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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Sep 30. 2022

드디어 길이 열리다


   

12코스로 가기 위해 갔던 길을 다시 돌아 나오려다가 순례자의 길 표지판이 있어서 해변을 타고 돌기로 했다. 가끔 여행에는 일탈이 필요하다. 그 일탈의 시작은 같은 길을 다시 걷지 않는 것이다. 나도 그렇지만 이번에 동행한 이 선생 역시 그런 부분에 익숙한 분이다. 우리는 뜻이 맞았다. 순례자의 길은 아직 정비 중인 모양이었다. 항구까지 산길을 걷는 내내 우리만 있었기에 모처럼만에 호젓한 산길을 만끽할 수 있었다.    

 


길을 가다 보니 조금 가파른 언덕이 나왔다. 예수가 걸으셨던 골고다 언덕이 연상되었다. 나는 감히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갈 때 어떤 느낌이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아마도 그때의 척박함과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조롱의 바다를 건너고, 굴욕의 늪을 헤쳐 골고다 십자가 언덕으로 향하셨다. 자신이 순교할 줄을 아시면서도 가야 하는 그 고통의 시간들, 그런 마음 때문인지 걷는 길은 척박하고 마른풀에서 가을 냄새가 풀풀 풍겼다.      


십자가를 메고 예수께서는 그 골고다 언덕을 오르며 피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마다하지 않고 나의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며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다. 제법 가파른 언덕 위로 올라가는 내 느낌이 바로 그 기분이었다면 지나친 과장이었을까. 하지만 그때만큼은 나는 온전히 그 느낌을 맛볼 수가 있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가까울 거라고 생각했던 착각 때문이었을까. 길은 제법 길었고 어느덧 슬슬 지칠 무렵 내려오다 보니 처음 출발했던 선착장이 보였다.      


10코스 11코스 12코스를 거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셈이다. 그런데도 느낌이 나쁘지 않다. 처음에 길을 나섰을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다시 길을 걸으며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9코스로 향했다. 9코스 <작은 야고보의 집>은 물고기 형상을 닮아 있었다. 사실 물고기는 예수와 인연이 깊다.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것도 물고기였고, 첫 제자인 베드로와의 인연 시작도 물고기에서 비롯한다. 기독교를 상징하는 상징물이 물고기였던 것은 우연이 아닌 셈이다.      



아마도 이 길을 기획한 이는 각각의 사도길에 있는 집을 요청할 때 크기와 의미 등을 작가에게 의뢰했을 것이다. 불과 두세 평에 불과한 집이 12사도의 생애와 만날 때 얼마나 빛을 발할 수 있을까를 내심 걱정했을 수도 있다. 작가는 사도들이 걸었던 순교의 삶을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서 또 얼마나 많이 고심을 했을 것인가. 각각의 공간이 갖는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 현장을 답사하고 거기에 어울리는 디자인을 찾기 위해 고민했을 것이다.      


우리가 처음 갔던 10코스만 해도 그렇다. 가까이에서 창밖 사진을 찍으면 나무가 보이는데 시야를 조금만 바꾸면 배가 눈에 들어온다. 프레임을 바꾸는 동안 다른 세상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창에서 보이는 세상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9코스를 지나 산길로 오르는 도중에 숙소 주인장에게 전화를 했다. 숙소는 8코스 근처에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숲길은 제법 길었고 해변을 따라 걷고 있노라니 제주 올레길이 생각났다. 이제는 사람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묵정밭이 되어 버린 땅들. 그런 땅이 주변에 널려 있었다. 길을 걷다 보니 육지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나비들이 여전히 이곳에 남아있다. 네발나비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산호랑나비에 팔랑나비를 비롯해서 부전나비와 내가 그동안 사진으로 봤던 뾰족부전나비도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사진을 하도 많이 보아서인지 보자마자 바로 뾰족부전나비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식물 탐사를 가서 사진을 찍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간다. 그러다 보니 별로 몇 장 찍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기다리는 사람 입장에서는 상당히 시간이 흐르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정말 황당했다. 숙소에 도착했는데 갈 방법이 없다. 도착했을 때가 3시 45분경이었는데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노둣길은 6시가 넘어서야 열렸으니 말이다.      


처음에 나는 마치 갯벌이 드러나듯이 바닷물이 전체 빠진 길을 걸어갈 거라고 착각을 했다. 그래서 이 많은 물이 빠진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그런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알고 보니 바다 한가운데 돌을 쌓고 그 길이 물이 빠질 때 드러나서 사람들의 왕래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우리 발목을 붙잡고 애를 먹이던 물길이 열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러다 보니 상황에 감사하기로 했다. 평생을 살면서 이런 경험을 몇 번이나 하겠는가. 나 역시 신안을 1년 가까이 다니면서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또 시간의 힘에 맡겨보기로 했다. 우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바다가 수억 년 동안 반복했을 그 행위를 외경의 눈으로 바라보는 기회를 가졌다.      


오래 기다린 때문인지 바다에 길이 열렸다는 기쁨이 한꺼번에 밀려 왔다. 긴장해서인지 시장기도 느껴졌다. 이번에 신안에서 만난 노둣길은 제법 규모가 컸다. 차가 다닐 정도다. 그렇게 어렵사리 만난 8코스 <마테오의 집>인지라 마음이 각별했다. <마테오의 집>의 별칭은 기쁨의 집이다. 나는 노둣길에서 그 작은 기쁨이 주는 환희를 만났다. 


     


노둣길을 건너자마자 우리를 그토록 애간장 태우게 했던 게스트하우스가 보였다. 8코스 <마테오의 집> 사진을 찍고 숙소로 가면서 얼마나 감사했던지. 평소라면 일찍 숙소에 들어가서 여장을 풀고 쉬었다가 편하게 저녁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저녁 식사는 몇 시간을 기다려서 바닷길을 뚫고 와서 만나는 식사인지라 더 각별했다.      



숙소 식당에서는 신안의 별미라는 김전과 갑오징어 초무침을 시켜 먹었다. 시장해서인지 맛이 있어서인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먹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소악도와 소기점도를 만났다. 9월이 다 끝나가는 어느 날 나는 12사도 길에서 자연이 전해주는 그 장엄한 이야기를 받아 적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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