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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Sep 30. 2022

섬에 갇히다

평생 살면서 처음으로 눈앞에서 바다가 열리는 경험을 하였다. 말로만 듣던 노둣길이었다. 노둣길에 대해서는 퍼플 섬에 갔을 때 이미 들었던 바는 있지만 직접 눈앞에서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 12 사도 길을 대기점도 베드로의 집에서 시작하려 했다가 소악도에서 시작한 참이었다. 10코스, 11코스, 12코스, 9코스를 지나 어찌어찌해서 숙소가 있는 게스트하우스까지 왔는데 바로 코 앞에서 바다가 도무지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망연자실, 바다가 길을 열어주지 않는데 방법이 없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눈앞에 숙소를 두고 한참을 기다렸다. 그런데도 도무지 물이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다가 밤이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한참을 기다렸다 숙소 주인장에게 전화를 하자 6시 무렵이나 길이 열릴 거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렇다면 얼추 2시간 반을 기다려야 한다. 그동안 다른 이들의 12사도 길 이야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노둣길이야말로 그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낯선 이에게는 당혹스러움으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시간도 아깝고 해서 우리는 미처 가보지 못했던 곳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마침 노랗게 익은 벼를 수확할 철이었다. 이렇게 많은 벼를 심을 정도로 섬이 크다는 사실도, 그리고 학교 느낌이 들어서서 다가가 보니 증도 초등학교 소악도 분교가 나왔다. 섬에 있는 분교, 하지만 지금은 폐쇄되어 버린 분교. 이곳에서도 한때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행복했던 추억이 있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 학교는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규모는 그다지 크지는 않았다. 폐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시설이나 주변도 어느 정도 관리가 되어 있었다.     



분교 바로 옆에는 소악교회가 있었다. 만약 노둣길이 닫히지 않았더라면 모르고 지나쳤을 곳이다. 아기자기하게 꾸민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소악도며 소기점도 등을 꽃밭의 소재로 삼았다. 문준경 전도사가 고무신 아홉 켤레가 다 닳도록 돌아다녔다는 곳이 바로 신안이다. 그 신앙의 힘으로 이곳에 12사도길이 만들어지고 지금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처음에 숙소 주인장에게 물어봤을 때 대기점도에 내려서 1코스 <베드로의 집>부터 오면 좋겠다고 했다. 대기점도 코스를 돌고 숙소에 도착한 이후에 쉬었다가 8, 9, 10, 11, 12코스로 갈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곁들여졌다. 하지만 병풍도가 걸렸다. 봄부터 가려던 참인데 가을에 맨드라미 축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미뤄두었던 셈이다. 병풍도는 지금 맨드라미 축제를 위해 한창 준비 중이다.      


그렇다면 12사도길 1코스부터 12코스까지 다 갔다 온 이후에 다시 또 병풍도를 가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한 곳만 목표로 삼는 것이 정상이지만 이번에는 병풍도에서 맨드라미 축제가 있다니 같이 보자는 데 의견이 모아다. 배표는 대기점도까지만 끊은 상태였다. 상황을 알 수 없어 다시 숙소에 전화를 하니 만약 병풍도에 가면 바닷물이 차서 건너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 돌아왔다. 만약 병풍도에 가더라도 6시면 물이 잠겨 나올 수 없다는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그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뜻을 알 수 없었으나 시간이 지난 후 생각해보니 무리를 하지 않기 잘했다. 선원의 이야기로는 소악도에서 내려서 가는 게 제일 좋으리라는 의견이었다. 우리는 그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다시 주인장에게 물어보니 그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마침 우리가 탄 배가 소악도에 도착하기 직전이었다. 우리는 서둘러 짐을 챙겨서 내렸다. 소악도에서 처음 만나는 10코스는 유다 타대오의 집이다. 항구에 내려 <쉬랑께> 카페를 지나서 왼편에 바로 보이는 그 집이다.      



12사도길을 떠난 이후 처음 만나는 집이어서 그런지 느낌이 푸근하다. 섬에 내려 걷는 내내 오랜만에 가져보는 마음의 평화가 밀려온다. 다른 사람이 누리지 못하는 이 평화로움을 맛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동안 신안에 올 때마다 몇 번이나 오려고 마음먹었던 12사도길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동행한 이 선생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 집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창을 보는 관점에 따라 밖의 풍경이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시선을 낮추면 나무가 보이고, 시선을 높이면 배가 보인다. 섬이라는 멋진 배경 때문에 창밖에 있는 모습도 하나의 근사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창밖 풍경 자체가 또 하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우리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연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집에서도 그걸 느꼈다. 


동행과 걷는 길은 혼자 걷는 길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동행이 있다는 것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있다는 존재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진다. 잔잔한 길을 걷다 보니 11코스 시몬의 집이 나온다. 소나무 숲길에 위치한 집 너머로 바다가 한가득 펼쳐져 있었다. 바다를 보는 순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아, 이 눈부신 바다. 온전히 이곳에서 누리는 시간이야말로 내 것이다.     




12코스 가롯 유다의 집은 딴섬에 위치한다. 딴섬이라니 이건 또 뭔 말인가 싶었다. 12코스는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인 가롯 유다의 이름을 딴 집이다. 예수를 팔아넘기고 인류의 적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불행한 영혼이 이곳에서 비로소 자기 이름을 얻었다. 기대를 하고 갔으나 물이 제법 들어차서 도저히 건너갈 수가 없다. 만약 물길이 열렸다면 아마도 건너가서 구경을 했을 터였다. 



우리는 멀리서 집을 흠모하며 사진을 찍었다. 만약에 물길이 이어져 있을 때 갔던 사람들은 이 풍경을 담지 못했을 것이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깨우치는 지혜가 생긴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도 있는 법이다. 가롯 유다의 집이 그렇다. 이천 년 전, 예수를 배신하여 불명예를 얻은 유다는 이렇게 또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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