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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Oct 02. 2022

끝이 끝은 아니다

다음날, 든든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게스트 하우스를 출발했다. 어제 하도 고생을 해서인지 걸으면서도 8코스 <마테오의 집>을 돌아보게 되었다. 표지판을 따라 걸으니 얼마 걷지 않아 7번 코스 <토마스의 집>을 만날 수 있었다. 그다음 6코스로 이동할 때, 우리는 다시 왔던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길을 갈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이번에도 우리는 가지 않은 길을 택했다. 낯선 길은 익숙함을 포기하는 대신 신선함을 준다.      


우리는 숙소를 지나쳐 갈래길에서 6번 순례자 코스 <바르톨로메의 집>으로 향했다. 가다 보니 왼편에 커다란 방죽이 하나 나온다. 따로 표지판도 없지만 느낌이 <바르톨로메의 집> 같았다. 넓은 방죽 안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집 한 채. 배가 없으면 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처음에는 이곳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주변을 둘러봐도 다른 집이 없다.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12 사도 길 지도에 나오는 그 집이 맞다.      



6코스는 다른 곳과 달리 사람들의 접근이 쉽지 않다. 대신에 방죽을 따라 쭉 돌아보며 사진을 찍는 재미가 쏠쏠하다. 물에 비친 건물은 또 다른 느낌을 준다. 다른 곳이 그냥 스쳐 지나가듯 머무르는 곳이라면 이곳은 사방을 둘러보며 걷다 보니 한 곳에서 머무는 시간이 제법 길다. 아쉬운 점은 다른 곳과 달리 표지판이 없었다는 점이다. 표지판은 공간을 알려주는 의미도 있지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경우도 있다.      


이어서 다음으로 향한 곳은 5번 코스인 <필립의 집>이었다. <필립의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노둣길을 지나야 했다. 8번 <마테오 집>으로 가는 길만큼은 아니지만 그곳에서 내 평생 동안 가장 넓은 갯벌을 만났다. 사방이 탁 트인 풍경이 보는 것만으로도 내게 큰 위안을 주었다. 바로 노둣길 옆에 농게와 칠게, 그리고 짱뚱어까지 볼 수 있으니 생태공원이 따로 없었다. 내게는 그 노둣길이 6번의 세상과 5번의 세상을 연결해주는 통로처럼 느껴졌다. 때로 우리도 세상과 주님을 연결해주는 통로가 필요하다.      


우리가 <필립의 집>에 도착했을 때 마침 교회에서 온 분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 나오는 걸 보니 열 분이 훌쩍 넘는다. 처음 볼 때는 몰랐는데 그 좁은 공간에 그렇게 많은 분들이 마음을 모으고 뜻을 모아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게다. <필립의 집>은 외형 자체도 특이할뿐더러 나무를 덧대어 지붕을 형상화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집의 디자인에 다섯 명의 작가가 참여했다고 한다. 이국적인 느낌의 집이지만 내부는 편안했고 전체적으로 인상적이었다.      



12 사도 길을 걸으면서 몇 번 길이 헷갈릴 때가 있었다. 예를 들면 11코스와 12코스 방향을 화살표로 표시만 해주더라도 여행객이 헤매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 대개의 표지판은 ‘순례자의 길’과 화살표만 있다는 점이다. 특히, 내 입장에서는 3코스와 4코스 가는 길이 그랬다.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던 이가 많았는지 가다 보니 그런 표지판을 딱 한 곳에서 만나기는 했다. 이번 순례길을 1코스에서 시작하는 이도 있겠지만 반대로 12코스에서 시작하는 이도 있기 때문에 조금은 친절할 필요가 있다. 낯선 곳에서는 이러한 사소한 친절이 반가울 때가 많다.      


다음에 찾은 곳은 상당히 외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가는 내내 애를 먹었다. 다른 곳은 대부분 다음 코스까지 짧게는 200m, 멀리 가도 500m에 불과했는데 유독 이곳만은 거리가 멀었다. 또 큰길에서도 또 한참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에 체력이 달리거나 힘이 드는 사람들은 가지 못하기도 한다. 우리가 가는 길 양 옆으로는 잘 익은 벼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미 수학의 시기를 넘긴 듯 상태는 좋지 않았다. 물이 귀한 섬에서 농사를 짓기가 쉽지는 않을 텐데 아쉬움이 남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코스모스를 배경으로 서 있는 모습이 평화 그 자체였다.      


우리는 다음 코스인 <요한의 집>으로 향했다. 




이제 순례의 길을 마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서운함 반 기쁨 반이다. 서운함은 끝이 보인다는 아쉬움이었고 기쁨은 병풍도에서 나가는 배 시간을 맞출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요한의 집>은 마을을 빠져나오자마자 바로 만날 수 있었다. 병풍도가 가까워서인지 마을의 지붕은 강렬한 빨간색이었다. 12 사도 길의 특징은 각 순례의 코스마다 작가들이 자신의 영감과 마음을 다해서 디자인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사도 요한을 떠올리는 4번 코스는 길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역시 내부 또한 간결하기 짝이 없다. 이어서 우리가 향하는 곳은 1번 코스 <베드로의 집>이다.     



1번 코스 <베드로의 집>은 대기점도가 시작하는 항구에 있다. 천주교나 기독교에 대해 잘 모르는 이라도 베드로는 안다. 피터로도 알려진 베드로는 원래는 고기 낚는 어부였다. 그러다가 예수를 만나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다. 다혈질의 베드로는 예수와 얽힌 일화가 많은 제자였다. 그 대표적인 것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한 사건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예수를 증거하고 세상에 알리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그의 헌신과 희생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베드로의 집>은 12 사도 길을 홍보하는 포스터에도 등장할 만큼 대표적인 공간이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그 <베드로 집> 바로 옆에 화장실이 붙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니 12사도 길 걷는 내내 화장실을 보지 못했다. 12 사도 길의 첫 번째 길이니만큼 처음 설계하는 부담이 상당했으리라. 언뜻 보면 그리스 산토리니를 떠올리게 하는 그런 파란 지붕과 하얀색 몸체가 바다와 어우러져 근사함을 자아낸다.      


만약 우리가 처음 <베드로의 집>을 만난 이후에 12 사도 길을 걸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조금은 느낌이 달랐을 것이다. 같은 코스를 다 돌았다 할지라도 어떤 감성으로 돌았느냐에 따라 느낌은 전혀 달라진다. 물론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첫 시작을 어디서 하느냐에 따라 전체적인 생각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반대로 돈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베드로의 집>을 거의 마지막에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도달한 것은 2코스 <안드레아의 집>이다. 드디어 마지막 순례의 길이다. 이 집을 마지막으로 12사도 길은 끝이 난다. 앞에 고양이가 있는 인상적인 집이다. 소나무를 이고 있는 형상이 편안해 보인다. 안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으니 밖의 풍경이 또 하나의 프레임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우리가 산다는 것은 그러한 틀을 자기 안에 품고 사는 것이 아닐까? 어떤 이는 그 틀이 너무 단단하고 강해서 다른 무엇이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든다. 반면에 어떤 이는 항상 열려 있다. 그래서 그의 창으로 다른 이들이 세상을 바라보게 할 수도 있고 그 역시 다른 이의 창으로 세상을 본다. 어떤 이는 창이 없이 벽만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 안에는 바람이 통하지 않고 빛도 통하지 않는다. 물론 존재한다는 그 자체로서도 위안을 삼을 수 있지만 그게 우리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이번 12 사도 길을 걸으며 예수의 열두 제자가 걸었던 그 길을 우리가 닮을 수는 없지만 잠시나마 그 여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잘 가고 있다고 착각하며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간다. 이곳을 찾는 이들이 성전을 만드는 마음으로 디자인하고 건축했던 이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며 위로를 받으면 좋겠다. 어쩌면 우리는 내 인생의 12사도였을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그 먼 길을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12 사도 길에서 만났던 인물 중에는 그동안 성경에서 알았던 이름 외에 그렇지 않은 인물도 그 안에는 섞여 있다. 12 사도 길을 완주하지 않았더라면 서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두 군데가 빠진다고 해도 서운하지는 않을 것 같다. 어차피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는 게 우리의 인생이다. 만약 시간이 허락한다면 혼자 때로 일행들과 함께 이 길을 걸으며 내 삶의 무게에 대해서, 그리고 주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당신이 걸은 그 거리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매번 시간은 우리에게 주어지지만 그 시간을 슬기롭게 쓰는 자는 그리 많지가 않다. 우리는 온갖 핑계를 대며 다음을 기약하나 그다음은 영원히 오지 않을 수 있다. 때로 그러한 인연은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운명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나는 신안 소악도, 소기점도와 대기점도의 해변도로와 숲길을 걸으며 12사도의 형상을 닮은 집들을 만났다. 무사히 12사도 순례길을 마치고 배에 오르는 순간 마음 한구석에는 행복감이 밀려왔다.      


코로나 이후 하루에 몇 개의 일정을 소화해가며 어렵사리 만든 시간이었다. 그런데 12 사도 길의 처음이었던 소악도에 도착하면서 가장 평안하고 느긋한 세상을 만났다. 8번 <마테오의 집>에서 노둣길을 만나며 평생 경험하기 어려운 소중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니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각각의 집들의 무게가 새롭게 다가온다. 지독히 바쁘고 험난했던 9월, 만약 이 여행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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