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의 가부장제> (실비아 페데리치, 2025, 에코리브르) 서평
가사노동에 지친 어느 하루 남편에게 좀 투덜댔다. “왜 내 노동은 무임인 거야. 나도 월급 받고 싶다.” 눈이 동그래진 남편 왈, “내가 주잖아.” 이 남자와 무슨 말을 이어갈까.
해도 해도 별 티도 안 나는데 무한 반복인 가사노동. 어느 정도로 청결하게 집을 유지하느냐에 따라 노동의 강도는 달라지겠지만, 어쨌거나 시간을 들여야 하고 몸은 고되다. 어디 육체노동뿐인가. 기본적으로 누군가를 돌보는 일엔 마음이 동원되기 마련이고, 잘하려면 여간 스트레스가 큰 게 아니다. 하지만 사회는 이런 돌봄 노동을 여자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천직쯤으로 여기고 쉽게 헐값을 매기거나 떼먹는다.
이러한 가사노동의 무임금성에 대해 아주 오랜 시간 천착한 페미니스트 실비아 페데리치는 70년대부터 여성들의 무임 가사노동을 통렬히 비판해왔는데, 그간의 주장이 <임금의 가부장에>에 묶여 나왔다. ‘사회는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 그리고 여성들은 정신 차리고 각자의 가정에서 싸우라’는 일관된 메시지다. 주부들의 전선은 바로 부엌이라는 것이다.
여성 누구나 동조할듯한 그녀의 주장은 페미니즘 진영 내에서도 갈등을 일으켰다. 그녀가 첫 일성을 낸 70년대에서 어언 반세기가 지났지만 가사노동의 임금화는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했다. ‘집안일에 임금을 달라니 뭔 해괴한 주장인가’ 할 정도로 가사노동의 무임금성은 자연화되어있다. 하지만 이는 산업혁명을 거치며 자본가와 남성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기획된 고작 200년 된 제도다.
‘가족 임금’은 여성 노동자를 쫓아내기 위해 고안되었다
‘가정주부’가 고안되기 전 이는 세상에 없는 낯선 타이틀이었다. 산업사회가 되기 전 대부분의 노동은 농경이나 가내수공업을 중심으로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누구나의 일이었다. 차츰 산업이 부흥하면서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공장이 밀집한 도시로 몰려들었고 여남 노소 할 것 없이 임금노동자가 되었다. 모두 나가 돈을 벌지 않으면 먹고 살 길이 없는 장시간 고된 노동의 참상이 이어지던 상황을 상상해 보라. 무슨 가정과 전업주부라는 시스템이 가능했겠는가.
1800년대에 들어서며 영국은 공장법을 만들어 아동의 공장 노동 금지를 시작으로 여성의 노동을 규제했다. 이는 일면 아동과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는 조치였지만 숨겨진 의도가 있다. ‘아동은 집으로 돌려보내고 여성은 아이를 돌보라, 대신 남성의 임금을 40% 올려주겠다’는 공장법은 과연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는가. 부모가 없거나 돌봄이 취약한 아이와 결혼하지 않거나 혼자가 된 여성의 먹고살길은 누가 보장해 주는가. 자본주의는 이에 어떤 대안도 제시하지 않은 채 아동과 여성을 소위 가정이라는 게토로 몰아냈다.
자본가가 노동자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고 싶어 하는 욕구는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 노동자가 최적의 몸 상태로 공장에 와야 뼈 빠지게 부려먹을 수 있기에, 자본주의는 가정의 여성에게 무임금 가사노동으로 가장의 몸을 노동에 최적화된 상태로 회복시켜 공장에 보내라는 엄명을 내렸다. 남성 노동자에게 ‘가족 임금’이 부여된 반대급부로 여성은 공장에서 퇴출되어 가정으로 쫓겨났고, 원하지도 않는 ‘가정주부’로 주조되어 남성 노동자에 기생하게 되었다.
공장법이 여성의 노동을 완전히 금지하면서 생산적 노동을 위해 가정주부와 성매매 여성을 엄격히 분리하는 제도가 정착됐다. ‘가정주부’는 남성의 ‘가족 임금’으로 충분히 먹고산다는 터무니없는 전제하에 성매매는 오직 궁색하고 타락한 여성만의 호구지책이라 선전되어, 정상적 여성은 모성과 사랑으로 가정에 헌신한다는 이데올로기가 제조됐다.
출산을 위한 성과 쾌락을 위한 성을 분업화시켜 ‘쾌감 없는 모성 대 모성 없는 쾌감’이라는 기괴한 이데올로기로 여성을 이분화했다. 결국 ‘가정주부’는 가정에, 타락한 여성은 성매매에 고박시킨 셈이다. 가족 임금의 수혜를 받는 ‘가정주부’는 남편에게 따뜻한 음식과 안락한 잠자리를 제공하는 의무와 함께 재생산을 위한 침대 위 노동까지 무임으로 강요당했다. 아내가 없거나 아내에게 성적 만족을 얻지 못하는 남성에게 성매매가 제공되었고, 이때부터 국가가 성매매 여성을 관리(병원 진료 의무화)하는 체계가 구축됐다.
점차 국가가 통제하는 성매매 업소의 성업은 ‘성교의 테일러화’로 치달았고, 성매매의 생산성이 증대되자 저렴하면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자본주의화한 성매매가 성행했다. 성은 가정이든 성매매 장소이든 오직 노동하는 남자를 위무하기 위한 수단이 됐다. 주부는 무임으로 성매매 여성은 적은 돈을 받으며 연명하게 해 영원히 프로레타리아 계급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성을 제공하고 돈을 받지 않는 가정주부는 ‘좋은’ 여성이라 주조되고, 성을 대가로 돈을 받는 여성은 ‘나쁜’ 여성이라는 ‘성녀 대 창녀’의 이분화된 여성 혐오가 공고화됐다. 결국 ‘가정주부’와 성매매는 모두 남성 노동의 생산성을 증대하기 위해 자본주의가 기획한 규범이었다.
공고했던 규범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건 20세기 초에 이르러 이혼률이 증가하면서다. 자본주의와 국가는 이혼률을 낮추는 성적 통제를 위해 정신분석을 끌어들였다. 프로이트는 여성의 가사노동, 출산, 성노동 거부에 대응해 ‘아내 애인 모델’을 고안했다. 아내에게 부엌에선 주부지만 침대에선 요부가 되라고 훈육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가정과 재통합해 규율하려 한 셈이다.
마르크스도 한국 정치도 '임금의 가부장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이 의도적으로 소거된 가정이라는 스윗홈과 ‘가정주부’라는 모성과 헌신의 아이콘은 지금에 이르러서 어떻게 규율되고 있을까. 물론 한국 사회는 앞서 설명한 맥락과 다르게 변주되었다. 19세기 조선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나 자본주의의 입김은 아직 닿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의 여자들은 성리학이 목줄을 조이며 옥죄었다. 오직 가부장을 위해 복무할 것이며 성적 일탈?은 죽음으로 대속할 것을 강요당했다. 여성은 고유한 삶을 박탈 당했다.
19세기 조선에 서양처럼 국가와 자본주의가 결탁한 산업화된 성매매는 없었다. 하지만 주지하듯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일제의 공창이 들어왔고, 조선의 가난한 여자들은 급속하게 성매매에 유입되었다. 일제의 공창은 ‘일본군 위안부’라는 참혹한 피해를 만들어냈고 이어 ‘한국군 위안부’ ‘미군 위안부’로 이어졌다.
일제 패망 후 공창이 사라졌지만 사창으로 둔갑한 성 산업은 지금에 이르러 몇십조에 이르는 지하경제를 떠받치는 어마어마한 규모로 성장했다. 여성의 성매매는 언제나 경제의 문제였지만, 사람들은 성매매가 유래한 역사적 기원이나 남성중심성이 핵심인 구조를 비판하기 앞서 성매매 여성을 혐오한다. 온당한가?
내가 사는 파주 지역엔 오래된 성매매 집결지 용주골이 있다. 2023년 취임한 김경일 시장의 ‘닥치고 폐쇄’ 정책으로 이곳은 거의 초토화되었다. 이곳 성매매 산업의 가장 큰 먹이사슬인 건물주의 건물을 시가보다 약 두 배인 비싼 값으로 사들이면서, 이곳에서 먹고 자고 일하던 성매매 여성들은 맨몸으로 내쫓았다. 올해 40여억 원에 달한 건물 매입비를 내년엔 80억으로 증액해 남은 건물을 싹 다 매입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실상 꼴 보기 싫으니 어서 꺼지라는 추방령인 셈이다.
용주골을 없애면 파주에서 성매매가 사라지는가. 먹고 살길을 찾아 나선 일부 성매매 여성은 다른 곳에서 더욱 위태롭게 성매매로 삶을 이어갈 뿐이다. 영원한 프로레타리아의 질곡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에 대해 어떤 대답도 대안도 제시하지 못했다. 민주주의 한국의 성평등 도시 파주 또한 어떤 고민 없이 성매매 여성의 성을 타락한 성으로 함부로 규정하고 짓밟았다.
어떤 이데올로기도 어떤 정치도 성매매 여성을 구제하지 못했으면서 왜 이들을 차별하고 혐오하는가. 여성들 또한 마찬가지다. 성매매에 연루된 남성에 대한 혐오를 성매매 여성에게 함부로 이전시키며 마음껏 욕하고 저주해도 되는가. 서양이나 한국이나 성매매의 시초엔 가난한 여성을 소외하고 멸시하고 배제하고 차별한 남성 중심성과 극악한 자본주의가 결탁한 것이건만, 왜 이것들에 분노하기 앞서 성매매 여성을 증오하는가. 증오는 부끄러움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