는 파주시 공권력에 저항하는 용주골 투쟁에 연대해 왔다. 여성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는 여성으로서 그는 용주골 성매매 여성들과 동질감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창녀와 같이 주류의 범주에서 탈락한 여성들과의 연대를 꿈꾼다. 창녀 해방 없이는 여성 해방 없고, 모두가 해방될 때까지는 아무도 해방될 수 없다.”(Y의 브런치 글 <탈락한 여성들의 연대> 중) 여성 간 연대는 페미니즘의 중요한 문제라고 하지만 고준담론일뿐, 실천은 미미하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와 연대할 수 없는 페미니즘은 무능하고 타락했다.      


Y 생전에 기운 낼 한 마디를 전하지 못한 게 미안하고 안타깝다. 여자의 자격 따위를 심문하지 않는 그곳에서 부디 편안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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