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에는 종묘가 있다

by 이주성

"단순함 속에 숭고미가 있다."


교과서에서 '종묘'가 나올 때면 읽던 문장이다. 깨진 픽셀로 작게 인쇄된 종묘 정전 사진이 함께 있었다. '단순함이 주는 숭고미가 있을 수 있지' 하며 머릿속으로 이해하는 것과, 현실의 공간 속에서 그 장중함이 온몸을 통과하는 기분을 느끼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고요한 월대 너머로, 600년의 뿌리를 내린 정전은 그 깊이만큼 나를 품듯이 압도하고 있었다.




서울에 가까이 살면서도 서울이 품은 문화재를 방문해 감상하는 일은 자주 해보지 않았다. 가까이 있어 언제든지 갈 수 있다는 마음 때문인지. 불국사 보다는 친구들이 재밌었던 수학여행 같은 마음이었는지, 시간을 내어 가보자 계획하는 일이 드물었다.


도시를 그 안의 자리한 문화재와 오랜 건축으로 이해하는 시선에 흥미가 생기면서,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를 읽게 되었다. 여러 시리즈 중 서울편에 첫 번째는 바로, 종묘로 시작한다.




조선 건국에서 궁궐을 짓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종묘와 사직이었다고 한다. 나라의 정통성을 세우고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장소이다. 궁궐에서 남면하는 임금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종묘가 오른쪽은 사직이 세워져 있다.


특히 종묘는 나라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확립하는 일이기에 더욱 중요하게 여겨졌다고 한다. 서양의 신전이나 성당이 있는 것처럼 유교 문화를 바탕으로 건국한 조선에는 종묘가 있는 것이다. 필자는 종묘가 신성하고 숭고한 공간으로서 체계적으로 설계되었다 말한다. 건축의 관점에서 바라본 아름다움 또한 자세히 피력하고 있어, 책을 읽자마자 종묘에 흥미를 갖고 방문해 보기로 했다.




매표소를 지나 종묘로 들어서기 시작하니, 작은 연못인 중연지가 보인다. 궁궐에서 흔한 소나무가 아닌 향나무가 식재되어 있다. 향나무가 그 공간이 가진 엄숙한 기운을 여실히 자아내고 있었다. 신로가 이어진 방향을 따라가니 재궁이 자리하고 있다. 왕과 세자가 제례 전 머물며, 몸과 마음을 정비하는 곳이라고 한다. 목욕을 하고 마음을 깨끗이 다지는 장소인 것이다.


재궁을 지나자, 내가 책을 읽으며 가장 주목했던 정전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해설사 분은 문화재 속 고요함을 충분히 느껴보라 말해주셨다. 도시 속 사치의 경험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더하였다.




마침내 정전에 들어서자, 그동안 알고 있던 종묘가 이렇게나 웅장했다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눈에 담기지 않는 것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게 다가왔다. 책 속에서 읽었던 모든 것이 다시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우선, 월대가 가슴 높이로 너른하게 펼쳐져 있었다. 문을 들어서자 보이는 시야에서 아래 부분을 가득히 차지하며 공간의 무게감을 느끼게 해줬다. 시선의 높이가 월대 위로 자연스레 향했다. 그 텅 빈 공간 너머로 정전이, 깊은 숲 속에 아주 오래 산 나무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크고 두꺼운 기둥이 반복되어 세워져 있고, 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진 19개의 신실이 길게 이어진다. 양쪽으로 계속해서 증축하며 지금의 길이가 되었다고 한다. 기나긴 정전을 좌에서 우로, 차례대로 바라보며 조선의 역사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유독 발길을 잡는 것은 단순해 보이는 기와와 단청이었다. 정전의 긴 지붕에 덮인 수만 장의 기와가 저마다의 잿빛을 내보이며 신비로운 기분을 주었다. 언뜻 단순한 색이지만 각각의 기와가 조금씩 다른 밝기로 빛나는 것이 넓게 펼쳐진 풍경 속에서 세밀한 변주처럼 다가왔다.


그 아래로는 가칠단청이 기교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2~3가지 색으로만 칠해져 있다. 공경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라는데, '붉고 푸른색 만으로도 진중한 분위기를 뿜으며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고, 오래 감탄했다. 길을 돌아서기 전까지 기와와 단청을 번갈아 보며 기억 속에 새겼다. 온몸을 훑고 들어서는 것 같았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종묘를 빠져나왔다. 직접 마주하는 것에서 오는 감동이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함 속에 숭고미' 라는 문장이 시험을 위해 외웠던 메모에서 떼어져 나와, 뭉툭하고 서늘한 감각으로 느껴진다. 걸음으로 마주했던 종묘의 풍경과 함께 오래도록 펼쳐질 장면이 되었다.




사방이 무르익는 가을, 외우듯 지나쳐간 문화재를 직접 다녀와보는 것은 어떠한가. 아름다운 뿌리가 가까이에 있다. 종묘는 바로 왼쪽에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