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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Aug 29. 2020

<나다움 어린이책> 회수되어서는 안 된다

초등 성교육은 보다 대담해져야 한다

딸애가 무심히 전하는 회상을 듣던 날, 망치로 크게 얻어맞은 듯했다. ‘N번방’ 사건이 화마처럼 덮쳤을 때였다.    

딸애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며 친하게 지내던 남자아이 K가 있었다. 아이들끼리 친숙하다 보니 엄마들도 가까이 지냈다. 가끔 서로의 집을 오가며 놀기도 했는데, 그날은 딸애가 K의 집으로 놀러 갔던 날이었다.


K의 엄마가 잠시 집을 비웠는지 아이들끼리 있게 되었다. K는 느닷없이 랩톱을 들고 오더니 뭔가를 재생시켜 딸애에게 보라고 권했다. 당시 어린 딸로서는 너무나 역겨운 동영상이었는데, 저급 포르노 동영상 내지 불법 촬영물이었을 것이다. 보기 싫다는 딸애를 자꾸 재촉하던 K는 이번엔 더 놀라운 일을 감행했다. 반바지를 내리더니 자신의 성기를 딸애에게 내밀며 보라고 했다. 너무 늦지 않게 K의 엄마가 집으로 돌아와 K의 만행은 거기서 멈출 수 있었다. 참, 기막혀 넘어갈 일 아닌가?

   

이 사건은 지금 벌어진 일이 아니고 10 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 거의 모든 아이들의 손에 휴대폰이 쥐어져 있었고, 빠르게 스마트폰으로 대체되고 있던 때였다. 한마디로 언제고 어디서고 아이들이 포르노나 불법 동영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포르노나 불법 동영상에 접속한 아이들이 이를 원하지 않는 친구들에게까지 전해 문제 되는 사건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게다 포르노나 불법 동영상에 무분별하게 심취한 아이들이 이를 교실에서 자랑삼아 얘기하거나, 동영상의 성행위 장면을 거리낌 없이 교실에서 재현하기도 했다. 이게 초등학교에서 벌어진 일들이고, 반복하는데, 10년 전에 있었던 일들이다. 지금은 어떨까?    


그때는 불법 촬영 동영상의 실체를 모른 체, 엄마들끼리 모이면 ‘야동’이라 불리는 포르노를 아이들이 보는 것을 관용해야 하느냐 마느냐로 종종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일부 쿨한? 엄마의 경우, 포르노가 아이들의 성교육 일면을 담당할 수 있다는 놀라운 주장을 펴기도 했다. 참,  한가한 얘기였다. ‘N번방’ 사건으로 나라가 발칵 뒤집힌 지금, 그때 그 엄마는 어떤 심정이 되어 있을까?   

 


딸애가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진학한 후 학부모 대상 독서토론 동아리에 참여했다. 부모에게 아이들의 성은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는 화두이기에, 아이들의 성을 다룬 책을 읽고 토론한 어느 날이었다. 토론장의 엄마들, 특히 남아를 둔 엄마들은 놀랍게도, 자신의 아들을 매우 순진무구한 무성의 존재로 상정하고 있었다. 이미 초등 때부터 포르노나 불법 동영상을 돌려보며 키득대는 아이들을 어떻게 무성의 존재로 생각할 수 있는 걸까?     

초등이라는 성의 유예 기간을 지난 중학교는 부모들의 상상을 넘어선 저급한 성 스토리의 그야말로 집하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패드립’은 순진할 정도고, 포르노나 불법 동영상을 경유한 일명 ‘섹드립’은 여학생들이나 여교사를 성적으로 대상화하며 교실에 넘실댔다. 남자아이들의 과도한 성적 대상화에 지겨운 여학생들 아주 극소수가 미러링으로 남학생에게 대항할 뿐, 여학생들은 남학생들의 거침없는 성희롱에 속절없이 당하는 불쾌한 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이쯤 되면 필자가 지금 이 이야기를 왜 하고 있는지 독자들은 알아챌 것이다. 지난 26일 여성가족부는 ‘나다움 어린이 책’ 7종을 회수하기로 결정했다. 일부 초등학교에 배포한 성 교육 서적이 얼마 전부터 일부 언론에 매우 선정적인 제목으로 기사화되더니, 급기야 통합당 김병욱 의원이 “동성애 미화 조장, 남녀 간 성관계 노골적 표현”이라는 비이성적 언설로 국민을 호도하고 나섰다.


소신 있게 성 교육을 추진해야 할 여성가족부는 이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맥없이 회수라는 백기를 들고 말았다. 한국이 ‘N번방’으로 세계적 디지털 성범죄의 메카임을 증명하고, 게다 ‘N번방’ 상당수 범죄 고객들이 미성년 남성이라는 경악할 사실을 목도하고 있는 현실에서, 지금 이 후진적 행태가 용인될 수 있는 일인가?  

  


‘나다움 어린이 책’을 아이들에게 유해하다고 지적하고 있는 내용은, 책이 전달하려고 하는 맥락을 소거한 채 일부 그림과 사진만을 문제 삼아 책이 마치 도색잡지나 되는 양 전시하고 있다. ‘나다움 어린이 책’들 중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는 1971년 덴마크에서 출판돼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내용이다. 


몇 년 전 이 책을 접했을 때 이렇게 오래전에 성교육 책이 출판되고 보급되었다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책이 얼마 전이 아니라, 1970년에 만들어져 보급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 책을 문제 삼은 김병욱 의원이나 일부 누리꾼들은 숙고해봐야 하지 않을까?        


이미 1970년대부터 공존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성 평등이 기반해야 한다는 사실을 각성한 덴마크와 같은 나라(스웨덴, 프랑스, 호주 등)에선 한국에선 상상도 하지 못하는 성 교육 내용을 교실에서 그것도 초등학교 교실에서부터 아이들에게 가르쳐왔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이렇게 물의를 일으킨 이 내용들을 교실에서 버젓이 교육해 온 위 나라들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위 나라들의 성 평등 지수가 한국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높고, 성범죄율이 한국에 비해 현격히 낮다는 이 현실은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 핀란드 최연소 총리 산나 마린의 부모가 동성애 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으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으며 국정을 운영하고 있는 이 놀라운 현실이 함의하는 바는 무엇일까?  

  

다시 딸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9살 남아에게 당한 성폭력을 덤덤히 말하는 딸에게, 나는 몰이성하게도 왜 그때 말하지 않았느냐고 묻고 말았다. 딸애는, 당시는 일단 너무 놀랐는데,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갑자기 벌어지는 바람에 당황했고, K가 자신을 때린 것은 아니다 보니 말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오 마이 갓.


성 폭력 피해는 이런 것이다. 어린아이가 어린아이를 가해할 수 있는 범죄이며, 십 년이 지나서도 잊히지 않는 사건이다. 성 폭력이 딸애에겐 치명적으로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치명적이었다면 돌이키기 어렵다.  

   


9살 K는 이미 포르노나 불법 촬영물의 성행위에 익숙해 있었기에 그런 행위를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아이의 의식에 포르노나 불법 촬영물로 성이 왜곡된 채로 스며들기 전에 온전한 성 교육이 먼저 들어섰다면, K는 이런 참혹한 행위를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남아를 둔 부모들은 여전히 자기 아이를, “우리 애는 아직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보호막을 치려  하겠지만 진실은 전혀 다르다. 잊지 말자. 아이들은 결코 무성의 존재들이 아니다.    


딸애는 지금쯤 K는 어떤 인간이 되어있을지를, 교실을 온갖 음험한 성폭력의 언행들로 채우던 그 무도한 아이들이 혹시 ‘N번방’의 고객이 되어있지 않을까하는 불길한 예감을 말끔히 지우지 못했다. ‘N번방’ 등을 비롯한 성범죄는 무엇이 어린 남자아이들을 수렁에 빠뜨렸는가를 더 이상 재론할 이유 없다고 증명했다.


아이들을 무성의 존재로 상정하는 무의미한 성 교육으로는 어떤 효과도 거둘 수 없음을, 이 나라의 참담한 성 불평등 현실이 이미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오직 온전한 조기 성교육만이 그나마 해결의 열쇠를 쥘 뿐이고, ‘나다움 어린이 책’은 그 도구로 적절하다. 성 교육은 더 어릴 때, 더 용기 있고 과감하게 이루어져야만 실효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딸애가 캐나다에 잠시 머물 때 다니던 학교에는 화장실마다 생리대와 콘돔이 비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성교육을 하기 위해 한 강사가 왔는데 아주 ‘힙’했다고 한다. 그 강사는 성 교육을 ‘나다움 어린이 책’ 이상으로 매우 상세히 진행했을 뿐 아니라, 성폭력의 실태를 생생하게 전달하면서, 성폭력이 당신에게 일어난다고 해도 그것이 절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성폭력이 일어날 시 그 대처 방법까지 면밀히 전달했다고 한다. 성 평등한 세상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참, 이 ‘힙’한 성 교육 강사는 ‘퀴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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