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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비 Apr 19. 2022

내 새끼 입에 밥 넣기

우리가 평생 모를 엄마의 행복

딸아이의 48개월 전 영유아검진을 위해 아동병원에 들렀다. 키 88%, 체중 85%로 이전보다 수치는 조금 줄었지만 아이는 여전히 또래에 비해 체격이 월등히 컸다. 지난 번 검사 때는 키가 체중보다 10% 정도 컸는데 이번에는 그 차이가 대폭 줄었다. 아니나 다를까 의사 선생님이 이제부터는 과체중이 되지 않도록 밥을 한 숟가락 정도는 적게 주라고 한다. 입 짧은 아이에게 밥을 한 숟가락 더 먹이는 것도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잘 먹는 아이에게 밥을 한 숟가락 적게 주는 것은 어렵다 못해 가혹하다. 이제 막 취사가 완료되었다는 신호음을 듣고 밥솥을 열어 주걱으로 갓 지은 밥을 풀 때 올라오는 구수함과 윤기와 벌써 입 안에서 맴도는 새하얀 감칠맛을 한 숟가락이라도 더 주지는 못할망정 적게 주라고요? 선생님이 사람이라면 내 새끼 밥을 그렇게 정나미 떨어지게 풀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그날 저녁만큼은 눈물을 머금고 아이 숟가락 기준으로 한 숟가락 정도는 밥을 적게 펐다. 아이는 밥이 적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그릇 째 싹싹 긁어 먹고는 빈 그릇 한 번, 내 얼굴을 한 번 본다. 밥솥이 텅 비어 더 줄 밥도 없다. 아직 다 먹지 못한 내 밥이 그나마 깨끗해 다행이다. 조심스레 밥알을 뒤적거려 젓가락이 닿지 않는 부분을 한 숟가락 덜어 준다. 이래서야 밥 한 숟가락 적게 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준 셈이다. 더 얻어먹은 밥도 순식간에 동났다. 아이는 여전히 아쉬운 얼굴로 식탁 의자에서 내려와 자리를 치우는 엄마 곁을 맴돈다. 해가 바뀌고 다섯 살이 되면서 아이는 식사 중에는 돌아다니지 않고 자리를 지키기로 약속했다. 자리를 뜨면 식사는 끝나는 것이며 바로 자리를 치운다. 더 이상 먹을 것을 주지 않음도 물론이다. 아이는 지루하거나 산만했다기보다는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 의자에서 내려왔을 터였다. 더 이상 아이의 통통한 볼과 측은한 눈빛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빈 그릇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밥풀과 양념이 묻은 입가며 쫄쫄이 내복으로 감싼 뱃살도 통통하다 못해 풍요롭다.


“밥을 다 먹긴 했는데, 뭔가 아쉬워요. 새콤달콤한 과일 하나 더 먹으면 참 좋겠어요.”


앵두보다 귀여운 입술을 오물거리며 조붓이 말하는 그 말투가 어쩜 이렇게도! 아이는 이미 냉장고 안에 귤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새콤한 귤보다도 달콤한 말에 홀딱 넘어가 냉장고를 열어 귤 두 개를 꺼내 주었다. 저녁 설거지를 마칠 동안 거실 탁자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얌전히 귤을 까먹는 아이의 모습만 봐도 침이 고이도록 새콤달콤하다. 귤을 너덧 개 더 담아 오려다 간신히 이성을 차리고 양치를 시켰다.


아이에게 좋은 것만 먹이고 싶고, 그게 좋은 거라면 더 좋은 부모 마음이야 장르를 가리지 않겠지만 그 중 제일은 역시 과일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첫 딸기가 나왔을 때는 아직 돌이 되지 않아 줄 수 없음을 몹시 아쉬워하면서도 부모가 맛보기엔 비싸다고 쳐다보지 않았다. 일 년이 지나고 다시 첫 딸기가 나오기를 기다려 한 통에 삼만 원이 넘는 것을 비싼 줄도 모르고 기뻐하며 사 왔으나, 아이는 강렬한 새콤함과 오돌토돌한 식감에 딸기를 거부했다. 비싸게 주고 샀다는 것은 새까맣게 잊고 이 귀하고 맛있는 것을 몰라주어 안타깝다 못해 슬플 지경이었다. 그랬던 슬픔도 무색하게 아이는 곧 내버려 두면 이틀에 한 통은 거덜 낼 정도로 딸기를 잘 먹었다. 지금이야 꼭지 째 주어도 잘만 먹지만 세 돌이 되기 전까지는 행여나 목에 걸릴까 딸기 한 알을 여덟 조각, 네 조각씩 잘라 먹였다. 새빨갛고 뾰족한 끝부분을 아이에게 주고 나면 흰색이 더 많은 밑동 부분은 부모 차지가 되었다. 딸기 밑동 부분에서 나는 하얀 맛은 몹시 낯설었다. 어렵던 시절 별미로 생무를 씹었다던 친정 부모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절로 떠오르는 맛이었지만 아이의 탐스러운 볼을 물들이며 풍기는 딸기 향만으로도 충분하다.


제철이 시작되어 첫물 과일이 나오면 아무리 비싸다 싶어도 일단 제 값을 다 치르고 사 와서 작게 조각내어 아이 입에 넣고 본다. 복숭아도, 수박도, 포도도 예외는 없다. 첫물이라 더욱 귀하고 달콤한 것이 우리 아이와 꼭 닮았다. 동그랗고 탐스럽고 윤기가 도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좋아하는 과일은 죄다 아이 입에 넣어주고, 아이가 좋아하지 않는 과일은 살 일이 없으니 부모는 자연히 과일과 멀어진다. 미처 아이가 다 먹지 못해 조금씩 무르기 시작하는 과일을 가끔 맛보며 원래는 참 맛있었을 것을 이렇게 될 때까지 먹이지 못해 아쉬워한다.


아이를 떠오르게 하는 것이 비단 첫물 과일 뿐만은 아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어린 아이를 키우고 있어 좀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내기 어려운 친구와 벼르고 별러 예약도 어려울 정도로 유명한 고급 초밥 식당에 갔다. 우리는 아주 오랜만에 수발 들 사람 없이 오로지 나만을 위한 호사스런 초밥을 여유롭게 만끽했다. 그러다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일본식 계란말이 한 조각을 오물거리며 친구와 나는 동시에 침울해졌다. 우리는 세상 진지한 얼굴로 요리사에게 나란히 이 계란말이만 따로 포장해 갈 수는 없는지, 이 계란말이는 어떻게 만드는지 물어 보았다. 우리 애가 계란말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만만하게 하는 반찬이 계란말인데 이런 식으로 만들어 볼 생각은 왜 못했을까, 이 계란말이 한 조각 입에 넣어주면 좋아 죽겠지, 안타까워 죽을 지경이 되어 우리는 식당에서 나왔다. 입에서 밥알 하나하나 생생히 구르며 숙성된 회와 함께 사르르 녹던 초밥을 느긋이 맛보는 것도 물론 행복했지만, 달콤하고 부드러운 계란말이를 바쁘게 오물거리는 내 새끼들의 입술을 보는 게 더 행복했을 것이다.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맛있는 음식을 손쉽게 사 먹을 수 있고, 그게 귀찮으면 집 앞까지 배달도 척척 해 주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매 끼니마다 그런 음식을 아이에게 줄 수는 없다. 부족한 음식 솜씨를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아이가 맛있게 밥을 먹었으면 좋겠다. 고된 하루가 끝난 후 스마트폰을 쥐고 소파에 드러누워 요리 유튜브 채널을 시청하고 맘카페 게시판을 들락거리다 괜찮은 레시피를 발견하면 스크린 샷을 날려 저장한다. 나만 유별나게 요리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다. 이십 년 전 함께 분식집을 누비던 추억을 뒤로하고 이제는 각자 엄마가 된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수다를 떨 때면 어김없이 괜찮은 반찬 레시피, 맛있는 양념장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게 틈틈이 모은 레시피를 가지고 시금치나 미나리, 대하나 전복 같은 어렵지만 싱싱한 제철 식재료를 사들고 아이들이 맛있게 먹기를 바라며 손맛을 내야만 하는 반찬을 만든다. 기름이 사방으로 튀고 설거지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칼날에 손가락을 베이고 손끝이 불에 데는 건 상관없다. 그렇게 만든 음식을 아이가 잘 먹으면 다행스럽고 기쁠 뿐이다. 다양한 식재료를 골고루 먹여야 하는 걸 알면서도, 아이가 저 좋아하는 밥상을 받아 신나게 오물거리는 모습을 떠올리다 보면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도 자연히 아이가 좋아하는 것들만 카트에 담는다. 고등어, 꼬치어묵, 브로콜리, 단호박, 콩나물, 당면, 비계가 적당히 섞인 삼겹살, 새우… 나는 운이 좋아 밥을 잘 먹는 아이를 만났다. 내 새끼 밥 먹는 것만 봐도 행복한데 그 밥을 맛있게 먹어 주는 행운까지 누렸다.


엄마가 음식 솜씨가 좋아 늘 호사스러운 밥상을 받으며 자라온 행운을 누린 이들은 결코 많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엄마들은 일에 치이고 잘 하지 못하는 요리에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때로 외식을 하거나 배달 주문 전화를 걸며 끼니라는 업보로부터 도망치기도 했다. 어떻게든 당신들을 굶기지는 않았던 우리 엄마 특유의 짜고, 싱겁고, 설익고, 퍼진 맛은 오로지 엄마의 사랑이라는 괜찮은 행복으로 여러분의 추억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가장 행복한 추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순한 두 볼을 복스럽게 볼록이며 바삐 입술을 오물거리던 그대를 바라보던 엄마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평생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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