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스즈키 유이, 리프, 2025) 서평
글을 쓰거나 대화할 때 누군가가 한 말을 인용하려는데, 그 화자가 떠오르지 않아 난감한 경우가 있다. 대화는 생각나지 않는다고 넘어갈 수 있지만, 글의 경우 인용한 말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기에 영 개운치 않다.
혹은 인용구의 화자를 아무개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긴가민가할 때도 여간 찜찜한 게 아니다. 어제 끝낸 소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도 바로 이런 상황에서 비롯한 에피소드를 다소 집착적이나 매우 지적으로 탐구해가는 이야기다. 흥미진진하다. 참고로 ‘괴테’의 상징성에 짓눌려 읽기를 꺼리는 독자가 있을까 알려준다. ‘괴테’를 몰라도 전혀 상관없다. 개의치 않는 일독을 권한다.
이 소설은 딸애가 서점에서 집어 든 책이었다. 2001년생(딸애보다 한 살 많다) 일본 남성 스즈키 유이가 쓴 소설인데 꽤 유명하다며(알고 보니 이 책으로 제172회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다) 고르더니 한 시간쯤 읽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까닭을 물으니, 이 사람은 나보다 한 살밖에 안 많은데 어떻게 이런 걸(소설의 지적 배경) 다 알 수 있냐며 자신의 무식이 한탄스럽다는 거였다. 비죽 웃음이 비어져 나왔는데, 문득 <싱어게인 시즌 4>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고등학교 3학년생인 18세 참가자가 노래를 해도 너무 잘하는 것이었다. 이걸 본 심사위원인 가수 임재범이 ‘나는 저 나이 때 뭐 했나 싶다’며 경탄 섞인 한숨을 살짝 내쉬는 장면이 있었다. 뭐 어쩌겠나. 천재의 재능 앞에서 작아질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인 것을. 누구나 인정하는 거장 가수도 저런 동경을 가지는구나 싶어 인간적으로 느껴지면서도 좀 짠한 마음이었다. 이후 은퇴 소식을 들었는데 이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좀 샜는데, 어쨌거나 소설의 주인공 도이치는 평생을 괴테 연구에 매진한 사람이었지만 어느 날 우연히 찾아든 문구가 괴테가 한 말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느라 오랜 시간 헤맨다. 그래도 명색이 괴테 연구자인데 확인 안 된 채 인용하자니 양심이든 체면이든 용납이 안 된다. 그런데 이 문구가 맥락상 높은 확률로 괴테가 썼음 직도 하기에 괴테의 말이 아니라고 단정하기도 애매한 것이다.
그 말인즉슨,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를 만든다) 그래서 도이치는 이 말이 괴테가 한 말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 나름 고군분투하게 된다. 그런데 결국 어떤 상황에서 저 말을 인용하면 자신의 논지를 완벽하게 전달할 수 있다고 느껴지자, 결국 미확인된 채 괴테의 말이라고 인용하기에 이른다. 왜냐하면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음으로.
소설은 이런 묘한 상황-“인문학에서 오리지널이란 무엇인가”-을 독자에게 질문하기 위해 또 다른 에피소드를 제공한다. 주인공 도이치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 연구자인 시카리는 그간 꽤 진지한 작품을 써왔는데, 그 대부분이 날조였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당사자 시카리는 이를 부인하지 않은 채 오히려 인용의 학문적 허위라는 문제를 학계에 제기한다.
이는 위 명언이 괴테가 한 말임을 확인하게 되는 과정과 겹치면서 묘한 성찰을 준다. 그러니까 괴테는 저렇게 단촐하게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라고 한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사랑이 작용하는 바를 다소 장황하게 말했을 것이다. 이를 누군가가 적당히 줄여 전했고, 이를 읽은 또 다른 누군가가 자신이 느낀 바를 전달했고, 이렇게 인용 재인용 재재인용 되면서 괴테의 오리지널은 누락 생략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인용하는 상당히 많은 명언, 잠언. 어록 등도 어찌 보면 이 말들이 태어난 배경 인과 맥락 등은 누락된 채 누군가의 심금을 울렸을 그 상태로 인용 재인용 재재인용되지 않았겠는가.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애초 발화자의 오리지널리티의 변용을 허용할 수밖에 없음을 드러낸다. 그런데 우리는 ‘누군가의 말씀이 있었다’라고 할 때 이를 마치 오리지널 발화자의 진의라고 믿지 않는가. 인쇄된 모든 것은 어차피 이차 자료인데도 말이다.
게다 요즘의 인터넷 환경은 더 많은 고민을 남긴다. 누군가의 말이 극단적으로 급속도로 전파되면서 트윗 리트윗 리리트윗의 횟수가 그 말의 진실과 등가로 매겨지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진리나 진실이 이렇게 간단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진리나 진실은 단일하거나 자명한 이미지나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카리의 변명이자 해명을 오히려 새겨듣게 된다. “... 실패와 오류야말로 다양성의 근간이지요. 신화와 언어의 다양성이 곧 실패와 오류입니다...” 즉 괴테는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말했을 뿐이다.
소설을 읽다 오래된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뭔가를 도모하던 작은 모임이었는데 소통하는 단톡방이 있었다. 당시 논의되던 문제로 다들 고민만 깊고 어떤 행위로는 이어지지 못하는 답보 상태였다. 나는 미적대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일단 이렇게 해보자’라고 제안했다. 그때 단톡방의 한 멤버가 내가 한 말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에 감명받았다며 내 제안을 수용했다.
그때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 언젠가부터 이 말이 명언처럼 회자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어, 이 말은 내가 먼저 했는데.’ 그때 나는 누가 한 말을 인용한 게 아니라 답답하던 차에 질렀던 말인데, 이게 이렇게 명언처럼 쓰이는 상황을 경험하니 묘한 기분이었다. 이 말의 원 발화자가 나라고 주장한들 누가 믿겠는가. 또한 나는 그때 내가 한 이 말이 절대 인용이었을 리가 없다고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그러니 저자의 말처럼 “모든 것은 공유다”에 겸손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끝으로 소설을 다 읽고 난 나의 열패감은 내 딸을 능가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임재범처럼 말해본다. ‘나는 저 나이 때 뭘 했나’ 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