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판각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판각에 대해 모르는 이라도 ‘팔만대장경’하면 바로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지금이야 컴퓨터를 활용한 전자출판이 대세이지만 예전에는 인쇄를 하기 위해서는 한 글자 한 글자를 나무에 직접 새겨야만 했다. 우리 조상들은 국보 제32호인 팔만대장경을 비롯하여 조선왕조실록 등 자랑스러운 인쇄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전주 한옥마을 향교 근처에 완판본문화관이 있다. 한옥마을을 찾는 이라면 이 건물에 대해 한번쯤 의문을 가졌을 법한 곳이다. 제법 널찍하게 터를 잡고 있기 때문에 한옥마을을 찾거나 전주 천변을 찾았던 이라면 호기심에 한 번쯤 방문했음직하다. 이곳은 전주 출판문화의 맥을 잇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완판본문화관이다.
2011년 10월 18일, 전주 한옥마을에 정식 개관한 완판본문화관은 1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주 출판문화의 명맥을 복원하고 일반에게 기록문화의 가치를 일깨우는 데 한 축을 담당해왔다.
설립 취지를 밝히고 있는 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완판본문화관은 전주의 기록문화를 대변한다. 예로부터 전주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全州史庫)’를 비롯하여 출판으로 유명한 동네였다. 국가 주도로 책을 찍어 냈던 전라감영을 비롯하여 책을 보관하던 전주향교, 철활자로 책을 인쇄했던 희현당, 한지공장이 있던 흑석골이 유명했으며 서계서포, 다가서포 등 전국에 책을 공급하는 책방거리가 남부시장에 따로 있을 정도였다. 지금도 전주에는 헌책방거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서울에서 발간된 경판본 옛책과 대비되는 ‘완판본(완판본)’은 조선시대 전주를 중심으로 발간된 책을 통틀어 말하는 이름이다. 예로부터 우수한 한지가 대량으로 생산되던 전주는 판소리의 인기에 따라 폭발적으로 발생한 소설화 수요, 서적 편찬과 간행을 주도했던 전라감영, 지역민의 근대화 요구 등이 맞물려 완판본을 전국에 공급할 수 있는 토대를 형성함으로써 출판문화의 도시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완판본문화관이 전주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완판본문화관의 안준영 관장은 이런 인연에 대해 “전주는 판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꿈의 도시이다. 전주에서 시작한 출판문화는 우리 민족에게는 대중문화를 접하는 통로이자 신문명이 전국으로 퍼지게 하는 도도한 강물이었다. 그런 점에서 여기에서 출판문화의 메카로서의 전주의 맥을 잇고 싶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완판본문화관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공간은 전시실이다. 현재 전시실에서는 한글 고전소설 판각본을 비롯해 전라감영에서 출판한 역사서, 문집, 사서삼경, 생활백과서 등 전주의 다양했던 출판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현재 완판본문화관에서는 한옥마을을 방문하는 관광객이나 지역민들이 전주의 기록문화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체험 프로그램과 다양한 문화콘텐츠 개발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일반인과 교원 연수 등 시민들이 쉽게 판각을 접할 수 있는 통로를 다변화하고자 하는 노력도 완판본문화관에서 역점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이다.
연수프로그램과 소통을 위한 체험 프로그램은 완판본문화관이 자랑으로 내세우는 특화 프로그램이다. 지금까지 총 13기가 배출된 판각회원들은 그 연수만큼이나 실력과 내공도 탄탄하다. 최근 완판본문화관에서는 코로나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 맥을 놓치지 않기 위해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정부의 인원 제한 지침에 따라 완판본문화관에서는 참가인원을 두 팀으로 나눠서 운영하는 방식으로 판각의 진정한 매력을 맛보게 했다. 이 과정에서는 판각의 개념, 조각도 활용법, 음각과 양각 기법 등 이론과 실전 훈련을 함께 병행한다. 그 결과 작년에는 회원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시 구절을 판각하여 완판본문화관에서 회원 전시회를 가지기도 했다.
현재 전주목판서화관에서는 가을에 있을 회원전을 준비하기 위한 개인 회원들의 망치 소리가 요란하다. 이곳에서는 오랜 숙련과정을 거친 선배 기수들이 이제 막 판각의 길에 들어선 후배 기수들을 이끌어주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완판본의 맥을 잇기 위해 고민한다.
한 번 판각의 길에 들어선 회원들은 집이나 직장 내에서도 작업을 이어간다. 그만큼 판각이 매력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올해 6월에도 어김없이 판각에 대한 꿈을 키워왔던 사람들이 새로운 회원으로 가입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렇게 멋진 공간이 한옥마을 근처에 있음으로 해서 전주시민들은 그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올해 완판본문화관에서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2 신나는 예술여행>의 문학부문에 ‘이야기 새기는 고전 책방’이 선정되어 지역 청소년을 대상으로 우리의 고전을 함께 읽고 듣고 새기고 낭독하고 만들어보는 독특한 체험 방식의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이다. 완판본문화관에서는 조선시대 고전 소설을 읽어주던 직업 이야기꾼 전기수와 소리꾼의 판소리 공연을 비롯하여 목판에 글자를 새기는 각수(刻手)의 판각 시연을 통해 우리의 고전문화의 매력을 맛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준비했다.
가끔 우리는 전통이 고루하거나 너무 멀다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문화는 관심을 기울이기만 하면 우리 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완판본문화관은 우리의 기록문화를 감상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완판본문화관은 판각에 관심을 가진 이들만이 아니라 나무라는 매개체를 통해 우리 조상들의 숨결을 맛보게 하는 공간인 셈이다. 올여름에는 이 매력적인 공간에 한번 푹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