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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리 Jan 27. 2024

긴 생머리 로망


돌이켜보면 4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긴 생머리였던 적이 별로 없다.


초등 때는 엄마가 머리 길면 키 안 큰다고 해서 묶일 정도로만 해서 단정한 단발로 지냈다. 중고등학교 때는 교복 입고 귀밑 몇 센치 단발머리 이런 교칙이 있었기 때문에 기르지를 못했다. 특히 고등학생 때는 나름 반항적인 기질이 셌기 때문에 교복도 치마 대신 바지를 입고 다니고 머리도 남자처럼 커트를 하고 다녔다. 대학교 때도 짧은 머리였는데 대신 머리에 물을 많이 들였다. 빨간색, 노란색 등등. 그러다가 대학교 2학년 때 취미로 댄스를 배우게 되었는데 춤출때 긴 머리를 휘날리는 동작이 많다보니 기르게 되었다. 나름 댄스에 심취해서 2년 정도 신나게 배웠다.


그 즈음에 우리 남편(당시에는 남자친구)을 만났다. 남편과 만난지 얼마 안되어 우연히 찍힌 사진을 보면 나는 긴 생머리를 휘날리고 있다. 그 옆에 입 헤벌레 하고 그저 웃는 귀여운 젊은 남편이 있다.


댄스를 그만두면서부터 다시 단발로 돌아갔다. 단발에 익숙해지고 나면 이만큼 편한게 없다. 일단, 엄청나게 가벼워진다. 중력 때문에 항상 달고 다녀야 하는 머리카락 무게가 상당하다. 머리 감는데 샴푸도 훨씬 적게 든다. 머리 말리는 시간도 절약된다. 수건으로 몇번 털면 끝. 남자들 군대 갔을 때랑 비슷할 거다.


하지만 우리 남편은 내가 미용실에 가서 짝뚝 잘라올 때마다 한없이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남편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는 거야? 내 긴 머리를 사랑하는 거야?"

"당연히 너를 사랑하지."

"그럼 내가 머리가 있든, 없든 변함없이 사랑을 해야될 것 아니야."

"그럼! 나는 항상 자기를 사랑하지."

"그래, 그럼 내가 삭발을 해도 사랑할거지?"

"응 그럼. 그런데 그렇다고 일부러 삭발은 하지 마."


그 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남편에게 긴 생머리가 어떤 의미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내 편한대로 단발을 하고 다녔다. 그때는 모든 것이 내 위주로만 보이던 20대였으므로.


그러다가 프랑스에 왔는데 미용실이 너무 비싸서 머리를 자를래야 자를 수가 없었다. 커트만 하는데도 최소 6만원은 더 줘야 한다! 게다가 10분도 안 걸려서 성의 없이 일자로 딱 잘라 놓는다. 애들하고 머리 한번 자르러 갔다가 기겁을 했다. 그것도 한참 전에 예약을 하고 가야 한다.


아무튼 그래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다니게 되었다. 가난한 흥부네 가족인데, 밥도 겨우 먹고 사는데, 머리를 그 가격 주고 자르는 건 사치다!


그런데 프랑스 친구들이 내 긴 생머리를 만져보며 진심으로 감탄을 한다. 어쩜 머리가 이렇게 검정색이고 곧고 찰랑거리냐고.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고 건성으로 넘겼다. 한번은 한국에 다녀올 일이 있어서 가자마자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확 자르고 파마를 하고 왔더니,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 아름다운 머리를 왜 이 모양으로 만들어놨냐며, 나보다 자기네들이 더 화가 났다.


알고보니, 프랑스 사람들은 긴 검은 생머리에 로망이 컸다. 우리는 웨이브진 금발머리에 로망이 있는데 말이다. 특히 흑인들은 남녀노소 머리가 두피에 딱 붙어서 구불구불하게 나기 때문에, 흑인 여자들은 대부분 가발을 쓰고 다닌다. 가발 중에 긴 검은 생머리를 쓰고 다니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나보고 머리를 자르게 되면 자기한테 꼭 달라고, 내 머리로 가발을 만들어 쓰고 다닐 거라 했다. 가발이 엄청나게 비싸다고 했다. 으악, 내 머리를 남이 가발로 쓰고 다닌다니, 생각만 해도 해괴망측하다. 그러고보면 사람들은 자기한테 없는 것을 추구한다. 영원히 만족을 모르는 미련한 인간들이여.  


그래서 돈 드는 것도 아니니, 검은 긴 생머리를 풀어헤치고 다닌다. 둘째딸 공주는 엄마 공주 같다며 예쁘다고 난리났다. 남편에게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옛날 댄스 동작 실룩실룩하며 윙크 한번 해 준다. 남편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이게 뭣이라고. 어차피 서로 늙어가는 처지에 돈 안 드는 거야 기꺼이 해 드리리라.


한국에서 나이 40 먹은 애가 셋이나 줄줄이 달린 아줌마가 이러고 다니면 욕 먹을 것이다. 나이 값도 못하고 칠칠맞게 왜 저러고 다니냐며. "머리를 자르든지, 파마를 하든지, 묶든지, 그러고 다니지 말고 뭐라도 해라!"라고 호통치는 우리 친정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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