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초 산장의 특징 중의 하나는 산장 아래에 펼쳐지는 장쾌한 텐트촌이다. 겨울철 눈밭에 꽃처럼 피어 있는 텐트를 본 적이 있다. 산장의 조금 더 아래까지 내려가 보았지만 그 유명한 텐트촌이 도무지 어느 지역쯤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여름철에 눈이 녹고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하면 텐트촌은 전국 각지에서 찾아든 이들로 붐빈다. 여름 산 아래 수많은 불빛이 반짝이면 이 적막했던 산에도 산사람들의 웃음소리며 가뿐 숨소리가 넘쳐날 것이다.
저녁식사를 한 이후 달리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은근 쏟아지는 별을 기대했건만 하늘에는 별 몇 점만이 반짝일 뿐이었다. 혹시 하는 기대감으로 좀 더 기다려보았지만 날씨는 여전했다. 라이초 산장 자체가 고지라서 그런지 잠시 밖에 있는 것만으로도 제법 쌀쌀했다. 숙소에서 제공해준 담요는 두툼했지만 추위가 가시지는 않았다. 혹시 몰라서 가져간 핫팩을 뜯어 사용하니 조금 나아졌다. 그제야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일출시간을 확인하자 새벽 3시 35분이었다. 산이라 그런지 내가 생각하는 일출시간과는 많이 달랐다. 일단 알람을 맞추어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잠결에 빗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4시가 조금 넘어서 나가 보니 이미 날이 밝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이미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전날 서울에서 왔다던 대규모 일행 중 일부는 이미 나와서 풍경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하늘을 보니 아침 일출을 보기는 틀렸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서 비몽사몽간에 누워 있다 보니 점점 빗줄기가 굵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잠깐 존 사이에 내가 머무는 방과 인접한 산장 입구가 시끄럽다. 아마 사람들이 산행을 나서는 모양이었다. 산행을 떠난다는 일행은 7시 예정이라고 했다. 산행팀은 아침식사가 6시 30분부터이니 이미 아침을 먹고, 점심 도시락까지 챙겼을 것이다. 잠시 나가 보기로 했다. 어차피 나야 산행이 목적이 아니니 아침 눈의 대계곡 개장시간에 맞추어 느긋하게 움직이면 될 터였다. 7시 반쯤 출발했던 산행팀은 잠시후에 그냥 돌아왔다. 말을 들어 보니 거센 비와 바람 때문에 100미터를 채 못 가고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는 것이다. 얼굴을 때리는 비가 마치 얼음으로 얻어맞는 느낌이었다는 말이 이어졌다. 이구동성으로 비를 맞은 손이 너무 추워서 도저히 더 진행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새벽까지만 해도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줄기는 어느새 거센 빗줄기와 강풍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직 출발까지는 여유가 있었으므로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나와서 커피를 마셨다. 산행을 나섰던 이들은 이곳에서 이틀 연박을 한다고 했다. 보통 트레킹을 계획한 이들은 10시간쯤 산행을 하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하루를 더 묵는 스케줄을 택한다. 짐이 많다 보니 이곳을 베이스캠프 삼아 짐을 부려두고 가벼운 차림으로 트레킹을 하고 저녁에 돌아와 쉬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일기가 좋지 않고 어차피 산행은 불가능하니 달리 방법이 없다.
나 역시 출발을 잠시 미루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비는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문을 열면 강풍이 그대로 들이닥쳤다. 마치 여름날 장맛비가 몰아치는 느낌이었다. 비도 비지만 바람이 너무 거세기 때문에 더 큰 문제라는 이야기를 이구동성으로 하였다. 더군다나 이곳은 2400미터 고지이다. 그들도 문제였지만 나도 문제였다. 이런 악천우 속에서 30분을 가야하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가이드 생활만 10년이 넘었다는 분은 올해 설벽이 눈도 적게 오고 비도 많이 와서 대부분 일찍 녹았다는 말을 푸념처럼 흘렸다. 작년에는 참 좋았다며, 다음에는 좀 더 일찍 오라는 말이 뒤따라왔다.
한 시간을 기다려도 날씨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다시 한 시간을 기다리다 보니 마음이 급해졌다. 오늘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지금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구로베 댐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다테야마를 거쳐 도야마로 가야 한다. 아무리 비가 온다고 이 산 속에서 하루를 더 머물 수는 없었다. 사실 나고야에서 도야마로 직행한 이유는 날씨 때문이었다. 여행에서 날씨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다른 것은 다 어떻게든 할 수 있지만 날씨만은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다.
여행에 나서기 전에 일기 예보를 보니 내가 떠나오는 날까지 도야마와 다테야마 지역은 계속 흐림 아니면 비였다. 처음에는 도야마 알펜루트에 오르는 시간을 바꿔보려고도 했으나 이런 식이면 날짜를 바꾸는 게 의미가 없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무조건 떠나야했다. 다행히 무로도에 머문 첫날은 날씨가 좋아서 해지는 풍경까지 볼 수 있었다. 만약 어제가 오늘이었더라면 끔찍했을 것이다. 그 비를 맞고 산장에 올 수는 없었다. 어떤 식으로건 결단을 내려야 했다. 문득 창밖을 올려다 보니 스키를 들고 이동하는 이들이 보였다. 이런 날씨에 스키라니. 미치지 않았으면 정말 좋아하는 걸게다.
그러고 보니 산장 입구쪽에 스키와 스노보드가 가지런히 놓여 있던 게 생각났다. 그만큼 스키와 스노보드를 즐기는 이들이 많다. 만약 이 비바람 속에 저들이 나갔다면 나 역시 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비가 잠시 약해진 사이 단단히 준비를 하고 산장을 나섰다. 걱정스러운 이들의 시선이 등 뒤로 느껴졌다. 사실 여행을 다니면서 날씨 때문에 고생한 적이 거의 없다. 적어도 날씨는 내 편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믿기로 했다. 산길을 걷다 보니 생각보다 비는 오지 않았다. 몰아치는 바람도 우산으로 막다 보니 견딜 만했다. 운수가 좋아서인지 오는 길에는 뇌조 몇 마리를 한꺼번에 보기도 했다. 한 마디도 아니고 몇 마리를 보다니, 오늘은 당연히 운이 좋으리라.
도야마 알펜루트를 떠나게 만들었던 사진!
무로도 터미널에는 어제와 달리 이미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내가 우려했던 날씨 따위는 걱정조차 하지 않는 눈치였다. 예전에는 최고 높이가 23미터였다던 눈의 대계곡은 올해는 그리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한국도 그렇지만 올해따라 눈이 적게 오고 비까지 많이 오는 바람에 눈높이가 생각보다 많이 낮아져 있었다.
터미널에서 눈의 대계곡으로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대계곡은 전체 구간에서 500미터쯤만 개방한다. 비록 날씨는 좋지 않았지만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사진을 찍으며 매우 즐거워했다. 하기야 살면서 이런 장관을 볼 수 있는 게 몇 번이나 있겠는가!
무로도에서 구로베로 가는 길은 다행히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극성수기를 넘긴 후라 아무래도 사람들이 적어진 덕분이었다. 구로베댐(KurobeDam , 黒部ダム)에 가기 위해서는 트롤리버스와 케이블카를 번갈아 타야한다. 그래서 이 구간을 여행하는 이라면 고원버스-트롤리버스-케이블카를 골고루 타는 특이한 경험을 한다. 길고 힘들다고, 이 구간을 만든 사람도 있는데 그런 터무니 없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실제로 눈앞에서 본 구로베 댐은 이미 들었던 그대로 장대하기 이를 데 없었다. 토목구조물의 전형적인 모델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구로베댐은 외형적인 규모에서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구로베 댐을 보는 순간 어쩌면 인간이 자신들의 한계를 시험하고자 했을 때, 이런 악조건과 싸웠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인간의 꿈을 본다
이 댐을 만들기 위해 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청춘을, 어쩌면 목숨을 바쳤을 것이다.
저 까마득한 높이의 댐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꿈과 가족과 이웃을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자리에 섰을까
구로베 댐에서 바라보는 하류는 그래서 애잔하다
자연에 맞서 싸운 인간의 마지막 모습이
이 자리에 섬처럼 남아 있다
자신을 이기기 위해, 자연을 넘어서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 수많은 이들의 함성이
오늘도 저 댐에 서려 있다
- <구로베댐 전망대에서>
간사이 전기회사가 만든 이 댐은 연인원 1,000만 명이 동원되어 1963년 완공한 세계 최대의 아치식 돔형 댐으로 일본에서 가장 큰 수력 발전댐이다. 표고 1,454미터인 구로베 댐의 가장 높은 높이는 186미터, 너비는 492미터이다. 구로베 댐에서 생산하는 연간 전력량은 100만 킬로와트, 100만 세대가 1년간 사용할 수 있는 양이다. 인간은 이런 곳에 댐을 짓겠다는 무모한 상상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상상의 끝을 보고 있다.
댐을 건너면 왼편에 전망대가 있다. 220계단을 올라야 만날 수 있는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댐 전경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지금까지 보았던 구조물 중 단연 가장 큰 규모였다. 이곳에 서면 인간의 욕망을 실감한다. 대자연과 맞서겠다는 무모한 상상을 하고, 그걸 실천으로 옮긴 이들의 집념이 무섭다.
게다가 주변 경관 또한 뛰어나기 때문에 단순히 댐을 보는 이상의 즐거움을 준다. 전망대까지 오른 사람들은 이곳에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담 주변을 조망하기도 한다. 이곳에서는 자연스럽게 댐의 외곽도 볼 수 있는데, 그 아찔한 높이 때문에 쉽게 발길이 옮겨지지 않았다. 6월부터는 유람선도 운행한다고 한다. 도야마로 돌아오는 길은 어제 지나왔던 반복이었지만 어제와 느낌은 완연히 달랐다. 분명 같은 길을 오고 갔지만 느낌은 전혀 다르다. 그게 단지 날씨 때문이었을까?
다테야마 산 속에서 꼬박 하루를 지냈다.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2400미터에서 하루를 보내는 경험은 특별하다. 그 밤에 별이 쏟아지는 건 못 보았지만 바람이 건네는 몇 마디는 전해들은 것도 같다. 가끔 우연한 인연이 특별하게 바뀌는 순간이 있다. 블로그에서 본 알펜루트 사진 한 장이 나를 도야마로 이끌었던 것처럼,
아마도 앞으로 몇 년쯤은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마다 서늘하고 눈부셨던 라이초 산장의 여름밤을 그리워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