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화폐의 비밀
우리는 흔히 은행을 돈을 안전하게 보관해 주는 금고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은행이 A가 맡긴 예금을 잠시 보관했다가 돈이 필요한 B에게 대출해 준다고 믿는다. 즉, 누군가 저축을 해야만 대출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반만 맞는 이야기다. 자본주의 금융 시스템의 진짜 비밀은 은행이 단순히 돈을 중개하는 것이 아니라 없던 돈을 복사해서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 사실 은행은 돈을 보관하는 금고가 아니라 돈을 찍어내는 공장에 가깝다. 이처럼 은행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돈의 양을 늘리는 과정을 경제학 용어로 신용창조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화려한 마법을 통해 만들어진 돈을 부르는 다른 이름은 빚이라는 그림자다.
한국은행이 100억 원의 현금(지폐)을 발행해 시중은행에 공급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 돈을 본원통화라고 한다. 본원통화는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통해 직접 공급한 일차적 화폐로, 민간 보유 현금(화폐발행액)과 시중은행의 지급준비금(중앙은행 예치금)의 합과 같다. 이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진짜 돈이다.
그런데 은행은 이 100억 원을 금고에 그대로 넣어두지 않는다. 은행은 예금자가 갑자기 돈을 찾으러 올 때를 대비해 법적으로 정해진 최소한의 비율, 즉 지급준비율만큼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시 대출해 줄 수 있다.
만약 지급준비율이 10%라면 은행은 10억 원만 남기고 나머지 90억 원을 A라는 사람에게 대출해 준다. A는 이 돈을 B에게 물품 대금으로 지불하고 B는 받은 90억 원을 다시 자신의 주거래 은행에 예금한다.
이제 은행에는 90억 원이 예금으로 들어왔다. 은행은 다시 이 돈의 10%(9억 원)를 남기고 나머지 81억 원을 또 다른 사람에게 대출해 준다. 이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면 처음에 중앙은행이 공급한 100억 원은 시중에서 1,000억 원 가까운 돈으로 불어난다. 이 불어난 돈을 파생통화라고 한다.
이렇게 은행이 대출과 예금을 반복하며 통화량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리는 과정을 신용창조라고 한다. 우리가 시중에서 "돈이 많이 풀렸다"라고 할 때의 돈은 중앙은행이 찍어낸 돈이 아니라 은행이 대출 버튼을 눌러 만들어낸 이 숫자들이 대부분이다.
미국의 사업가이자 유명 투자자인 레이 달리오(Ray Dalio)는 그의 저서 <금융 위기 템플릿(Big Debt Crises)>에서 "사람들이 돈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대부분은 사실 돈이 아니라 신용이다"라고 지적한다.
앞선 예시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현금(본원통화)은 처음에 투입된 100억 원뿐이다. 나머지 900억 원은 전산망 서버에만 존재하는 디지털 숫자이자 누군가가 갚아야 할 빚이다. 우리가 "내 통장에 1억 원이 있다"라고 말할 때, 그 1억 원은 은행 금고에 있는 현찰이 아니라 은행이 나에게 주기로 한 약속이자 누군가가 은행에 갚아야 할 빚이 돌고 돌아서 찍힌 숫자일 뿐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경제가 팽창하는 원리다. 실물 경제가 성장하지 않아도 대출(신용)이 늘어나면 돈의 양은 늘어난다. 반대로 사람들이 빚을 갚기 시작하면 시중의 돈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신용카드를 긁으면 구매력이 생기지만(돈이 생김) 카드값을 갚으면 그 구매력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빚은 나쁜 것이니 빨리 갚아야 한다"라는 말은 개인에게는 진리일지 몰라도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로 보면 재앙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이 빚을 갚아버리면 은행의 신용창조 기능이 멈추고 시중에 돈이 말라버리기 때문이다. 돈이 없으면 소비가 줄고, 기업은 파산하며, 경제는 공황 상태에 빠진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빚을 권하는 사회다. 빚이 계속 늘어나야만(누군가 계속 대출을 받아야만) 시스템이 굴러가고 경제가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통화량의 대부분이 빚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자를 갚기 위해서라도 돈의 양은 계속 늘어나야 한다.
당신의 통장에 찍힌 숫자는 온전히 당신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금융 시스템이 빚을 통해 쌓아 올린 신용의 탑, 그 한 층을 차지하고 있는 벽돌일 뿐이다. 이 구조를 이해해야만 우리는 비로소 대출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이용해야 할 도구(레버리지)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물론 모든 도구가 그렇듯 위험은 따른다. 잘 쓰면 내 힘을 증폭시키는 지렛대가 되지만 잘못 다루면 나를 베어버리는 흉기가 되기 때문이다. 빚을 능력으로 만드는 것과 파산으로 만드는 것의 차이는 결국 그 돈을 통제할 수 있는 당신의 금융 지식과 상환 능력에 달려 있다.
<3줄 요약>
1. 은행은 예금 중 일부(지급준비금)만 남기고 대출해 주는 과정을 반복해 시중 통화량을 늘리는데, 이를 신용창조라고 한다.
2. 시중에 돌아다니는 돈의 대부분은 중앙은행이 찍어낸 진짜 돈(본원통화)이 아니라, 은행이 빚으로 만들어낸 신용화폐다.
3. 자본주의 시스템은 구조적으로 빚(신용)이 늘어나야 돈이 생기고 경제가 굴러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바다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물, 즉 돈을 분석해 보았다. 아마 이 과정을 통해 당신이 그동안 믿어왔던 상식들이 조금은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파트 2에서도 세 가지 진실을 마주했다. 첫째,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돈은 금이나 은 같은 실물이 아니라, 국가가 보증하는 신용이자 종이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 둘째, 이 돈은 가만히 두면 시간이 지날수록 녹아내리는 얼음과 같아서, 현금을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구매력을 잃게 된다는 것. 셋째, 시중에 돌아다니는 돈의 대부분은 중앙은행이 찍어낸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빚을 질 때 컴퓨터 화면상에서 만들어진 가짜 돈(신용화폐)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허무함을 느낄 수도 있다. 내가 뼈 빠지게 일해서 번 돈이 고작 빚의 그림자라니. 하지만 이 허무함은 건강한 허무함이다. 돈을 맹목적인 숭배의 대상에서 냉정하게 이용해야 할 수단으로 끌어내렸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돈을 바라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 돈은 목적이 아니다. 돈은 자산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자, 타인의 노동력을 내 것으로 치환할 수 있는 교환권이다. 이 교환권은 유효기간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유효기간이 지나기 전에 이 교환권을 영원히 가치가 보존되거나 불어나는 자산으로 부지런히 바꿔야 한다.
[삽화 가이드: 한 사람이 안경을 쓰고 5만 원권 지폐를 바라보고 있다. 안경을 쓰기 전에는 평범한 신사임당 초상화였지만, 안경 너머로 보이는 지폐에는 'DEBT(빚)'와 'TRUST(신용)'라는 글자가 디지털 코드로 흘러내리고 있다.]
돈의 정체를 알았으니, 이제는 돈이 흘러 다니는 길목을 지키고 있는 거인들을 만날 차례다. 바로 은행이다.
우리는 은행을 공공기관처럼 생각하고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하지만 은행은 철저하게 이익을 추구하는 사기업이며,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가장 강력한 권한인 돈을 불리는 마법(신용창조)을 독점하고 있는 존재다.
이어지는 PART 3에서는 은행이 당신의 돈을 어떻게 다루는지, 그들이 만든 ‘대출’이라는 상품이 나를 들어 올려줄 지렛대인지 아닌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냉혹한 규칙에 대해 파헤쳐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