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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Jul 25. 2023

돌로미티에 가거들랑


몇 년 전 가족들과 함께 한 달 동안 유럽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프랑스를 거쳐 이탈리아, 스위스로 도는 코스였는데 매일 밤마다 동선을 짜느라 고심했던 기억이 있다. 다른 곳은 큰 무리가 없었는데 남프랑스에서 딱 막혀버렸다. 지도만으로는 도저히 동선이 그려지지 않았다. 다녀온 사람의 글을 읽어도 코스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한 달 반짜리 여행 코스를 짤 때도 그렇게까지 절망하지는 않았는데 그때는 여행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번에 우쓰라님이 소개해 준 코스를 보다 보니, 이 코스 하나하나가 그냥 나온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여행지에서 깃발만 보고 따라간 사람은 그 심정을 모른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직접 코스를 설계하고 동선을 짜본 사람은 여행 동선 짜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바로 이해했을 것이다. 오늘 강의에 참석한 이들에게 2장짜리 자료를 만들기 위해 또 얼마나 고심했을 것인가. 쉽지 않은 일이다.      



나 역시 2월에 나비를 좋아하는 이들을 위한 태국 여행 일정을 짠 적이 있다. 현지 일정을 담당한 이가 무산되는 바람에 엉겁결에 나에게 넘어온 일이었다. 교통편은 어찌한다 해도 제일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숙박과 식사였다. 두세 명이 하는 것과 10여 명이 움직이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제약이 많다. 사람이 많다 보면 사람들마다 개성이 강하기도 해서 불평을 토로하는 이가 한두 명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우쓰라 여행 팀에 합류하여 돌로미티를 다녀온 사람들은 오랜 여행의 노하우만이 아니라 사진 찍기에 적합한 최적의 장소까지 곁들여 누리는 행운을 가진 셈이다.      


거기다가 터무니없는 가격에 맛은 떨어지는 스위스나 이탈리아 음식에 질리지 않고, 오랜 여행의 내공이 더해진 음식까지 먹었다니 그야말로 최상의 여행을 다녀온 것이 아닐까 싶다. 고기 일변도의 식사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음식 문제는 입이 짧은 이들에게는 숙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야말로 눈이 즐겁고 입이 호사를 누리는 그런 여행이었으리라 짐작이 간다.      


강의 중간에 샌드위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스위스 2천 미터급에서 잠시 차를 세우고 쉴 때였다. 혼자 자전거를 끌고 온 친구가 융프라우를 보면서 자기가 준비해 온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나는 넋을 잃고 그 친구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그보다 더한 레스토랑이 어디 있겠는가. 나로서는 2천 미터 높이를 자전거를 타고 올라온다는 자체가 상상조차 불가능했을뿐더러, 그렇게 멋진 자신만의 식사 장소를 선택한 그의 혜안에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아마 그 순간 그는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든든하게 한 끼를 해결하고 룰루랄라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알프스를 제대로 맛보았을 그가 한없이 부럽기만 했다.      


여행지 두세 번만 다녀와도 고수인 것처럼 흉내 내는 이가 넘치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이번 팀은 돌로미티를 대여섯 번이나 다녀온 고수를 만났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어느 마을에 들어서면 어디가 물건이 좋고, 값싸고 저렴한 식자재를 구할 수 있다는 것쯤은 눈에 선할 것이다.     


오늘 확실히 돌로미티에 대한 강의를 들으면서 기존 여행과 우쓰라 여행의 차이점을 깨닫게 되었다. 나도 역시 그랬지만 대개의 여행은 동선을 짜는 걸로 시작해서 끝난다. 동선이 나와야 어떻게 이동할 것이고, 어디에 머물고 무엇을 먹을 것인가 가능하기 때문에 여행지에서 동선은 날씨만큼이나 중요하다. 여행지에서 한 번 잘못 든 길은 엉뚱한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이상을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 동선이 나오면 그게 전부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자유여행이건 패키지여행이건 다녀온 후에 시간이 지나면 내 것이 되지 않고, 어디를 다녀왔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여행의 주체가 되지 않고 여행사나 다른 여행에 얹혀가는 방식이기 때문에 여행을 다녀온 이후에도 여행지의 기억들이 마치 손에서 모래가 빠져나가듯이 사라져버리기 마련이다. 중간중간에 먹었던 맛있는 음식이나 멋진 풍경만이 빛바랜 훈장처럼 남을 뿐이다.     


당연히 공간에 대한 고민이나 지역에 대한 이해는 수반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자신이 가야 할 곳에 대해서 배우고 공부하는 것을 싫어한다. 심지어 쉬기 위한 여행에서 그런 것까지 고민해야 하냐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그들의 관심사는 어디에 가서 맛있는 것을 먹을 것인지, 어디에 가서 인생샷을 남길 것인지가 관건이다. 매우 드물게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이도 있다.      


반면에 어떤 이는 사소한 데 집착하지 않고 좀 더 큰 그림을 보는 데 익숙하다. 어디에서 출발해서 어떻게 동선을 짜고,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당연히 남들이 갔다 편한 길 대신에 새로운 루트를 짜고 개척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힘들고 고달프다. 그렇다고 알아주는 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등산하는 이들은 기존에 남들이 개척한 루트보다 남들이 가져야 하는 새로운 루트에 대한 동경이 크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길을 개척하다가 목숨을 잃기도 한다. 남들이 이미 거쳐간 길의 식상함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은 죽음을 두렵지 않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고생해서 만든 이정표에는 그의 이름이 붙는다. 그 이름은 그가 세상에서 사라진 후에도 남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이번 돌로미티 강의를 들으면서 내가 느낀 것은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는 긍지와 자부심이었다. 그런 이들에게는 같은 공간을 가더라도 같을 수가 없다. 매번 다른 시선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는 체질적으로 동일한 코스를 부정한다. 그에게는 보이지 않던 세계를 넘어서는 것이 또 다른 여행의 시작이다.      


                                               야생화 천국, 돌로미티, 사진: 우쓰라 카페 


언젠가 내가 돌로미티에 가게 된다면 오늘은 활자로만 보았던 지명들을 하나씩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발로 뛰고 온몸으로 부대끼게 만든 코스를 따라가며 때로 감탄하고 때로 절망하고, 웃고 울며 돌로미티의 속살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 나는 돌로미티 강의 끝난 후에 호프집에서 마셨던 시원한 맥주 한 잔을 그리워할지도 모르겠다.      


                                                  찍으면 바로 예술이 되는 돌로미티, 사진: 우쓰라 카페 



그가 보여주었던 풍경을 사진이 아니라 눈앞에서 마주하면서 어렴풋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그가 그 강의에서 건네주었던 수많은 정보들이 단순한 지식이나 여행지에 대한 소개만이 아니었음을, 자신의 진심을 담아서 돌로미티를 사랑했던 한 사내가 여행 초보들에게 보내는 뜨거운 연서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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