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출근길 발을 축축이 적시는 장마와 함께 숨이 턱턱 막히도록 더운 날이 찾아오고 있다. 극도로 벌레를 무서워하고 더위에 약한 내게 여름은 언제나 피하고픈 계절이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이마 위로 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날씨에는 시원한 선풍기 바람과 아이스크림이 절실하다.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달래어줄 달콤하고 부드러운 그것.
대학 친구들과 함께 간 경주 여행에서 큰 컵 가득 구슬 아이스크림을 담아 파는 걸 발견했다. 아쉬울 거 없이 그득하게 담겨있는 그 아이스크림을 사람들은 '어른의 맛'이라고 불렀다. 더 이상 몸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하게 할 어른이 주변에 없고, 돈을 지불하면 먹고 싶은 만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리라. 아이스크림 컵의 크기는 손바닥만 한 크기부터 테이크아웃 커피잔 크기만큼 다양했고, 2가지부터 8가지 종류의 맛을 담을 수 있었다. 친구들과 머리를 맞대어 무슨 맛을 먹을지, 어느 사이즈를 먹을지 고민하다가 4가지 종류를 먹기로 했다. 물론 1인 1컵이었다.
5분 정도 기다린 끝에 층층이 구슬 아이스크림이 쌓인 컵을 받았다. 어린 내게 구슬 아이스크림은 매우 비싸서 자주 먹지 못하는 음식이었다. 일주일 용돈이 500원, 1000원일 때는 사 먹을 꿈도 쉽사리 꾸지 못했다. 보통은 소풍 가는 날 엄마가 용돈을 쥐어줄 때나 엄마아빠와 나들이를 가게 되면 겨우겨우 하나씩 먹곤 했다. 특히 엄마와 아빠는 통통했던 내게 살이 찐다는 이유로 아이스크림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편이었다. 마음 같아선 양껏 사주고 싶지만 살이 찌니 안된다는 거였다.
이제 내 몸의 책임자는 나이고, 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걸로 무어라 말을 할 사람은 없었다.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컵이 아니라 어른인 내 손을 꽉 채우는 컵을 쥔 채 아이스크림을 퍼먹는 기분은 짜릿했다. 몇 스푼 뜨고 나면 바닥을 보이는 게 아니라 새로운 맛이 나타나는 기분도 끝내줬다. 숟가락 가득 담아 입에 넣으면 아이스크림 알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가 부드럽게 녹아 우유맛이 입 안으로 퍼졌다. 후식으로 완벽했다.'어른의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었다.
아이스크림 컵은 쉽게 바닥을 보였다. 녹아서 끈적하게 남은 잔해를 숟가락으로 몇 번 휘적이다가 미련 없이 먹는 걸 관뒀다. 쩝. 맛있게 먹고 나서 할 말은 아니지만 워터파크나 소풍지, 공원에서 사 먹은 구슬 아이스크림보다 덜 맛있는 느낌이었다. 짜릿함을 느끼는 감각기관이 달랐다고 할까. 커피를 충분히 담을 수 있을만한 크기에 담긴 아이스크림은 내게 시각적인 충족감을 주었지만 맛있다는 평가 외에 나오는 말이 없었다. 그득하게 쌓인 아이스크림을 보며 신이 나서 사진을 찍었지만 이후엔 아무렇지 않게 아이스크림을 퍼먹었다. 여느 후식을 먹듯이.
그건 머리를 축축이 적신 채로 워터파크에서 구슬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는 달랐다. 유난히 빨리 녹는 탓에 아껴먹지도 못해 발을 동동 굴리면서 아이스크림 한 알 한 알을 음미할 때와 다른 식사의 형태였다. 어릴 때 나는 동그랗고 작은 알갱이 모양을 한 구슬 아이스크림이 너무 맛있어서 혼자 감격하며 먹었다. 한 스푼 한 스푼이 행복이었다. 구슬 아이스크림을 잔뜩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쌓여있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나를 상상하기도 했다. 어릴 때 상상한 아이스크림을 실컷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 중 하나였는데, 막상 되고 보니 별 게 없었다.
'인생이란 괴로움의 연속이고, 행복은 광고처럼 짧다.' 가끔씩 보던 TV쇼에서 들은 뒤 자주 되새기는 문장 중 하나다. 어쩌면 인간은 아쉬움을 기반으로 행복을 느끼게 설계된 게 아닐까? 그래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조차도 산처럼 쌓여있는 걸 잔뜩 퍼먹는 게 아니라, 부족한 용돈을 긁어모아 겨우 먹은 게 훨씬 더 감동적인 게 아닐까?
나는 내가 갖지 못한 걸 가진 사람을 부러워한다. 쉽게 예민해지고 욱하는 탓에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여유 있는 사람이 부럽다. 뛰어난 그림 솜씨를 가지고 있다거나 수려한 말솜씨나 문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부럽다. 고집마저도 매력적인 사람, 의견을 뚜렷하고 말할 줄 아는 사람, 세심하고 다정한 사람, 쉽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람. 많은 사람이 있는 만큼 아름다운 재능을 가지고 빛나는 사람도 많아서, 그런 사람들을 보다 보면 내가 가지지 못한 것과 비교하며 나도 모르게 작아진다.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건 아니다. 그들의 재능과 매력, 사랑스러움은 인정받아 마땅하니까. 다만 부러워지는 것뿐이다. 나도 그러고 싶어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행복해하는 과정과 삶을 살아가는 건 비슷할 지도 모르겠다. 하나에 2천 원에 육박했던 비싼 행복을 구매하기 위해 당장 먹고 싶은 쫀듸기, 불량 식품을 참았던 나의 유년기처럼. 내일 2개의 마시멜로우를 먹기 위해 당장의 쾌락을 참는 사람들처럼. 당장의 휴식을 참고 더 큰 미래를 위해 나아가는 사람들. 나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
부러워하면 변화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를 움직이는 것뿐이다.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장점을 붙들고 지난한 고생길을 걷다 보면 달콤한 보상이 주어지리라. 짧은 광고와 같은 행복을 이정표 삼아 꾸준하게 걸어가다 보면 언젠가 '어른의 맛'을 기꺼이 지불할 수 있는 성숙한 인간이 되어있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도 글을 쓴다. 내 이야기를 하는 건 언제나 민낯을 보여주는 것처럼 부끄럽고, 창피하지만, 하지 않는 것보단 하는 게 뭐라도 만들어낸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꾸준함이 가져다주는 변화를 믿는다. 처음 구슬 아이스크림을 먹었을 때의 짜릿함과 같은 일을 인생에서 만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더라도. 그냥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