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내리던 비는 그치지 않고 아침에도 이어지고 있다. 푸르름이 한층 짙어진 느티나무 위로 쏟아지는 굵은 빗줄기가 초록으로 물들어 내린다. 사위는 어둡고 넘기는 책장에서도 눅눅함이 느껴지지만, 마음이 촉촉해지는 게 싫지만은 않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일요일 아침, 푸른 잎사귀 사이로 곧게 내리는 비를 보고 있노라니 즐거운 일이 생길 것 같은 설렘과 나를 바라보게 되는 여유를 알게 해 준 비에 대한 추억이 생각난다.
중학교 2학년 여름, 선운산으로 극기훈련을 갔다. 앞뒤 어디를 둘러봐도 너른 들판만 펼쳐진 김제에서 자라온 우리는 산이라는 곳으로 극기훈련을 간다는 말에 겁부터 났다. 없는 꼬투리라도 잡아서 투덜대던 사춘기 때였으니 친구들도 나도 무슨 산이냐며 목소리 높여 싫은 척을 했다. 후덥지근한 여름날 왕초보 등산가가 억지로 산을 오르는 일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내려올 것 왜 이렇게 힘들게 올라가는 거야!’ 하는 원망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잔뜩 습기를 머금어 꿉꿉하던 공기에 물먹은 솜처럼 몸은 무겁고 숨이 헉헉 막혔다.
올라가는 동안에 잔뜩 흐려졌던 하늘은 겨우 숨 돌리고 내려오던 우리에게 한두 방울 떨어뜨리던 빗방울을 아예 사정없이 쏟아부었다. 땀과 비에 흠뻑 젖은 기분은 유쾌하지 않았다. 나무로 우거진 등산로 옆으로 흐르던 계곡물은 힘 있게 서서 콸콸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비를 맞으며 내려와 바닥이 시멘트로 되어 있는 넓은 보가 있는 곳에 이르니, 앞서서 가던 앞반 아이들이 갓 부임한 인기 많던 국사 선생님과 한창 물장난을 벌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차피 젖은 것 우리도 들어갈까?’ 친구 몇몇과 짧은 의견을 교환한 후 비가 내리는 물속으로 들어가 서로에게 물을 뿌리며 장난도 치고, 앉았다 일어났다 부력에 의지하며 물속에서 느낄 수 있는 자유로움을 맘껏 즐겼다. 예상치 못했던 여름날의 즐거움이었다. 나뭇잎을 타고 흘러내리던 초록빛 빗물은 우리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 뒤로 여름 산은 즐거움이고, 산에서 만나는 비는 푸른 생기로 나에게 남아있다.
나에게 집중하게 되는 여유를 알게 해 준 비는 이 일이 있고 난 몇 년 후다. 주말도 없고 밤낮도 없던 고등학교 시절을 막 지내고, 갑자기 헐렁해진 시간을 어찌 써야 할지 모르던 대학 새내기 시절,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장마가 시작되었다. 여름의 긴 날 무료해진 나는 학교 동아리방에 가볼까 하는 맘으로 거리에 나섰다.
장마가 시작된 바람이 없던 그날, 굵은 비는 마구 쏟아지긴 했지만 우산 위로 곧게 내린 후 굽이를 따라 곱게 떨어져 내렸다. 우산 속에서 듣는 빗소리가 좋고, 쏟아져 내리며 내 발등을 간지럽히는 여름을 닮은 비가 좋았다. 걸어가 볼까?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에 마음도 덩달아 경쾌해진 나는 버스를 타고도 삼십 분 정도를 가야 하는 길을 걸어서도 금방이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것에 관심 없다는 듯 무심히 서서 줄기차게 쏟아지는 비를 마음껏 즐기고 있는 가로수의 모습이 어느 때보다도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그 모습이 좋아 가끔 우산을 살짝 비끼고, 나무 옆에 서서 쏟아지는 비와 푸른 잎을 올려보았다. 자기 잎 키우기에 몰두하며 말간 표정으로 서 있던 나무가 양버즘나무였는지 은행나무였는지 수많은 시간과 사건을 거쳐오며 기억은 흐려졌지만, 빗소리 따라 무작정 걷던 길을 같이 한 푸른 잎의 싱싱함만은 생생히 기억난다. 주변의 모든 것이 빗소리에 묻혀, 오롯이 가로수의 푸른 잎과 빗속을 걷는 나만 존재하는 시간이었다.
아침부터 줄기차게 내리고 있는 비 덕분에 옛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오니, 그때처럼 빗속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일 저런 일을 마음속에 한가득 끌어안고 끙끙대느라 그저 비가 좋아 빗속을 걸은 지 꽤 오래된 것 같다. 내리는 비를 보면서도 나의 감정보다는 어느 지역은 비로 물난리가 났다느니, 어떤 나라에서는 큰비로 몇 명이 사망하고 몇 명의 수재민이 생겼다느니 하는 뉴스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간이었다.
우산 하나 집어 들고, 일요일 오전의 한적한 길을 걸어본다. 여름 산에서 맞은 설렘임 가득했던 푸른 비와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던 젊은 날의 장대비를 추억하며 걷고 있는 내 나이가 참 좋아진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가로수 잎을 바라보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으면, ‘초록비가 참 예쁘네요.’ 하고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말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