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이란 사태 때문에 심난하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탄압과 학살이 남의 일 같지 않다. 우리 역사에도 얼마나 많은 폭압과 무고한 살상이 있었던가. 이제 딱히 과거형으로만 안심할 수도 없다. 불과 1년 전 전 국민을 불안과 공포에 떨게 한 계엄 사태가 있었으니 말이다.
이란 여성들이 호메이니 초상화를 불태우며 그 불길에 담배를 피워 무는 장면들이 여기저기 도배되고 있다. 참 대단한 여자들이다 울컥하다가도, ‘그래도 얼굴은 가리지’하는 안타까움이 생긴다.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잡아들이고 고문하고 처형할 텐데, 저렇게 얼굴을 드러냈는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위 싸우는 여자들처럼 이란 여성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무도한 정권과의 투쟁에 임하는지는 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이 영화를 찍고 감독과 주연 배우는 망명길에 올랐다고 한다. 영화를 찍는데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초조한 삶을 이어가야 할까.
급박하고 초조한 삶이 반세기 전 우리 사회의 일상이었다는 것을 드라마 <메이드 인 코리아>를 보며 새삼 자각했다. 식민과 분단이 발아한 긴장되고 굴욕적이고 숨죽인 삶이 거기에 있었다. 폭압적 군사정권의 앞잡이인 중앙정보부의 막가파식 체포 구금 고문으로 쉽게 일그러지고 망가지고 침탈당하는 약하디 약한 유리 같은 인간이 거기서 신음하고 울고 있었다.
중앙정보부만 그랬겠나. 드라마에는 정의로워 보이는 검사가 등장하지만, 검사의 불의한 역사에 ‘공안 검사’를 어떻게 지울 수 있겠나. 사건과 증거 증인을 조작해 시국사범을 만들거나, 중정이 실적을 세우기 위해 잡아들인 무고한 ‘빨갱이’들의 무죄를 알면서도 중형을 구형해 수 십 년을 감옥에 가두지 않았나.
요즘 재심 사건으로 재조명되는 많은 사건이 바로 이런 비루한 검사들이 저지른 죄의 결과지만, 이들은 ‘각하가 죽을 줄 알았겠나’라고 자조하고 있을 것이다. 그 옛날 독립운동가를 밀고한 밀정들이 ‘일본이 망할 줄 알았겠나’라며 허탈해했던 것처럼 말이다.
드라마는 중정과 검찰의 권력투쟁을 긴장감 있게 펼치지만, 이것이 종당엔 청와대 내부자들의 충성 경쟁에 지나지 않는다는 허위를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서로 속고 속이는 밀정들의 면면은 치가 떨리다 못해 불쌍하기까지 하다. 강자의 발가락에 낀 때까지 어떤 수치심도 없이 핥는 남자들은 자신이 누릴 최후의 권력이 선사할 영달을 꿈꾸며 이를 모두 각자의 ‘애국’이라 선언했다. 기만의 극치는 자기 기만일 터, 지 논에 물대는 ‘애국’이 대한민국의 기강을 뿌리째 흔들고 있었다.
같이 시청하던 20대 딸애는 ‘와 저런 일이 있었어?’하며 놀라워했는데, 나는 ‘지금은 저런 일 없어’라고 안심시키지 못했다. 지난해 계엄의 공포가 엄습했을 때, 나는 내가, 내 가족이, 내 이웃이, 내 나라가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폭압적 권위주의 정권과 그들의 하수인이 저지른 해악은 그들을 잡아 가둔 감옥에서 풀려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란 영화 <그저 사고였을 뿐>은 이유도 없이 잡혀가 당한 고문과 고통으로 무너지고 빼앗긴 무엇이 풀려난다고 망각되고 회복되지 않는다는 폭력의 결과를 보여준다. 악을 저지른 자들은 한국의 권력의 단맛에 중독된 남자들처럼, 국가를 위해 여기에 한술 더 떠 신을 위해 악을 대리한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미치광이들의 자기 기만은 고작 밑도 끝도 없이 잡혀 와 저를 가둔 게 누군지 제가 왜 잡혀 왔는지도 모른 채 결박되고 얻어맞고 위협을 당하자 순식간에 현실 자각이라는 위기의식으로 전환된다. 결국 이유를 모르는 죽음의 위협 앞에 소중하지 않은 구걸하고 싶지 않은 목숨은 없다는 것을 역겨운 역지사지로 깨달으려나.
그런데 그런들 뭘 하겠나. 권력의 하수인들을 죄다 잡아들여 저렇게 공들여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며 갱생시킬 수도 없거니와, 차마 살인 면허자들처럼 간단히 죽이지도 못한 채 고작 몇 대 때리고 악을 쓰고 욕을 해대는 작은 복수를 하고 서럽게 울며 돌아와서는 결국, 절뚝대는 가해자의 의족 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귀를 때리는 가해자의 망령에 붙들리고 마는 트라우마에 속수무책인 것을.
며칠 전 5백 명 이랬다가, 그제는 1천 명이라더니, 오늘은 3천 명이라며 점점 늘어나는 이란 학살 피해자의 숫자를 듣고 있다. 또다시 끌려가 영화 속 피해자들처럼 맞고, 고문당하고, 강간당하고, 협박당할 무고한 시민들이 걱정된다. 특히 히잡을 벗어던지고 얼굴을 드러낸 젊은 여자들의 안위가 걱정스럽다. 함부로 잡아들여 가두고 때리고 고문하고 강간하는 모든 권력과 그 하수인들을 저주하지만, 누가 권력을 잡든 유지하든, 못 참겠다고 들고 일어서 저 겁 없이 싸우는 사람들을 잊지 않는 혁명은 멀고도 멀 것이기에.
부패한 팔레비 왕조를 몰아낸 혁명의 무리들도 결국 다시 저들의 권력만 추구하는 사악한 권위주의 정권으로 타락하지 않았나. 당시 이들은 혁명의 선봉에 섰던 여성들에게 혁명은 끝났으니 집으로 돌아가라며 히잡을 씌우고, 혁명의 당위를 고집하는 인사들을 마구 잡아들여 가두고 죽이지 않았던가.
이 들끓음의 한복판에 혁명 운운하는 자들의 일부에선 옛 팔레비를 복구하자는 믿기지 않는 구호가 가짜 애국 지도자 ‘각하들’을 못 잊는 머저리들의 ‘윤어게인’처럼 나뒹군다. 누군가의 해석이 개입되었을 소식들로는 가공할 폭력이 낳은 피해의 상황을 짐작하기도 어렵다. 대체 이란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그리고 한국 사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