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남자와 결혼한 이래로 근 10년간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었다. 일단 애가 셋이나 태어났다! 애엄마로 새로 태어난 나는 직장을 송두리째 바꿔야 했으며, 그마저도 육아휴직을 4년째인가, 5년째인가 하고 있다(얼마나 했는지 헷갈린다, 서류를 떼어봐야 정확히 안다)! 남편은 직장은 안 바꿨는데, 대신 육아휴직을 4년째 하고 있다. 이사는 세번을 했는데, 둘째 태어나면서 집을 샀다. 다 쓰러져 가는 시골 촌집. 왜 시골촌집을 샀느냐고? 사람들은 우리가 원대한 뜻이 있는줄 아는데, 그런거 없다. 단지 외국인 남편이 땅욕심이 있어서 죽어도 토지 지분이 얼마 안되는 아파트는 안산다 했다. 결국 우리 가진 돈으로는 이것밖에 못샀다. 남편과 내가 20대 청춘을 중국에서 외국인노동자로 타향살이하며 고이고이 모은 돈으로 살 수 있는 집은 이 정도밖에 안됐다. 아무도 오지 않은 깊은 마을에 있는 촌집 말이다.
원래 집은 대출로 사는거 아닌가요, 원래 집의 지분 절반은 은행 집이에요, 사람들이 웃으며 묻는다. 그런데 우리같은 국제 커플에게는 해당이 안 되었다. 남편은 외국인이라 한국에서 일단 대출 자체가 안 되었다. 결국 나밖에 대출낼 사람이 없는데 나는 20대 내내 중국에서 일하다 왔기 때문에 한국에 이렇다할 신용 자체가 없었다. 게다가 이 시골촌집은 아파트처럼 담보대출도 안된다 했다. 감정가 자체가 없고, 감정도 안한다 했다. 땅 담보를 잡아서 대출을 낼 수는 있는데, 시골땅이라 공시지가 자체도 너무 낮아 얼마 안된다 했다. 결국 내 직업을 어필하여 겨우 신용대출 약간 더해서 중국에서 일하며 모은 현금 생돈을 주고 이 집을 샀다. 그 와중에 집은 공동명의를 했다. 나와 남편이 뼈와 살을 갈아서 벌어온 돈을 합쳐 산 것이었으므로. 결혼하면서 맞춘 커플도장을 써먹을 때가 없었는데 집을 사면서 계약서 공동명의할 때 쓰임새를 톡톡히 발휘했다. 기분이 묘했다. 결혼식에서 혼인서약을 하고, 시청에서 혼인신고를 했어도, 집 사서 공동명의할 때만큼 진지하지는 않았던 듯 하다.
우리는 지난 10년을 한국에서만 살았다. 그래서 한국말을 못하는 벙어리 외국인 남편에게 나는 귀와 입이 기꺼이 되어 주었다. 처음에는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서, 사랑만 믿고 이 외딴 나라로 와준 남편을 위해서 응당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짜증이 스물스물 올라올 때가 많았다. 그 10년 중에 아이 셋을 임신하고, 낳고, 모유수유하며 키워가면서(현재진행형) 거기에 더해서 남편의 귀와 입이 되어야 하는 것은 극한체험이었다! 남편의 귀와 입이 되어주려고 동행하려면 애들까지 줄줄이 달고 다녀야 했으니. 누가 보면 흥부네가 따로 없었다. 심지어 애를 낳으러 가서 분만실에 같이 들어온 남편에게 진통으로 괴로워하면서도 그 와중에 내가 일일이 간호사와 의사의 지시를 남편에게 통역해 주던 모습은 서러우면서도 웃기기도 하고 슬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내 처지가 소년소녀가장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말못하지만 불평불만 투성이인 외국인 남편을 비롯하여 아이 셋이 줄줄이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의 가부장제를 흔히들 비판하지만 가끔은 나는 한국의 평범한 여자들이 가끔은 부러웠다. 내가 사회적 기반이 어느정도 잡혀있는 연상의 한국 남자와 결혼했더라면 남편에게 "오빠"라고 부르며 흔히 말하는 애교도 부려보고, "나는 모르니까 오빠가 알아서 해줘잉"하면서 대출이고, 건강보험이고, 각종 세금이고, 연말정산, 비자 문제 등등 머리 아픈 문제는 남편 그늘 아래 숨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외국인 남편과 결혼한 나는 일절 해당사항 없었다. 나는 집안 경제를 골똘히 고민하고 막중한 책임을 느끼며 아이셋과 덩치는 다 컸지만 말못하는 어른 한명까지 돌보는 우직한 가장이 되어야 했다!
남편 나라로 돌아간다면 반대의 상황이 되겠지. 아무튼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 멋모르고 외국인과 젊은 시절 불같은 사랑과 연애 끝에 한 결혼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 실제 같이 산건 10년밖에 안되는데 왠지 30년쯤 된 것 같다. 지난 10년간 하도 많은 일을 바삐 치르느라 혼이 빠졌다. 앞으로는 좀 평탄하게 지내고 싶은 소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