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도토리

by 산들


당신 손안에 도토리가 있다. 그렇다면 이 도토리는 참나무일까 아니면 그냥 도토리일까. 흔히 커다란 참나무 한 그루에 만 개의 도토리가 열린다고 한다. 그 모든 도토리가 다 참나무로 변하는 건 아니고 일부는 다람쥐나 청설모의 먹이가 되고 일부는 썩기도 하고 일부는 또 발아를 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도토리의 인생인 셈이다.

도토리 한 알은 별로 크게 보이지 않는다. 언뜻 보기에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존재감도 크지 않다. 내가 만약에 도토리였더라면 나는 지금 어떤 상태일까? 처음에 내가 원하던 대로 싹이 나고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도토리 그 자체로서 만족하며 머물러 있는 것인가 의문이 든다.


성경에는 겨자씨 한 알의 믿음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로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에게 만일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 있을진대 너희가 이 산에게 말하여, 여기서 저 너머로 옮겨가라, 하면 그것이 옮겨 갈 것이요, 또 너희에게 불가능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리라(마 17:20).


성경에 나오는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현실태의 겨자씨만이 아니다. 그것은 이후에 그 믿음이 세상을 덮을 만한 나무로 바뀔 수 있다는 신념이고 의지이며 확고한 신뢰이다. 이 엄청난 비유 앞에 많은 종교인들은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무릎을 꿇고 승복한다. 이 가벼움은 교만으로 목에 힘을 주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며 자신만을 사랑하던 이들의 마음을 사정없이 무장해제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또다시 한 알의 밀알이 빚어내는 기적을 다루고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위에서처럼 한 알의 밀알은 한 알의 밀알로 그치지 않는다. 이후에 수십수백 배로 엄청난 변신을 꾀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여 승천한 이후 그의 제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복음을 세상에 전파했다. 한 명의 사도가 뿌린 믿음의 씨앗이 또 다른 신념의 자녀를 키웠다. 예수께서 뿌리신 한 알의 밀알은 죽어 열매를 맺고, 전 세계에 퍼져 인류의 역사를 바꿨다. 그것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기적이었다.


내 손안에 있는 도토리 한 알이 그냥 도토리 하나로 끝날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도토리의 운명은 거기까지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적당한 때와 기후, 그리고 여러 가지 여건이 맞아서 움이 트고 다시 또 열매를 맺는 참나무로 성장한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도토리 한 알이 만 개의 열매를 수확할 수 있는 나무로 자랐으니 얼마나 큰 성과인가.


사람을 키우는 일도 마찬가지다. 어떤 선생은 제자들에게 잔인한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좋은 스승 한 명은 수백 수천 명의 수많은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의 말 한마디 그의 행동이 학생들에게 인생을 살아가는 지침이 되고 롤 모델이 되어 가슴에 살아남는다.


때로 우리가 무심히 생각하는 도토리 한 알의 기적이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알고 보면 세상의 거대한 참나무도 시작은 도토리에서였다. 그 한 알이 머금고 있었던 유전자가 138억 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우리에게 닿는다. 인류의 역사 저편에 숨겨져 있던 유전자가 우리에게 와 있다.


참나무는 자신의 아이들이 조금 더 멀리 그리고 안정적으로 발아할 수 있도록 시간을 두며 체질을 개선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최적의 상태로 떨어지는 것까지 고려했을 것이다. 그 바람대로 참나무에서 도토리가 허공을 가로질러 떨어질 때 마음 졸였을 것이다. 한두 알로는 불안해서 수많은 열매를 떨구고 그 열매들이 다시 또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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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도토리 한 알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참나무 한 그루가 크고 다시 또 그 참나무가 새끼들을 퍼뜨리고 다람쥐와 청설모가 부지런히 그 먹이를 옮기고 겨울 양식으로 삼기 위해 땅에 가져다 둔 덕분에 근사한 참나무 군락이 생겼다. 그 숲에는 또 다른 식물과 동물이 같이 살아간다.


우리가 무심히 생각하는, 어찌 보면 하찮기 그지없는 도토리 한 알이 시간이 만들어낸 기적의 힘을 빌려 울창한 참나무 숲을 만든 셈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지만 때로는 모든 일은 이처럼 작은 시작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어떤 이는 새로운 일을 하기에 너무 늦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들의 푸념은 거의 비슷하다.


지금 이 나이에 하면 얼마나 하겠어?

내가 이걸 한다고 누가 알아주기나 하겠어?

내가 지금 이 나이에 이걸 한다고?


이런 생각들이 자신을 얽어맨다. 꿈을 사라지게 하고 힘 빠지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를 자기라는 틀 안에 가두고 있을 때 몇몇 빛나는 인생들은 그 꿈으로 가기 위해 한 걸음 더 내디뎠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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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의 나이에 그림을 처음 그리기 시작해서 미국의 국민화가로 불렸던 모지스 할머니가 있다. 그녀를 그림 앞으로 이끈 것은 관절염이었다. 관절염이 심해지지 평소 쉽게 하던 바늘에 실을 꿰기 힘들었고 결국 자수를 포기해야 했다. 이때 그녀가 선택한 것은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제2의 전성기이자 인생의 황금기로 이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절망하거나 좌절하고 원망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녀는 생각을 바꾸었고 다른 세계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처음부터 그녀의 그림이 탁월한 평가를 받거나 세상의 주목을 받았을 리 없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 그림을 시작한 76세부터 101세까지 1,600여 작품을 남겼다. 그중 250여 점은 100세 이후에 그렸다고 한다. 이쯤되면 9회 말 역전 만루홈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들은 다 일을 접고 포기할 나이에 제2의 인생을 사는 그런 이도 있다. 그들도 물리적인 시간 앞에서 점점 무력해지는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 젊을 때와 달리 체력적으로도 딸리고 의욕도 사라지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이 점점 고갈되는 그런 패배감도 느꼈으리라. 어쩌면 죽음의 유혹도 받았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조금 더 귀를 기울였다. 그들이 좋아하는, 그리고 하고 싶어 하는 일에 몸을 기울인 것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실행에 옮겼다. 즉, 생각만 한 게 아니었다. 그들의 위대함은 실천에 옮김으로써 비로소 빛을 발할 수 있었다.


한 알의 도토리가 땅에 떨어졌을 때 자기 안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렸다면 어땠을까? 그리고 도토리로 만족했더라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토리가 도토리이기를 포기했을 때 참나무로 거듭날 수 있었다. 도토리의 포기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지금 거대한 참나무 숲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도토리를 가지고 있다. 물론 어떤 이는 태어날 때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을 수도 있다. 태생적으로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절대 음감, 절대 미각 등을 가진 이도 있다. 이런 것은 쉽게 따라잡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의미다


하지만 본인이 어느 정도 노력만 한다면 전문가는 아닐지라도 중간 정도는 갈 수 있다. 그걸로도 만족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지만 대부분은 중간만 해도 훌륭해 보인다.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고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세상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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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선인장도 말라 죽인다는 그런 똥손이라고 자신을 비하하는 경우도 있다. 반면에 어떤 이는 다 죽어가는 호접난도 살려서 훌륭하게 키워내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금손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는 왜 생겼을까?


첫째, 자기가 해주고 싶은 대로 한다. 어떤 식물은 물을 자주 주면 뿌리가 썩거나 오히려 성장에 장애가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틈만 나면 물을 주니 식물이 도무지 견딜 재간이 없다. 결국 버티고 버티다가 죽고 만다. 어떤 이는 식물이 말라가는 게 눈에 보이는데도 도무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처음에 식물을 만났을 때만 잠깐 의욕을 보일 뿐이다. 자기가 목마르면 물을 찾듯이 식물도 그렇다는 것을 왜 생각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무감각하고 둔감하다. 그래서 결국에는 멀쩡한 식물을 말라 죽인다. 그리고는 자기가 똥손이라고 스스로 변명거리를 찾는 것이다.


식물에 대한 이해나 관심을 가지지 않고 저절로 식물의 크기를 바라는 이가 의외로 많다. 왜냐하면 집 밖에 있는 풀과 나무들은 우리가 물을 주지 않아도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을 당연시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기 집에 있는 식물도 저절로 잘 클 거라고 믿어버린다.


둘째, 반성하지 않는다. 한 번 그러면 다음에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흔히 똥손이라는 이들은 실수를 반복한다. 변명거리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실수를 고치려고 노력도 하지 않고 다른 이의 충고도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린다. 결과적으로 식물을 사서 그때만 잠깐 좋아하다 다시 또 말라죽여 버린다. 이건 식물 탓인가 아니면 자기 탓인가.


우리는 각자 도토리를 가지고 태어났다. 어떤 이는 그 도토리를 잘 키우기도 하고 어떤 썩게 만들기도 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고 누구나 부러워하는 인생을 사는 사람도 있고 자기에게 주어진 행운을 자기 삶을 망치는 데 쓰는 이도 있다. 복권에 10억 당첨된 이가 10년 만에 범죄자 신세로 전락하기도 하고 살인자로 비참한 인생을 마치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행운을 감당할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신이 우리에게 어떤 도토리를 남겨주셨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나에게도 쓸만한 도토리 하나쯤 주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한다. 세상을 바꿀 만큼 거창하지는 않아도 그래도 어쩌면 내 남은 인생을 멋지게 바꿀 수 있는 그런 참나무 하나쯤은 그 안에 숨겨져 있지 않을까. 그리고 가끔은 그 나무를 보며 나도 그렇게 나쁜 인생은 아니었다고 혼자 웃음 짓는 날이 오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지금 나는 내게 주어진 도토리를 어떻게 하고 사는가?




* 이 글도 숲해설가 교육과정 중 나온 도토리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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