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착취 카르텔 ‘앱스타인 파일’ 환기시키는 드라마

ENA 드라마 <아너: 그녀들의 법정> 리뷰

by 그냥


성착취 카르텔과의 한판 승부를 그리고 있는 ENA 드라마 <아너: 그녀들의 법정>은 미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앱스타인 파일’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이 파일은 2025년 11월 미 하원에서 앱스타인 파일 투명성 법안이 통과됨에 따라 공개되었는데,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정·재계 인사, 연예인, 학자 등이 망라되어 있어 미국은 물론 글로벌적으로도 상당한 충격을 안겼다.


드라마는 차마 보기 힘들 정도로 성착취범(이들 또한 ‘앱스타인 파일’처럼 정·재·법조계 인사들이다)이 소녀나 젊은 여성의 성과 몸을 악랄하게 착취하는 정황을 보여준다. 드라마니까 과장이려니 하면 차라리 마음이 놓이겠지만, 오히려 드라마가 순화된 묘사였음을 알게 하는 성착취 피해자의 책이 얼마 전 나와 또 한 번 충격을 주었다. 바로 ‘앱스타인 파일’의 피해 당사자인 버지니아 로버츠 주프레 가 쓴 <노바디스 걸>이다. 급한 마음에 온라인으로 책을 주문했는데, 드라마 이상의 성폭력 피해를 감히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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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은 ‘앱스타인 파일’의 존재를 알리고 어떤 폭력과 가해가 있었는지 용감히 폭로한 책을 세상에 내놓은 후 버지니아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조금 더 힘내 살아주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마는, 잔혹한 성착취 피해를 극복하려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토록 벗어나려 애썼던 그 자리”에 다시 돌아오고 마는 폭력의 반복 속에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이 자살이었다면, 조금 더 살아주기를 바라는 기대가 과한 욕심이겠다.


‘앱스타인 파일’의 성착취 피해자 버지니아처럼 드라마에도 성착취 가해에 맞서 싸워보려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소녀 유정(박세현)이 등장한다. 감당할 수 없는 피해에 압도되어 붕괴된 그녀의 자아는 그저 세상에서 자신을 지우라고 한다. 성 착취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녀는 성착취 피해를 알리고 변호사 현진(이청아)의 조력을 받아 법정에 서지만 거기까지였다.


성착취범 개인의 가해가 아니라 ‘커넥트’라는 거대한 성착취 카르텔이 존재함이 드러나자, 이를 은폐하려는 카르텔의 위협이 가공할 수준으로 압박해온다. 카르텔의 진실을 폭로하려 준비했던 기자 준혁(이충주)을 카르텔이 살해한 후 이를 조작해 유정이 살해한 것으로 꾸며 기자의 폭로를 막고 유정을 꼼짝 못 하게 만든다.


하루아침에 성착취 피해자가 아니라 살인범으로 전락한 유정은 성착취 피해를 꾸며냈다는 온갖 악플에 시달리는 사회적 괴롭힘을 당한다. 끝없는 가스라이팅은 유정을 심리적으로 완전히 붕괴시키고, 가족과 주변인을 해치겠다는 협박과 성착취 파일을 만천하에 공개하겠다는 등 그녀는 버지니아가 겪었을 온갖 위협과 공포에 놓인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외 이 가엾은 소녀가 지옥에서 벗어날 길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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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의 죽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이었다는 자책은 L&J의 변호사들을 이 사건에 더욱 매달리게 만든다. 마침내 유정이 성매매 성폭력이 아니라 성착취 카르텔 ‘커넥트’에 의해 면밀하게 의도된 죽음을 맞았다는 진실을 포착한다. 그리고 카르텔의 하수인이 다름 아닌 라영(이나영)의 과거 ‘남친’으로 그녀를 성폭행했던 가해자 제열(서현우)임이 드러난다.


라영의 과거 성폭력 피해가 수면 위로 올라오고, 이 성폭행 사건에 현진과 신재(정은채)가 관련되어 있었고, 이것이 이들을 지금까지 의기투합해 여성 약자의 피해에 집중하게 한 기원이었음이 드러난다. 성폭력 가해자 제열은 검사이자 한 집안의 가장으로 신분을 깨끗이 세탁하고 다시 등장해 라영을 트라우마에 빠뜨린다. 그녀에게 복수하고 자신이 ‘커넥트’의 문지기였음을 은폐하기 위해 그녀를 다시 과거의 고통 속에 처넣는다. 성폭력 당한 그녀가 얼마나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자신에게 짓밟혔는지 상기시키며, “넌 그 밤에서 영원히 못 벗어”난다며 그녀의 영혼을 갉아댄다. 성폭력 트라우마를 자극해 피해자를 영원히 그 순간에 붙들고 지배하려는 성폭력 가해의 잔인함이다.


사람들은 보통 성폭력 피해를 가지고 뭘 그렇게 난리냐, 또는 당시 정말로 피해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게 맞느냐, 보상받고 다시 잘 살면 되는 거 아이냐는 등, 개구리를 죽이는 무심한 돌팔매질로 2차 가해를 서슴없이 가한다. 하지만 버지니아나 유정처럼 성폭력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는 그녀들을 언제라도 폭력의 현장 그 시간 속으로 돌아가게 해 무력하게 짓밟히고 있는 ‘쓰레기’로 인지시킨다는 점에서 비가역적 피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번번이 돌이킬 수 없는 순간으로 미끄러진다면 당신은 어쩌겠는가. 가십거리로 소비하는 2차 가해는 이들을 더 아니 가장 괴롭히는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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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들이 성 착취 카르텔의 진실에 더욱 가까워질수록 위협은 사나워진다. 마침내 ‘커넥트 파일’을 손에 쥐고, 용기를 내 카르텔 폭력에 공동 대응하기로 한 피해자들을 확보하고 폭로하기에 이른다. ‘커넥트 파일’의 존재와 그 인물들이 마치 ‘앱스타인 파일’처럼 공개되자, ‘커넥트’는 변호인들과 피해자들의 목숨줄을 끊기 위해 움직인다.


여기서 조력자인 줄 알았으나 이제는 그 진의를 알 수 없는 태주(연우진)의 정체가 조금씩 드러난다. 게다 ‘커넥트’의 주요 증인인 민서(전소영)가 태주의 사주로 움직였고, 라영과 현진을 위해한 당사자라는 게 밝혀지면서 드라마는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나는 민서의 존재는 시청자를 당혹시킨다.


민서의 존재는, 라영이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배냇저고리를 목격하는 당사자가 바로 그녀이고, 죽은 줄 아는 아기의 묘에 그녀를 다가가게 함으로써 이미 의미 있는 암시를 제공했다. 그 순간부터 나는 민서가 라영의 아이가 아니기를 바랐지만 헛된 기대였다. 참혹히 버려져 “지옥에서 살았”고, 버젓이 살아있는데 죽었다고 애도하는 가증스러운 모성을 철저히 배신하기 위해 민서는 라영을 파괴한다. 또한 아이의 아버지였을 저주에 마지않던 제열 또한 죽게 만들고, 이도 모자라 그의 딸 상아(김태연)를 지배하고자 시도한다. 민서의 복수는 정당할까. 시청자는 딜레마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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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서는 지독히 운이 나빴다. 학대하는 부모에게 입양되었으니 그 인생이 얼마나 신산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아이가 소녀가 되도록 집 나와 돌봐주는 이 없이 살며, 겨우 성매매로 호구지책을 삼으며 살았으니 “좋은 어른 같은 거 안 믿”게 되는 건 당연하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상실한 채, 이렇게 만든 당사자가 학대한 양부모가 아니라 낳고 버린 친모라고 믿는다고 해서, 엄마를 파괴해도 괜찮을까.


이러한 딜레마는 드라마를 극적으로 만들어 흥미를 돋울 수는 있겠지만 꼭 필요한 설정이었는지 회의하게 만든다. 라영의 변처럼 아기를 낳았지만 키울 수 없는 사정이 있을 수 있다. 무엇보다 임신 중지나 ‘미혼모’ 양육에 대한 제도적 사회 인식적 뒷받침이 부재한 채, 임신과 출산에 대한 책임을 오직 엄마(여성) 개인에게만 지워 아이를 입양 보낸 것이 마치 비도덕하거나 죄악인 양 다루는 게 바람직할까.


게다 아이의 친부는 제열처럼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은 채 멀쩡히 살아가고 있는데, 아이의 불행에 대한 모든 책임을 친모에게만 전가한다는 것은 몰염치하다. 얼마 전 임신 중지를 한 여성이 살인죄로 몰리는 사건이 있었다. 임신 중지가 헌법 불합치 판결을 받고도 마땅한 제도적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공백 속에 발생한 불행이 어떻게 여성만의 죄가 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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