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당신이 가난해지는 구조
우리는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아껴 쓰고 저축해라." 부모님 세대에게 은행은 부를 축적하는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금고였다. 월급을 받으면 무조건 적금 통장에 넣고 만기가 되면 그 돈을 찾아 집을 넓혀가는 것이 삶의 공식이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지금도 유효하다. 주식이나 코인은 도박 같아서 무섭고 부동산은 너무 비싸서 엄두가 안 난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은행을 찾는다. 원금이 보장된다는 그 안전함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이 안전하다고 믿는 그 순간에도 통장 속의 돈은 조용히 녹아내리고 있다. 숫자는 그대로지만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챕터에서는 우리가 절대적인 선(善)으로 믿어왔던 저축이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우리를 배신하는지, 그 구조적인 원인을 파헤쳐 보려 한다.
은행앱에 들어가거나 지점에 방문하면 잘 보이는 위치에 커다란 글씨로 금리가 적혀 있다. 연 3% 이율, 우대금리 4.5% 등. 이 숫자를 경제학에서는 명목금리라고 부른다. 돈의 가치 변동을 고려하지 않고 표면적으로 보이는 금리다. 우리는 이 숫자를 보고 "아, 내 돈이 1년에 3%씩 불어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명목금리가 높은 상품을 비교해 보고 돈을 넣곤 한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는 또 하나의 숫자가 있다. 바로 물가상승률이다. 짜장면 가격, 버스비, 아파트 관리비가 오르는 속도 말이다. 내가 은행에서 3%의 이자를 받는 동안 물가가 4% 올랐다면 어떻게 될까?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1년 전 10,000원으로 살 수 있었던 햄버거 세트가 이제 10,400원이 되었다. 그런데 내 돈 10,000원은 은행에서 이자를 받아 10,300원이 되었다. 통장 잔고는 늘었지만 나는 이제 햄버거 세트 하나를 사 먹을 수 없게 되었다. 내 돈의 구매력이 사라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질금리의 개념이다. 명목금리에서 물가상승률을 뺀 진짜 금리를 말한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물가는 거의 항상 올랐고 저성장 시대에는 물가상승률이 은행 금리를 앞지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즉, 실질금리가 마이너스(-)라는 뜻이다.
실질금리 = 명목금리 - 물가상승률
물가상승률이 금리보다 높은 시기(대표적으로 2021년 팬데믹 시기가 있다)에 은행 예금은 확정적인 손실을 보는 상품이다. 만약 실질금리가 -1%라면 당신은 매년 내 자산의 가치 중 1%를 수수료로 내고 은행에 돈을 보관하는 것과 다름없다. (실질금리가 -1%라는 것은 은행이 돈을 깎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매년 화폐의 구매력이 약 1%씩 감소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10년이 지나면 당신의 돈은 숫자는 그대로일지 몰라도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10년 전보다 훨씬 줄어들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은행 예금을 안전자산이라고 부른다. 원금을 까먹을 리스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쌓아두기만 하는 현금은 가장 비효율적인 자산관리 방법일 수 있다. 시스템 자체가 시간이 지날수록 화폐의 가치를 희석시키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은행은 자선사업가가 아니다. 은행이 당신에게 이자를 주는 이유는 당신의 돈을 가져다가 기업이나 다른 사람에게 더 비싼 이자를 받고 빌려주거나 투자를 해서 수익을 내기 때문이다. 즉, 은행 금리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얻을 수 있는 평균적인 수익률보다 항상 낮을 수밖에 없다.
당신이 원금 손실이 두려워 은행을 선택했다면 그것은 안전함과 편안함을 대가로 확실한 손해를 선택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화폐 가치는 하락하도록 설계된 시스템 안에서 현금만 쥐고 있는 것은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가만히 서 있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저축은 무의미한가? 그렇지 않다. 저축은 여전히 중요하다. 다만 그 목적이 바뀌어야 한다. 저축은 여전히 모든 자산 관리의 출발점이다. 우리가 자산을 물려받지 않는 이상, 내 자산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저축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과거에는 저축이 부를 늘리는 수단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저축을 투자를 위한 총알(종잣돈)을 모으는 수단이거나 예상치 못한 위기에 대비하는 방어 수단으로 인식해야 한다. 저축으로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대신 저축을 통해 자본 소득을 만들 수 있는 자산(주식, 부동산 등)을 살 수 있는 덩어리 돈을 만드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실함은 중요한 미덕이지만 방향이 잘못된 성실함은 억울함을 낳는다. 특히 은행 이자가 물가 상승을 따라잡지 못하는 시대에는 통장에 찍힌 숫자가 늘어난다고 해서 내 자산이 증식하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저축의 배신을 피하고 자본주의 생존자로 남는 첫 번째 깨달음이다.
<3줄 요약>
1. 은행이 주는 이자(명목금리)보다 물가상승률이 높으면, 내 돈의 실질 가치(실질금리)는 오히려 줄어든다.
2. 예금은 원금인 숫자는 지켜주지만,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구매력은 지켜주지 못한다.
3. 저축은 부의 축적 수단이 아니라, 투자를 위한 종잣돈 마련과 유동성 확보의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