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좋았던 영업 경험기
"은님 광고주랑 ~ 해보시겠어요?"
"은님 우리 브랜드 광고상품소개서 만들어 주시겠어요?"
"오 다 만들었어요? 그럼 우리 광고 영업 시트 한 번 만들어서 쫙 돌려주시겠어요?"
사실 분명 ‘브랜드 마케팅’이라는 직무를 보고 지원한 것이라 조직에서 은근슬쩍 영업 관리에 영업 POOL 운영 업무까지 떨어졌을 때는 어쩐지 취업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다.
이제 느끼는 건 아마 나를 더 키워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때의 나에겐 어쩐지 영업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있었다는 걸 인정한다.
6개월 - 1년간 브랜드 마케터지만 영업 업무를 아주 작게나마 경험하며 느낀 영업 마인드 혹은 인사이트를 한 번 적어보려고 한다.
(기초) 영업은 연애하듯이
일단 기초 마인드를 세팅해보자면 영업 = 연애 마인드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연애 마인드란 무엇인가
상대를 변하게 하기 위해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는 것
상대를 알아줘야 상대도 나를 알아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뭐 이런 게 연애 마인드라는 건 나도 교수님이 알려줬다
1. 마케팅은 타겟 고객을, 영업은 개별 고객을 알게 해준다.
기초 마인드부터 세팅한 이유는 있다.
앞으로의 서술에 저것을 차용하려고 한다.
업무의 구체적인 내용과 성과를 얘기하지 않고 이 주제를 이야기하기엔 최고의 비유가 아닐까 싶다.
왜 연애하기 전 우리에겐 이상형이라는 게 있다~ ..
다만 그 이상형이 ‘누구’인지는 잘 모른다. 생각해보면 키 크고 여우상에, 몸에서는 길가다 뒤돌아 볼 정도의 좋은 향이 나고, 책 많이 읽고 스스로 나아질 줄 아는, 퇴근 후 반주의 매력을 아는 20대 남자 .. 나름 구체적으로 정의내렸다 쳐도 한국에만 적어도 100명은 될 것이다.
그 이상형을 ‘어떤 한 사람’으로서 알게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그냥 이곳 저곳 다니다보면 외적인 이상형을 발견하기도 하고, 내 취향의 곳을 가면 또 나랑 같은 취향인 사람을 우연히 혹은 조금은 인위적으로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내적인 이상형을 발견하지 않나?
그러니까 발로 뛰고 소통하고자 하는 순간들이 나를 실체 없던 이상형에서 실체 있는 이상형에게로 이끈다.
그렇다.
마케팅 단계에서는 주로 ‘타겟’이라는 걸 설정한다. 이건 어쩐지 뭉뚱그린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시장 세분화니 뭐니 해도 이 타겟은 어떻게 해도 구체적이지 않다.
하지만 영업을 하다보면 어떤 기업에 다니는 어디 팀 누구가 우리 브랜드와 일하는 걸 원하는지 정확히 알게 된다.
아 물론 그런 순간도 있다. 왜 연애도 이상형은 정확해도 꼭 하나씩 이상형에 변주를 주는
‘아니 쟤가 왜 마음에 두둠..!’
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그런 것처럼 알고 보면 또 다른 고객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트렌드 미디어에 고양이 모래 광고주가 찾아오는 것처럼 말이다 .. 하지만 나중에 이건 꽤 서로가 몰랐던 좋은 만남임을 깨달았다.
2. 영업을 하다보면 고객과 상품을 가장 잘 이해하게 된다.
ㅇㅋ 연애로 비유를 든 김에 계속해보면 '연애를 많이 한 놈은 계속 한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게 나는 그런 뜻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언제 먹히는지 아는 거’
‘상대가 뭘 원하는지'
이런 걸 캐치해내는 미세한 관점이 생기는 거
비빌 구석을 귀신 같이 찾아간다는 뜻이다.
아무튼 언제 먹히는지 알게 되면 우리의 매력이 뭔지 더 잘 알게 된다.
또 어느 순간 연애의 성숙기처럼 상대와 나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되니 고객이 원하는 게 뭔지 말하지 않아도 제안해줄 수 있는 것들도 생긴다.
나 너 이런 거 좋아하는 거 기억해~ 나 너 지켜보고 있어 같은 시그널이랄까?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고객들에 대한 데이터를 기억해뒀다가 "10월 중에 홍보 예산을 이쪽으로 사용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번에 그래서 열리자마자 연락했어요" ‘잘 지내세요? 전에 성과가 좋았는데 이번에 마침 저희 글에 소개되어서 연락드려요!’ 같은 연락을 능글맞게 할 줄 알게 되는 매니저가 되었다..
추가로 기존 영업 POOL이 익숙해지게 되면 신규 영업 POOL을 발굴하는데도 생각이 가게 된다.
기존에 우리 브랜드가, 혹은 우리의 광고상품 중 이런 게 먹혔으니 먹힐만한 다른 채널들을 발굴하는 것이다
인스타그램에 <광고주 모집>이라고 대문짝만하게 하는 식으로 과정 중에서도 뭔가 재밌는 걸 좋아하는 것이 우리의 광고주일 것인가, 아니면 광고상품을 일부러 예약하기 어렵게 해서 누가 봐도 어려운 구좌를 잘 구했다-의 느낌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우리의 광고주일 것인가를 고민해서 그때 그때 예측하며 판단하며 전략을 세우기도 하고,
아니면 이미 나온 결과를 중심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광고 효과는 늘 주제와 잘 어울러지는 쪽이 잘 나왔으니 미리 제작 부서에 주제 리스트업을 요청하고 잘 어울릴만한 브랜드가 있나 전사 제안서를 괜히 뒤적 뒤적 해보기도 하는 것이다.
3. 영업을 하다보면 상대의 변화를 가장 빨리 캐치하게 된다
영업을 한다는 건 계속해서 상대를 들여다볼 명분이 생기는 것이기도 하다.
다들 왠지 ‘자니?’ ‘요즘 잘 지내지..’같은 잔바리들이랑은 연애하기 싫지 않나?
그렇다고 ‘너 요즘 읽는 책 재밌어 보이더라 그거 뭐야?’ ‘아프다며? 죽이니까 받아 (죽인다는 뜻 아님. 진짜 '죽')’하고 기프티콘 하나 던지는 식의 상대를 면밀하게 살펴보기를 시전하는 것도, 하고 싶다고 그런 환경이 막 생기는 건 아니다. 특히 영업자가 아니라면 거의 어렵다.
회사를 옮기셨군 같은 작은 거부터 시작해서 아~ 요즘은 이런 일/프로젝트를 하는군! 이런 곳이 아프군, 이런 게 재밌군까지 정보를 알 수 있고, 명분 있는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게 어쩌면 영업자의 특권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럴 수 있으면서도 ‘자니?’ 정도의 멘트를 날리는 영업자가 된다면 그것도 참 비극이다 ..
차라리 잘 지내냐고 합시다.
아무튼 이런 관심주기와 관찰은 ‘트렌디한 마케팅 이슈에 관심 있는 -'가 아니라 '맞춤 AI로 옷을 큐레이션 해주는 앱서비스의 홍보 담당자님', '최근에 오프라인 팝업스토어를 연 플랫폼 비즈니스를 하시는 브랜드팀의 대리님', ‘저번 광고 집행했을 때 전환 수 때문에 스트레스 받았던 담당자님’으로 알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것이다.
4. 마지막으로 영업을 ‘아유~ 한 번 사봐~’ 식으로 이해했던 나를 반성한다.
마케팅과 영업의 시너지는 엄청나다.
영업할 때 구질구질해지기 싫어서 상품과 브랜드의 매력도를 닦게 된다.
마케팅할 때 고고하게 혼자 치장해놓고 내 이상형은 언제 오나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상대를 꼬시러 가는 능동적인 액션과 권한까지도 가지게 된다.
즉, 이런 마음으로 이렇게 기획했는데 이건 우리가 함께 해보면 너무 좋을 것 같아-같은 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나가서 이야기를 하든 뒤지게 깨지든 의미있다. 깨졌어도 상품/브랜드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 실제적인 VoC를 가지고 서비스 기획과 개선에 의견을 내고, 그걸 바탕으로 의사결정된 하에서 발전된 것들에 대해서 또 다시 가서 내가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 굉장한 액션이자 권한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또 시너지를 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다. 진정성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내가 자신 없는 건 내가 팔 수 없기 때문에 기획과 마케팅단에서 혹은 피드백과 내부 이슈 도출에 있어서 적극적일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스스로 이 상품이나 서비스가 약하다고 생각되는데 있지도 않은 장점을 지어내는 것은 현타가 오는 성격이라 조금 더 진심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쪽팔리잖아 ..
물론 영업을 맡았던 브랜드가 그 자체로도 파워가 있었기 때문에 찾아오는 고객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너무 고마운 일이었다. 그래서 수월하고 재밌게 일할 수 있었던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면 나는 영업을 하다가 괜시리 마케팅 일에까지도 현타를 느끼고 다른 브랜드로 이를 갈며 뛰쳐나가지 않았을까 싶다.
영업 접점에서 '파는 것'에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나를 믿고 와준 사람들이 돈을 내고 마지막 결과보고서를 받을 때까지 만족할 수 있게 온보딩과 랜딩, 그리고 마중 인사까지 해주는 것, 이건 영업자이자 마케터인 사람만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 아닐까 싶다.
그러다 보면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모든 프로세스를 담백하고 진정성 있게 끌어나가야 겠다는 업무 철학이 생긴다.
파는 접점에서 '일단 팔면 되는 거 아닌가? 거짓말이고 자신이 있든 없든 무조건 지르고 봐!'가 아니라 '우리 잘 만나보자 나는 우리가 정말 잘됐으면 좋겠어'와 같은 마음으로 팔고, 또 그때 했던 약속과 가치를 느낄 수 있게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는 그런 철학
이렇게 영업 관리를 하고 응대하고 제품 서비스까지 전 과정에서 의사결정을 내리는데 참여해본 경험 덕에 빠르게 업무나 프로덕트/서비스/프로세스를 개선시킬 수 있는 프로젝트에서 PM을 맡거나 광고주와 바로 커뮤니케이션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을 빠르게 갖게된 것도 사실이니 1년 넘게 매일 들어오는 수 많은 응대 건들을 바탕으로 영업 시트를 정리했던 고생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어쩌면 내가 스스로 정의하기에 영업이 원나잇 같은 게 아니라 연애와 같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루 보고 말 사이면 알 바 아닌 것이 직접 사람을 대면하고 그들의 고민을 듣다보니 알 바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신기한 건 이렇게 신경 쓴 고객들은 꼭 또 다시 찾아온다는 것이다
너무 고객지향적 사고같긴 하지만 나는 고객지향적 관점에서 일하는 게 맞는 마케터니 사실 이게 맞다고 본다.
아무튼 이렇게 잘난척 해놓고 사실 영업관리로 피드백을 들은 적도 꽤 있다.
그래도 마케터로서 영업 해보는 거? 오히려 좋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