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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비 May 06. 2022

생일상 차리기

혀로 배운 엄마의 마음을 손으로 풀어낸다, 눈썰미는 거들 뿐.

내일은 하나뿐인 딸아이의 다섯 번째 생일이다. 유치원에 보낼 케이크 두 개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초콜릿 케이크와 블루베리 케이크로 골라 지난 주에 일찌감치 주문했다. 생일날 저녁엔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케이크에 촛불을 꽂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야 하니, 작년에 딸아이가 잘 먹던 우리 지역 명물 딸기케이크도 내일 퇴근길에 가져가겠노라 주문했다. 생일 선물은 남편에게 맡겼다. 그가 반차를 내고 유치원에서 아이를 1등으로 데리고 나와 생일 선물로 점찍어둔 자전거를 사러 가기로 했다. 


아차, 생일 아침상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마트 앱을 켰다. 미역은 냉동실에 있으니 미역국에 넣을 재료와 딸아이가 좋아할 반찬들을 떠올려 본다. 브로콜리무침은 어제 해 줬으니 글렀다. 짜장면을 아침상에 내놓을 순 없으니 그것도 안 되겠다. 냉장고 속에 굴러다니는 것들도 함께 떠올려 본다. 냉동실에 비비고 잡채밀키트가 있으니 잡채를 해야겠다. 저 좋아하는 파프리카도 굴러다니고 있으니 시금치 대신 같이 썰어넣으면 더 풍성해질 것이다. 저녁에 스테이크를 주문할 테니 굳이 소고기를 구워줄 필요는 없다. 대신 미역국에 쇠고기를 넣자. 중량이 제일 적은 한우등심 한 팩을 장바구니에 넣는다. 소고기를 굽는 대신 저 좋아하는 생선구이를 해야지. 아, 그런데 오늘 저녁에 생선구이 해 주기로 했는데... 그럼 오늘 저녁은 짜장면으로 때우자. 마침 나도 모임이 있어 바쁜데 잘 되었다. 코로나로 한창 온 가족이 골골거릴 때 친정 엄마가 보내주신 갈치 한 마리를 토막씩 소분해 냉동실에 넣어 두었는데 딱 한 토막이 남아 있다. 그걸 구워야지. 요즘 딸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계란 후라이도 해야지. 아침마다 내놓은 과일은 새로 사려니 (조금씩 상해 가긴 하지만) 냉장고에 너무 많다. 딸기와 블루베리는 특히 상태가 안 좋은데 어쩌나. 과일들을 조금씩 깍둑썰고 꿀로 버무려 주면 그럴듯할 것 같다. 짜요짜요를 버무리면 더 맛있겠지만 때깔이 영... 생일상인데 보기에도 좋아야지. 그래도 뭔가 마음이 아쉬워서 새우도 같이 장바구니에 담는다. 시간도 부족하고, 이미 생각해 둔 반찬들로도 충분할 것 같지만, 물에 씻어서 찜기에 넣으면 되겠지? 별 것도 없는 생일상 차림을 그새 잊을까 두려워 카카오톡을 열어 나에게 메모를 보낸다. 배달 시간이 오후 4시에서 8시 사이란다. 일찍 도착한다면 저녁 모임을 위해 집을 나서기 전 어떻게든 준비를 해 둘 수 있을 것 같다. 안 되면 모두가 자는 밤중이나 새벽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해야겠지만.


4시 20분이 되기 전 퇴근 준비를 하려는데 문자메시지가 온다. 한우등심이 품절이라 나머지 것들만 곧 배송 예정이란다. 이런! 미역국 재료를 어쩌지. 새우찜을 포기하고 미역국에 넣을까? (딸아이가 새우를 좋아한다.) 냉동실에 호주산 척아이롤 한 덩어리가 굴러다니고 있다! 에라 모르겠다. 퇴근길에 유치원에서 데리고 함께 하원한 딸아이와 집에 도착하자마자 냉동실에 처박힌 소고기 한 덩이와 갈치 한 토막을 냉장실로 보냈다. 적어도 12시간 후에 끓일 미역도 미리 물을 부어 뚜껑을 덮은 후 냉장실로 보낸다. 쌀도 오래 불릴 수록 맛날테니 마찬가지로 내솥 째로 냉장실로 보냈다. 반찬통에 키친타월을 깔고 노랑, 주황, 빨강으로 예쁘게 채 썬 파프리카와 당근을 나란히 담아 마찬가지로 냉장실에 얌전히 모셔 두었다. 씻은 딸기와 키위의 물기를 뻬 작게 깍둑썰고, 블루베리도 깨끗이 씻어 물기를 빼 그 옆에 모셔 두었다. 


밀키트 유니 짜장을 뜯어 후루룩 저녁 식사를 준비한 후 딸아이에게 저녁 먹자고 이야기하니 짜장면을 계란 후라이 만큼이나 좋아하는 딸아이는 식탁에 앉기도 전에 신이 났다. 볼록한 두 뺨이 온통 얼룩덜룩해지도록 맹렬히 짜장면을 흡입하는 딸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내일 아침 기상 알람 시간을 다섯시 사십분으로 당겨 맞추었다. (원래는 여섯시 십분이다.) 이렇게 대충 차린 짜장면을 이토록 신나게 잘 먹어주는 딸아이 덕분에 오늘 모임에 다녀 온 후 뭘 더 준비할 필요는 없겠다. 다행이다.


정신없긴 했지만 맹렬하게 준비한 덕분에 계획대로 다섯시 사십분에 일어나 일곱시가 되기 전에 딸아이의 아침 생일상을 차릴 수 있었다. 하얀 쌀밥, 고기를 볶아 넣은 미역국, 노릇한 갈치구이, 알록달록한 색깔이 예쁜 잡채, 먹기 좋게 자른 계란 후라이, 달콤한 과일 꿀버무리. (새우찜은 새까맣게 잊었으나 접시를 다 채웠으니 되었다.) 제 생일날이라 온통 설렜을 딸아이는 일곱 시가 되기 전에 가뿐하게 일어나 연신 "내가 좋아하는 잡채!", "내가 좋아하는 갈치!" "내가 좋아하는 계란 후라이!", "내가 좋아하는 생선!"을 외치며 수라상만 못하지만 임금님보다는 행복하게 아침상을 받는다. 곧 출근을 해야 되서 함께 아침은 들지 못하고 잡채를 후룩후룩 넘기기 시작하는 딸아이에게 바싹 붙어 머리를 묶어 주면서도 진동하는 고소한 냄새를 맡으니 함께 아침을 들고 있는 것만 같다.


어린 시절부터 아침 생일상으로 늘 고기나 생선 구이와 미역국, 정갈한 밑반찬 몇 가지를 함께 받아 먹던 습관이 이제는 틀에 박힌 생일상 차리는 습관으로 슬그머니 자리를 바꾸었다. 친정 어머니께 직접 미역국 만드는 방법이나 생선 굽는 방법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내 기억 속의 그 맛이나 우리 딸아이가 지금 꼭꼭 씹으며 느낄 맛이 다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분을 낸다곤 하지만 저녁도 외식으로 때우고, 풍성하게 차려 준다지만 늘 렌지에 데핀 밥과 반찬만 차려 준다. 아이는 서운한 기색도 없는데 괜히 미안하고, 그걸 또 잘 먹어주니 고마운 마음을 이렇게나마 표해야겠다. 생일 축하한다.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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