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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od job 조은 Nov 04. 2021

2만원 주고 재미를 샀으면 된거지

여행에 있어 우연의 역할은 각별하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잔인함과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으로 가득한 감독



여행에 있어 우연의 역할은 더 각별하다.

여행은 우연의 연출력을 극대화시켜준달까..




당연히 있을 줄 알았던 기차표가 없어 막차를 타고 다음 여행지로 떠나는 우연, 예정되어있던 프로젝트 회의가 갑자기 취소되는 우연, 가고 싶었던 펍이 있어 40분을 걸어 찾아갔지만 문을 닫은 우연, 그러다 그냥 들른 맥주집에서 내 취향의 맥주를 발견하는 우연, 매일 얘기하는 동기인데도 그 날따라 연결된 전화가 재밋어서 술집에서 맥주를 더 먹게 되는 우연, 술에 취해서 같은 한옥에 묵은 이와 대뜸 돌바닥에 누웠는데 별이 쏟아질 듯 많은 우연, 마루에 앉아 서로의 취향과 가치관에 대해 추워 덜덜떨면서도 새벽까지 신나게 이야기하는 우연,


여행에서 이런 순간들이 오면 ‘아 이거 감겼네’ 싶다가도 확 재밌어지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런 우연 없이 예측 가능한대로 흘러가면 여행은 그 빛을 잃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감겼다



안동여행의 처음부터 어딘가 감긴 느낌




평일 오후라 당연히 있을 줄 알았던 기차가 매진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다 싶어 마지막차를 예매하고 기차를 탔다



아마 오후에 출발하면 보지 못했을 노을을 보았다.




다른 여행지는 모두 게스트하우스 예약을 했는데,

안동에서 예약한 게스트하우스가 ‘예약 중’만 뜨고 추후 안내가 없어 그냥 취소했다.


“그래 안동에서는 내 취향의 숙소를 가자”

ㅡ하고 대뜸 방이 남아있는 한옥을 예약했다.


개인적으로 한옥에만 있는 아랫목과 마루를 좋아한다.

마루에서 책을 보다가 아랫목에 누워 프로젝트 회의를 기다리는데 전화가 한 통 걸려오는 것이다.


‘아마 오늘 프로젝트 회의는 어렵지 않을까?’라는 동기의 말에 방에서 회의하고 맥주나 먹을까.. 했던 계획을 틀어 ‘옳다구나 잘됐다’(라며 가고 싶었던 펍으로 향했다.





작년에 와서 혼자 맥주 마시면서 책 읽고 글 쓰던 게 좋아서 이번엔 직장인 된 기념으로 이 곳에서 와인을 먹어봐야지ㅡ하고 향했던 옥정이 닫혀있었다.


새로운 곳에 도전하라는 신호인가? 해서 다른 선택지로 향했는데,



왜 너도 닫혀있는건데..


둘 다 네이버에서는 영업시간 잘 적혀 있었던 것 같은데..이상하다?




그렇게 대안의 대안으로,

발 닿는대로 도착한 맥주집은

안동금맥주, 안동밀맥주, 하와이IPA같은 특색 있는 술을 파는 곳이었고

괜히 이름들이 매력있어서 그런지 샘플러에 도전해봤다.


그리고 이 도전은 꽤 만족스러웠다.


이거 마케터 병인가..



물론 모든 맥주가 맛있어서 만족스럽다는 표현을 쓴 것은 아니다


사진을 보면 X 표시는 정말 내 취향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성공할 수 있는 자유와 실패할 수 있는 자유 모두를 누리면서 보내는 밤이, 그 경험 자체가 꽤 만족스러웠다.



밤산책 좋아



그렇게 마음에 드는 맥주를 3잔 정도 더 마시고, 3시간은 송은 언니랑 영상 통화로 수다를 떨고 원래 계획했던 책 읽기와 글 쓰기는 아주 쪼끔 하고 집에 귀가했다.


그런데, 참 좋았다.

너무 자유로웠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렇게 들어간 숙소,

감성적인 것들은 늘 조금의 불편함을 동반한다.


화장실과 샤워실이 방 밖에 있어 이동해야 하는 한옥이 그렇고,

또 옆방 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한옥이 그렇다.




그 사람이 ‘어 아까 맥주집에서 혼자 있는 거 봤던 것 같은데’라며 알아봤고,


알고보니 옥정을 갔다 문을 닫아서 퍼블릭 하우스를 갔다 문을 닫아서 같은 맥주집에서 먹은 같은 실패루트(?)를 가진 사람이라는 점이 재밌어서 였을까

구태여 안동, 그것도 남들이 잘 찾지 않는 이 한옥의 멋을 아는 사람을 만난 게 재밌어서 였을까

하필 서로 혼자 왔는데 옆방에 묵게 된 인연이 재밌어서 였을까,

아니면 적당히 술 취해서 맞는 이 상황이 재밌어서 였을까






생각해보면 한옥 밖의 돌바닥에 냅다 누웠는데 아무렇지 않게 같이 누워준 게 대화의 시작인 것 같아


그렇게 본 하늘의 별은 PPT로 누가 네온 기능이라도 넣었나 싶을 정도로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누워있다가 마루에 앉아서 새벽까지 대화하고 방으로 들어가서, ‘오늘 말 정말 많이했다. 오랜만에 재밌었다’




엇박의 비트가 깔렸는데도 당황하면서 거기에 맞추려고 하지 않고 내 삘대로 나름대로 멋진 춤을 춘 것 같은 하루였다.

 





아침이 밝았다.


‘나는 술 먹은 다음 날 아침에 아이스아메리카노 먹어줘야 해.. 죽을 것 같아’


속으로 ‘이런 취향이 맞다고..?’하면서 왠지 웃겨서 차를 타고 같이 커피를 마시러 가자는 말에 흔쾌히 좋다고 했다.


그런데 어제 밤에 가고 싶었지만 교통편이 없어 못간 월영교로 향하는 것이다

실행 못한 계획이 여기서 되네?




일어나서 한옥 답장 앞에 꽃이 꽂혀있는 것처럼 핀 게 꽤 맘에 들어서









도산서원이다.

안 외도 아쉽진 않았겠지만 알게 된 이상 아마 가을에 도산서원을 오지 않았다면 후회했을거라는 생각을 했다


왜냐, 너무 아름답잖아


보통 이런 곳을 오면 역사학과가 아니면 다 둘러볼 일이 없는데 역사학과 답사 때보다 구석구석 둘러봤다





그러다보니 이 곳의 대나무는 줄기가 검정색이라는 것도 알게 됐고,





도산서원에 깊이 들어가면 이런 풍경이 있는 것도 알게 됐다




ㅡㅡㅡㅡㅡㅡㅡㅡ





드디어, 메인 에피소드다.

차를 타고 떠나려는데 저기 휴게소에서 빨간 식혜를 발견했다.


1.2kg 가격도 2만원의 빨간 식혜.

식혜인데 빨개..? 어쩐지 도전인데, 그걸 심지어 1.2kg씩이나? 심지어 2만원이요? 아쩐지 이 물건을 파는 할머님의 “건강식품이여-“라며 이상하리만큼 포장하는 멘트까지 더해져 혼자 속으로 ‘괜찮나..?’하고 있었는데,


결국은 샀다.

그리고 빨간 식혜를 먹자마자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그렇다 이건 김칫국물에 밥알이 들어있는 맛이었다.

식혜의 달콤함도, 육중한 양을 견디고 먹을 만큼의 맛도 없었다.


‘왜 식혜가 빨간지 생각해보지 못했던 내 안일함 때문이야…’라는 멘트에 너무 웃겨서 한참을 웃다가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술술 나왔다






재미를 2만원 주고 샀다고 생각하니까
잘 산 것 같다






ㅡㅡㅡㅡㅡㅡㅡ







나 참 또박또박 잘 걸으면서 살고 있는데,

그럼에도 인생이란 게 참 빨간 식혜의 연속이란 생각을 한다.


뭔가가 될 법한 달콤한 말로, 뭐라도 특별한 것 같아 보이는 게 저 멀리 보여 그거 한 잔 먹겠다고 또박또박 걸어가다가도 넘어지기도 하고 결국 도착하는데


사실은 맛없고 아무 것도 아니면 서글퍼지는 게 나였다. 이거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온 내가 멋지고 장하면서도 결국 그 맛 없는 걸 들고 먹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있는 내가 멋져보이지 않았기 때문인가



ㅡㅡㅡㅡㅡ



여행에서 우연이 필연적인 것이라면,

그 우연의 댓가로 얻을 수 있는 건 뭘까?



깜짝 놀랄 만큼 빛이 나고 아름다운 건 다른 어느 것도 아닌 바로 지금, 여기라는 거?

기대하고 기대는 마음이 사람을 찌질하게 만들지만 살아가게 하는 마음이기도 하다는 거?

사실 모든 필연처럼 보이는 것은 내가 우연을 필연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해석한 거라는 거?


다 맞지만 나는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거를 괜시리 알려주는 게 아닐까.


그거 하나 보고 달려왔어도 정작 맛없으면 버릴 수도 있다는 행동의 가능성, 그때 내 기분이 꼭 나쁘지 않아도 된다는 기분의 가능성, 사실은 나는 빨간 식혜가 아닌 재미를 산 것일 수도 있겠다는 관점의 가능성



그 모든 가능성을 등에 업고 자유롭게 선택하며 살라는 거

나와 세상을 의심하며 무엇 하나 단정지을 수 없고 사소하고 혼란한 날들을 지나 나의 생각들을 돌아봤을 때 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들은 결국 다 내 안에 있었다는 걸 안다




안동 아차가에서 본 문구.. 너무 귀엽지



‘이제 날 좀 알 것 같아 난’

그럼에도 모를 때는 우연에 맡기고 즐기기

감겨보자고,




안동 첫날에 안일하게 있다가 막차 타놓고 또 차편 제대로 안 알아봐서 노을 질 때가 되어서야 다음 여행지로 출발하는 나.. 안동에서 뭔가 제대로 감겼다



수미상관 마무리 오히려 좋아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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