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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쪼대로 아플 자유'

SBS 드라마 <우리 영화> 리뷰

by 그냥


‘시한부’ 여주인공 서사를 다룬 콘텐츠가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요즘 드라마에서는 보기 힘든데, SBS 드라마 <우리 영화>의 여주인공 다음(전여빈)이 그랬다. 게다 ‘시한부’ 캐릭터가 재현하던 울부짖음, 우울, 슬픔, 고통이 소거된 자리에, 환자가 저렇게 안 아플 수도 있나 싶을 정도로 명랑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 채워진다. 그녀의 표현대로 ‘평범한 시한부’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런데, 보통의 일상이라는 것이 저리도 긍정과 쾌활로 넘치던 것이었나.


SNS에 넘치게 떠도는 이미지화된 행복한 일상이 허상이듯, 다음의 실상도 연기를 걷어 내면 아프고 절망적이다. 같은 병원에서 치료받던 ‘시한부’ 동료였던 지인의 장례식장을 나오며 자신의 예정된 죽음과 장례식을 고민하게 되는 환자다. 하지만 소중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는 다음의 타고난 낙천적 성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찌 보면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버림받고 싶지 않은 바람 때문일지도 모른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옛말을 떠올려보면, 얼토당토않은 가정은 아닐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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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다고 하고 싶은 것이 없을 리 없다. 아픈 몸이라는 신체적 한계가 명확해도, 아프기 전에 누리던 소소한 일상을 복구하고 싶을 수 있고, 아프지 않은 사람들이 매일 별거 아닌 것처럼 행하는 바를 누리고 싶을 수 있다. 급성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 경험을 기록한 김도미의 <사랑과 통제와 맥주 한 잔의 자유>도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


큰 병을 앓고 있다고 해서 일거에 환자 모드로 전환돼 비환자로 지내던 일상이 쓰레받기에 싹 쓸어 담겨 버려지는 것은 아닐 테다. 살던 대로 사랑(연애, 섹스)도 하고 싶고, 긴 투병이 지겨운 늦은 오후면 일상의 환기로 시원한 맥주도 들이키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환자가 게다 ‘시한부’가 이런 결행을 한다면 단박에 곱지 않은 눈길을 받게 된다.


‘저러니 아프지’, ‘저래서 나아지겠어’부터, ‘본래 생활 습관이 좋지 않아 저런 병에 걸린 거지’라는 둥 악담이 이어지고, 아프지 않은 사람이나 누리는 자유를 얌전히 반납하고 환자답게 찌그러져 있으라는 사회적 압력이 강하게 지쳐 든다. 아프다고 갑자기 다른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닌데, 건강할 때의 습관을 모두 버리고 어서 아픈 몸을 회복해 건강한 몸으로 돌아가라는 압박이 거세다. 아픈 이는 병의 무게도 보통 무거운 게 아닌데, ‘환자다움’을 요구하는 가족적 사회적 압박 때문에 더 고달프다. <사랑과 맥주 한 잔의 자유>에서 저자 김도미가 “지 쪼대로 아플 자유”를 성토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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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환자답게 매일 조심만 해야 하는 ‘시한부’ 삶이 다음은 권태롭다. 조금만 방심해도 위태로워지는 몸이긴 하지만, “안전하게만 살고 싶지” 않다. 하고 싶은 걸 하고 싶다. 이런 다음에게 매일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들만큼 어리석은 게 없다. 그녀에게 보통 사람들이 흘려보내는 매일은 쏟아 버리는 물 낭비처럼 어리석은 짓이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살고 싶은 ‘시한부’ 환자의 관점일 뿐이다.


‘시한부’지만 살고 싶은 이가 있는가 하면, ‘시한부’이기에 살고 싶지 않은 이도 있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스스로 ‘시한’을 정하고 죽음을 예비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점에서 다음은 ‘환자다움’을 탈각한 신선한 ‘시한부’라는 관점을 던지는 동시에, 아프지만 포기를 모른 채 명랑하게 주변을 돌보고 끝까지 꿈을 실현하려 노력하는 자기계발형 ‘시한부’라는 숨 가쁜 인상을 남긴다.


이는 어쩌면 병실에서 투병으로 고군분투하느라 진이 빠졌거나, ‘환자다움’을 재현하느라 연기를 해야 할 정도로 압박이 심한 아픈 몸들의 욕구를 대리하며 만족과 위로를 주겠지만 반면, 당신도 저렇게 죽는 날까지 열심히 살라는 엄중한 명령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이러한 이분적 ‘시한부’ 상은 “지 쪼래도 아플 자유”를 상상하기 힘들게 한다.


다음의 낙천은 늘 주변 사람을 위로한다. 아파도 아픈 티를 내지 않고 견디며 오히려 자신 때문에 고통을 받을 사람들을 걱정한다. 다음의 성숙한 인고는 환자도 가족과 주변인 모두를 돌보고 있다는 웅숭깊은 투병을 보여주지만, 가능한 견딤일지 짠하다. 그리고 다음의 ‘시한부’가 발각된 이후 주변인이 그녀를 바라보는 시각은 많은 고민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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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불꽃을 태워 배우로 살고자 하는 ‘시한부’ 다음의 도전이 주변인 모두와 많은 대중을 감화시켰다는 것은 결국 그녀가 극한의 고통을 겪어내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그것이 아프지 않은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시한부’ 환자보다 명백히 건강한 몸을 가지고 이렇게 지질하게 낭비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반성의 대상으로 ‘시한부’ 다음이 자리 잡고 만다.


타인의 고통을 디딤돌 삼아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자신의 성장을 견인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미담화하는 것이 ‘시한부’든, 아픈 몸이든, 장애를 가진 이든, 소외된 이들을 대하는 적절한 태도일까. 이런 고민을 안고 드라마의 막바지에 이르자면, 드라마는 다음의 죽음을 직면하지 못한 채 애도를 상실한 모습을 보인다.


다음의 사후 1년이 지난 시점에 드라마가 보여주는 풍경은 그녀가 드라마의 영화 속에 남긴 유언처럼 그녀의 몫까지 ‘충실하게’ 살며 그녀의 죽음을 통해 성장한 주변인들의 미담으로 훈훈하다. 그녀를 그리워하거나, 그립다 못해 슬퍼지거나, 슬픔에 지쳐 눈이 퉁퉁 붓도록 통곡하는 상실감은 마치 구시대의 구질구질한 애도로 치부된 느낌이다. 그녀의 짧은 생이 남긴 삶과 영화에 대한 애정이 산사람들의 살아갈 의지를 불태울 불쏘시개로 작동하며 그녀의 소멸이 마치 이런 쓰임새기라도 한 듯 그녀의 죽음은 모두의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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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다음의 ‘시한부’라는 극단적 운명과 비가시화된 투병과 영화를 향한 사투는 주변인 모두 와 특히 남자 주인공 제하(남궁민)를 구원하기 위한 장치였던가. 그녀는 타인을 각성시킬 좋은 죽음이라는 목표를 향해 그리도 숨 가쁘게 달려갔던 것인가. 그런데 왜 한 사람의 죽음이 타인을 위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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