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초도 <자산어보> 촬영지를 찾아서
팽나무 숲길 구간 중 5코스가 끝날 무렵 자산어보 촬영지 1.9km 남았다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살짝 들었다. 한여름 땡볕에 2km를 걷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 만약 늦게 출발했다면 나는 미련 없이 다음을 기약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오늘 새벽 6시에 출발한 덕분에 아직은 다소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문제는 체력이 되느냐였다.
결국 망설임 끝에 나는 자산어보 촬영지까지 걷기로 했다. 문제는 하필 오늘 더위가 제일 살인적이었다는 점이다. 2km라고 분명히 되어 있었지만 체감하는 거리는 훨씬 더 멀게 느껴졌다. 평소 내가 걷지 않은 때문일 수도 있고 날씨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조금씩 지치기 시작했다. 가는 도중에 나비 몇 마리를 만난 게 내 발걸음을 좀 더 가볍게 해 주었다. 조흰뱀눈나비의 날갯짓에 정신이 팔려서 가다 보니 어느새 눈앞에 초가집 두 채가 들어왔다.
멀리서 보니 언덕 위의 허름한 초가집 두 채였을 뿐이었는데 막상 올라가서 보니 풍경이 어마어마했다. 도착해서 보는 순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그런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운무에 싸인 바다 위의 섬은 몽환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바라보는 순간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걸어왔던 길은 다 사라져 버렸다. 더군다나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기가 이를 데 없어서 나는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
더군다나 영화를 찍기 위해 세운 촬영 장소(영화 속 정약전이 머무는 유배지)는 사진을 찍기에도 그만이어서 이곳을 방문하는 이라면 누구나 빼놓지 않고 거기서 사진을 찍었다. 특히, 마루가 액자와 같은 효과를 주기 때문에 그대로 사진을 찍으면 감탄이 절로 나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로 찍는 것은 뒷모습 사진이었다. 만약 인생 샷이나 모델 화보를 꿈꾸는 이라면 한 번쯤 시도해 볼 만하다.
알려진 대로 <자산어보>는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이 쓴 우리나라의 물고기에 관한 책이다. 해족도설(海族圖說)로 하려다 자산어보(玆山魚譜)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동생 정약용의 말을 듣고 도록 대신에 글로 풀어서 책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일설에는 ‘흑산’의 ‘검을 흑(黑)’ 자에 나쁜 의미가 있으므로 피했다는 말도 있다. 이 책은 19세기 초 당시 흑산도 연안에 서식했던 한국의 토종 어류와 갑각류, 조개류에 대한 정보를 명칭, 분포, 생태, 유용성을 망라하여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만약 그가 천주교 박해로 귀양을 가지 않았더라면 흑산도를 접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고 이 책은 세상에 나올 수 없었으리라. 사마천이 궁형으로 인생의 바닥을 칠 때 불멸의 역사서 <사기>를 썼듯이 정약전 역시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에 조선의 물고기에 집중했고 그 결과 유일무이한 조선 물고기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그로서는 위기가 기회였던 셈이고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배는 유배일 뿐, 어떻게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그게 천국으로 바꿔지지는 않는 법이다.
파불로 네루다 이야기를 다룬 <일포스티노>라는 영화도 비슷한 느낌을 준다. 이 영화는 칠레 작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가 쓴 <네루다의 우편배달부>가 원작이다. 필립 느와레가 네루다로 분한 이 영화에서 시인은 자신의 편지를 배달하는 우편배달부와 자연을 매개로 하여 시와 우정을 나눈다. 아름다운 이탈리아 해변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우편배달부 마리오는 ‘은유’라는 창을 통해 세계를 보는 눈을 조금씩 넓혀간다. 네루다가 떠난 후 마리오는 네루다에게 주기 위해 자신이 생각하는 섬의 아름다운 여덟 가지의 소리를 녹음한다.
1번. 바다의 작은 파도
2번. 큰 파도
3번. 절벽의 바람소리
4번. 나뭇가지에 부는 바람소리
5번. 아버지의 서글픈 그물
6번: 신부님이 치시는 교회의 종소리
7번: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8번: 뱃속에 있는 파블리토의 심장소리
때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잊고 사는가. 그것은 보이는 것이나 들리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정말로 소중한 것은 그 너머에 있다. 아마도 마리오는 그가 평소 살면서 만났던 아름다운 세계를 소리로 담고자 했을 것이다. 거기에는 하늘의 별처럼 소리로는 담기지 않는 것도 있다.
영화는 다시 이 섬을 찾은 네루다가 마리오가 남긴 녹음을 들으면서 시인이 된 마리오의 죽음과 얽힌 사연을 다루며 끝이 난다. 이 영화는 시를 따로 배우지 않았어도 네루다와의 인연으로 시가 주는 아름다움과 매력에 빠진 마리오의 이야기를 다룸으로써 많은 이들의 호평을 받았다. 평범한 우편배달부였던 마리오가 자연을 마주하면서 시와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 여운처럼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영화 <자산어보>의 촬영 세트장이기는 하지만 예전에는 다른 곳에서 찍을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정이 생겨서 이곳에 세트장을 짓고 영화를 촬영했다 한다. 영화를 찍는 와중에 태풍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지붕이 날아가지 않도록 그물을 쳤다는 일화도 들은 기억이 있다. 게다가 이 영화를 찍었을 때는 전국이 코로나로 몸살을 앓던 시대이기도 했다. 당연히 언제 상연할 수 있으리라는 기약도 없이 시작한 영화였다. 여러 악조건 속에서 만든 영화는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으나 정약전의 삶을 다룬 아름다운 흑백 영화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