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은 어떻게 돈을 만들어내는가?
잠시 스마트폰을 켜고 은행 앱에 들어가 보자. 증권 앱도 좋다. 로그인하면 화면 상단에 숫자가 보일 것이다. 우리는 이 숫자를 보며 때로는 안도감을, 때로는 불안감을 느낀다. 그리고는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카드 한 장을 건네며 이렇게 생각한다. '여기서 얼마만큼 빠져나가겠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화면에 표시되는 이 돈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은행 지하 금고에 당신의 이름이 적힌 현금 상자가 따로 보관되어 있을까? 아니다. 당신의 돈은 그저 은행 전산망 서버에 기록된 디지털 신호에 불과하다.
가끔 밤늦게 급하게 송금을 하려다 ‘은행 전산 점검 시간’이라는 팝업창에 막혀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짧은 10분 동안, 내 통장에 찍힌 수백만 원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내가 아무리 급해도 은행의 서버가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그 숫자는 그저 화면 속의 픽셀일 뿐이다.
우리는 고작 서버 속의 전자 신호를 늘리기 위해 매일 아침 출근하고 야근을 견디는 걸까? 도대체 무엇이 이 데이터 조각에 밥을 사 먹고 집을 살 수 있는 권능을 부여한 걸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돈이 눈에 보이는 물건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신용으로 진화해 온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아주 먼 옛날, 돈은 곧 금(Gold)이나 은(Silver)이었다. 금은 그 자체로 귀하고 아름다워서 누구나 갖고 싶어 했으므로 금화 1개는 어디서나 금화 1개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를 실물화폐라고 한다. 소재 가치와 화폐의 가치가 일치하던 시대였다. 종이돈이 처음 등장했을 때도 원칙은 같았다. 은행에 금을 맡기면 그 보관증으로 종이돈을 주었다. 언제든지 돈을 은행에 가져가면 다시 금으로 바꿔주겠다는 약속, 즉 ‘태환’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종이조각을 금처럼 여기고 사용했다.
하지만 자본주의 경제 규모가 폭발적으로 커지면서 문제가 생겼다. 물건을 사고파는 거래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금광에서 금을 캐내는 속도는 너무 느렸기 때문이다. 돈이 부족해 경제가 돌아가지 않게 되자 인류는 1971년(닉슨 쇼크)을 기점으로 대담한 결단을 내린다.
"이제부터 돈을 가져와도 금으로 바꿔주지 않습니다. 대신 국가가 법으로 이 돈의 가치를 보증하겠습니다."
이 순간, 돈은 금이라는 실물 가치의 제약에서 풀려나 오직 국가의 신용과 법에 의해 통용되는 명목화폐, 그중에서도 불환지폐가 되었다. 한국은행이 발간한 <경제금융용어 700선>에 따르면 불환지폐란 명목화폐의 하나로, 소재가치와는 상관없이 법률에 의해 강제 통용력이 부여된 화폐를 말한다.
이제 돈은 실체가 있는 물질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이자 믿음이 되었다. 우리가 스마트폰 속의 숫자를 신뢰하는 이유는 그 데이터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와 금융 시스템이 이 숫자의 가치를 보증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돈이 금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은 이제 마음만 먹으면(물론 물가 안정이라는 목표 아래 조절하지만) 돈을 무한정 찍어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시뇨리지(Seigniorage)라는 아주 매혹적인 경제 용어가 등장한다.
5만 원권 지폐 한 장을 만드는 원가는 약 100원 정도다. 하지만 이 종이가 중앙은행 문턱을 넘는 순간 5만 원의 가치를 가진다. 데이터로 돈을 만드는 비용은 심지어 0원에 가깝다. 중앙은행은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비용으로 돈을 찍어내어 시중에 유통하고 그만큼의 구매력을 행사한다.
이때 발생하는 차액, 즉 '화폐 액면가 - 제조비용'을 시뇨리지, 우리말로는 화폐주조차익이라고 부른다.(현대에는 중앙은행이 화폐를 발행해 국채 등을 매입하여 얻는 이자 수입을 포함한다.) 한국은행의 <경제금융용어 700선>에서는 이를 중앙은행이 독점적인 발권력을 이용하여 화폐를 발행함으로써 얻는 이익으로 정의한다.
과거 봉건 시대 영주(Seigneur)들이 화폐 발행권을 독점해 이익을 챙겼던 것에서 유래한 이 용어는 현대 자본주의의 핵심 동력을 설명해 준다. 우리는 5만 원을 벌기 위해 5만 원어치의 노동을 해야 하지만 국가는 그저 인쇄기를 돌리거나 엔터키를 누르는 것만으로 그 가치를 창출한다. 이것이 불공평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뇨리지가 있기에 국가는 세금만으로 감당하기 힘든 대규모 재정 사업을 벌이거나,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듯 유동성을 공급해 급한 불을 끌 수 있다.
그렇다면 중앙은행이 찍어낸(혹은 입력한) 돈은 어떻게 세상에 나올까? 한국은행이 발행하여 시중에 공급하는 돈을 본원통화라고 한다. 이 본원통화는 민간이 보유한 현금과 금융기관이 중앙은행에 맡겨둔 지급준비금의 합계로 구성된다. 중앙은행은 이 돈을 이용해 시중은행에 대출을 해주거나 정부가 발행한 채권(국채)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세상에 돈을 푼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현대 사회의 돈은 땅을 파서 나오는 자원이 아니다. 그것은 중앙은행이라는 거대한 권력 기관이 신용이라는 재료를 이용해 만들어낸 인공적인 산물이며 그 탄생 과정에서 발행자(국가)는 막대한 이익(시뇨리지)을, 사용자(국민)는 인플레이션이라는 비용을 분담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당신의 통장에 찍힌 숫자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와 당신 사이에 맺어진, 그리고 우리 모두가 동의한 거대하고 정교한 계약서이다.
<3줄 요약>
1. 과거의 돈은 금과 교환되는 보관증이었으나, 현대의 돈(불환지폐)은 국가의 법과 신용으로 가치가 보증되는 데이터 혹은 종이다.
2. 중앙은행은 화폐의 액면가와 제조비용의 차액인 시뇨리지(화폐주조차익)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고 이를 정책에 활용한다.
3. 중앙은행이 일차적으로 공급하는 돈을 본원통화라고 하며 이것이 자본주의 경제를 순환하는 혈액의 원천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