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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Sep 26. 2020

해수는 왜 백희성의 칼날을 받아야만 했나

tvN 드라마 [악의 꽃] 리뷰


해수(장희진)가 차지원(문채원) 형사인 척 사이코패스 살인마 백희성(김지훈)의 칼날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장면에서, 왜 해수가 속죄양이 되어야 하는가에 아연해졌다. 해수가 용납한 백희성의 칼날은 숭고한 희생일까 아니면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목숨으로라도 갚아야만 했던 동생 현수(이준기)에 대한 부채감이었을까?    

 

‘가경리 이장 살인 사건’이후 해수는 단 하루도 편안할 수 없었다. 온기 없는 방, 불을 밝히지 않은 방, 음식을 해 먹은 흔적이 없는 방은 그녀의 영혼이 어떻게 침식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살인마의 자식이라는 주홍 글씨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운 삶에, 동생의 손에 피를 묻히게 했다는 죄책감은 해수의 평범한 일상을 침몰시켰다. 그렇다면 동생 현수가 누나 해수 대신 살인 혐의를 쓰고 달아난 행동은 진정 해수를 위한 행동이었을까?


드라마는 왜 해수를 무력하게 만들었나    


[악의 꽃]은 막바지에 이르러 현수가 어떻게 위기를 돌파하는가에 집중하기 위해, 그렇지 않아도 허술한 해수의 캐릭터는 좌초되고 말았다. 15 년 전 현수가 해수의 살인을 대신 짊어진 행동은 끈끈한 우애를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현수보다 한 살밖에 많지 않은 해수가 살인을 저지르기 전 얼마나 현수를 보호하려 했는가를 돌이켜본다면, 현수가 자신 대신 살인죄를 짊어지도록 방관했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또한 현수의 공감 능력이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설정을 제시한 드라마로서는, 해수가 성폭행의 위기 앞에 살인을 저지른 현장을 보고 현수가 즉각 남매애를 불러내 희생양이 되겠다고 나선 설정도 무리다.     


아버지를 잃고 고아가 된 두 남매가 서로를 의지했으리란 짐작은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살인죄란 남매지간이라도 그렇게 선선히 감당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게다 문제는, 대신 살인자가 되기로 한 현수의 의도와 달리, 그 결과가 해수에게 매우 참혹했다는 데 있다.


현수가 죄를 자신에게 이전한 후 해수는, 사는 내내 마치 유령처럼 좀비처럼 사람 속에 섞이지 못하고 홀로 길고 긴 어둠의 터널에 억류될 수밖에 없었다. 누나 대신 살인자가 된 선택을 한 현수가, 비록 고독하고 위험했더라도, 신분세탁을 통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찾아나간 반면, 비자발적으로 죄를 이전시킨 해수는 오히려 그날로부터 죄의식에 사로잡혀 심리적 노예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결국 해수의 의지를 막아 선 현수의 선한 의도는 해수를 전혀 해방시키지 못하는 역설을 낳았을 뿐이다.


고통은 쉽게 경중을 나누어 계량하기 힘들다. 어떤 고통은 다른 고통을 잉태하기도 하고 상관없는 듯한 고통도 연관되어 있을 때가 많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명백히 가를 수 없는 것처럼, 고통도 서로를 구분해 분리해내기 어렵다. 그런데도 드라마는 성폭행과 살인의 트라우마에 시달렸을 해수의 심리를 소거하고, 연쇄 살인마 아버지의 유령에 시달려야 했던 고통만을 드러냄으로써, 해수의 성폭행 피해와 살인이라는 가해의 깊은 상처를 무화시켰다.

  


아버지가 매단 주홍 글씨인 살인마 자식이라는 죄의식은 그 상흔이 깊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성폭행과, 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혀야 했던 살해 역시, 고통의 경중을 가리는 게 무의미할 만큼 그 상처가 심대할 것이다. 그럼에도 해수의 입장에 서 보면, 나는 후자의 고통에 더 압도당할 것 같다. 아버지의 심리적 유산은 상속을 거부할 수 있다지만, 자신이 직접 피해와 가해의 당자사가 되는 일은 결과가 어떻든, 그 고통과 책임의 동심원에서 결코 벗어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해수의 고통은 자신이 저지르고 현수를 개입시키고 만 그때 그날의 사건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함에도, 드라마는 현수가 쓴 누명과 이를 벗어나려는 스릴러 서사에 집중하기 위해, 해수의 성폭행 피해와 살해 트라우마는 마치 에피소드인 양 다룬다. 그로 인해 드라마는 심대한 트라우마로 삶을 상실한 해수의 어두운 이면을 전혀 조명하지 않은 채, 오직 동생 현수에 대한 죄책감을 씻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모성을 방불케하는 모습을 재현시키며, 해수가 처한 이중 구속의 역설은 전혀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드라마의 설정처럼 일찍이 헌신과 사랑으로 동생을 보살펴온 누나라면, 동생의 평생을 포획할 누명을 쓰게 두지 않는다. 드라마는 현수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부상시키기 위해, 해수를 동생에게 죄를 이전시키고 만 무력한 누나로 만들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동생 현수를 온갖 구설수에서 변호하고 동생을 굿판에 올리는 이장의 행동을 묵과할 수 없어 담판을 지으러 간 해수의 캐릭터를 미루어 짐작해보면, 그녀는 결코 무력한 사람일 수 없다. 동생에게 죄를 이전시키는 비이성적인 누나 해수와 동생을 지키려 헌신적이고 대담하게 행동했던 누나 해수의 캐릭터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생긴다.  

   

해수라면, 그리고 그런 상황의 어떤 누나라도, 동생이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을 뻔히 아는 올가미를 씌울 수 있을까? 드라마는 납득할만한 동기를 부여하지 않은 채 해수가 동생에게 죄를 이전시키고 평생을 그 죄책감에 사로잡혀 사는 가해자이자 피해자라는 불분명한 상태로 그녀를 결박한다. 모호한 해수의 죄책감은 드라마 내내 가해자로 살게 했고, 마침내 그녀가 현수의 아내인 지원과 딸인 은하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게 함으로써 죄책감의 인질 상태에서 벗어나게 한다. 드라마는 왜 해수가 현수의 결정을 거부하지 못하게 하고 평생을 죄책감의 감옥에 살게 했을까. 또한 자신의 결정도 아닌 죄의 이전에 대한 부채를 결국 자신의 목숨을 대속함으로써 상쇄하게 하는 걸까?  

   


애초 드라마는 연쇄 살인범 아버지가 야기한 악으로 자식인 남매가 겪어야 하는 고통의 동등함과 차이에 집중할 의도가 없었던 듯하다. 사이코패스 아버지의 심리적 그늘에 있던 현수의 성장 서사를 흥미진진하게 견인해내느라, 해수의 캐릭터를 줄곧 “짐짝같”게 만들 걸로 미루어볼 때 말이다.


“짐짝 같은” 자신에 환멸이 난 해수가 마침내, 자신의 목숨을 살인마 백희성에게 현수(지원과 은하)를 대신해 희생시키고, 그로써 “제 자신이 조금 좋아졌”다고 말하게 하는 장면에선, 피해자의 희생을 짜내는 것으로 피해 회복의 형태를 취하게 하는 가학성까지 내보인다. 자신이 결정하지 않은 죄의 이전을 책임지기 위해 왜 해수는 자신을 평생 내면의 감옥에 갇힌 채 살아야 했으며, 왜 마침내 자신의 생명을 바침으로써 그 죄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고, 드라마는 말하려 하는 것일까?  

   

해수는 죄조차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다    


이런 가정을 제기해 보고 싶다. 만일 그때 현수가 죄를 대신하지 않았다면 해수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를 상상하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고통스럽다. 연쇄 살인범 아버지를 둔 미성년 소녀가 성폭행을 당하고 그로 인해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악마화된 남매의 평판으로 미루어 쉽게 믿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15년이 지난 재판에서 해수가 무죄를 선고받을 수 있었던 정황은, 15 년 전에도 변하지 않은 진실이다. 현수가 죄를 자신에게 이전하는 대신, 모진 고통이 닥치더라도 해수가 성폭행과 살인을 법정에서 마주할 수 있게 조력했다면, 해수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그 대답도 희망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자신의 성폭행과 살인 행위를 직면하는 일이, 15 년을 당치도 않은 죄의식과 부채감을 가지고 어둠 속에 사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고도 단언할 수도 없다.  

   

해수의 딜레마는, 자신의 피해와 가해의 삶을, 그것이 비록 숨도 쉬기 힘든 고통일지라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없었다는 데에 있다. 자신의 죄는, 그 동기가 어디에 있든, 사회의 조력 속에 스스로 지는 게 마땅한 것이며,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를 다투는 것 역시 당사자가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이 남매애에 기반한 행동이었을지라고 현수는, 스스로에게 죄를 이전시키는 안일한 구원으로 누나의 삶의 주체성을 망실하게 만들었다. 드라마는 가족을 범죄에 연루시키는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을 재현해, 그것이 죄가 되었든 선행이 되었든, 한 사람이 온전히 행사해야 할 삶에 대한 결정권을 침해한 서사를 남매애로 가공해냈다.     


현수의 죄의 이전이 비록 선의였더라도, 해수는 귀속되지 않아도 되는 죄책감에 15 년을 볼모잡혀 삶이 “망가졌”다. 그렇다면 현수의 선의는 해수에게 어떤 가치가 있었던 걸까? 미담으로 오해되며 회자되곤 하는 가족 간의 희생은 기실 그 누구도 구원하지 못한다. 그 희생에 부채를 진 누군가는 결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15년 전 참혹한 과거를 돌아본 현수가 말한 것처럼, “누나와 저의 재판은 이미 끝난 거나 다름이 없”다고 할 만큼 절망적이었을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내리지 않은 결정으로 15 년을 웃음과 온기를 망실한 채 불 꺼진 방에 스스로를 유폐시킨 해수의 삶이, 스스로 결정한 감옥의 차디찬 바닥을 견디는 것보다 나은 삶이었다고 단언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나는 해수의 깜깜한 옥탑 방이 그 어떤 감옥보다 시리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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