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20일
죽은 아네스의 얼굴
빨간 날(주말)에는 종종 도하와 카페에서 여가시간을 보낸다. 도하는 나와의 약속대로 얼른 수학과 체스 숙제를 끝내고 핸드폰 게임을 하고, 나는 서동욱의 『타자철학』을 읽고 있다. 꽤 두꺼운 책인데 완독을 기대하진 않지만 꽉 막혀 있는 듯한 요즘의 작업에 대해 변환점을 찾을수 있을까 싶어 도서관에서 빌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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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0
쿤데라의 소설 ‘불멸’을 보자. 사고로 죽은 아내 아네스 앞으로 다가가 폴은 생각에 빠진다.
일생의 부부 생활을 통해서, 한 번도 그녀가 진정으로 그의 것이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한 번도 그녀를 가진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창백하고 아름다운, 그러나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 두 입술은 여전히 평화로웠으나 그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선을 하나 그리고 있었다. 그는 그 표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여기에서 폴은 ‘이질적인 것과의 조우’를 체험하고 있다. 아네스는 일생 동안 폴이 가져본 적이 없는 자, 소유에 저항하는 자이다. 그리고 그녀가 폴에게 마지막 남기고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것, 즉 ‘이해의 실패’속에서 출현하고 있는 표정이다. 주체가 타자를 지배하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는 ‘이해’로부터 아네스는 달아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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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아내는 남편을 향해서가 아니라 다른 곳을 보며 미소를 띠고 있으며, 그 미소는 남편의 이해를 벗어나 있다. 이것은 하나의 실패 또는 비극일까? 주체의 소유라는 관점에서는 그러하다. 이질적인 자는 영원히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다. 성격이나 가치관이 달라서 서로 잘 맞지 않는다는 식의 문제가 아니라, 오로지 서로 다른 자라는 이타성 하나 때문에 타자는 주체와 합치될 수도 없고 이해될 수도 없는 고유한 영역을 가진다. 다시 말해 폴과 아네스의 사이가 좋았으면 폴은 아내를 이해할 수 있었을, 그런 종류의 문제와 이 상황은 상관이 없다. 폴의 실패는 타자와의 관계 안에 어디에나 스며 있는 근본적인 것이다. 이 실패의 기원은 다른 무엇도 아닌 이타성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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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주침은 침입이다. 그것은 개념을 통해서든 실용적인 방식으로든 타자를 자신의 세계 안에 위치시킬 준비가 된 주체가 타자를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에 대한 타자의 돌연한 침입이며 주체의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일이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흔적」에서 타자의 도래를 ‘내재성의 교란’이라고 묘사한다. “[타자의]얼굴의 추상성은 내재성을 교란한다.” 주체가 자신의 손익을 셈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의 킉나 깊이를 계산할 수 있으며, 자신의 정원처럼 꾸밀 수 있는 영역, 담장을 쌓고 자신의 것으로 영위할 수 있는 영역이 주체의 내재성이다. 바로 그 내재성을 교란하는 것이 타자의 도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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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작업 소개를 할 때 타자와의 관계성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늘 얼굴을 그리는데 요즘 한창 얼굴에 대해 고민 중이다. 폴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죽은 아네스의 얼굴이 눈 앞에 어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