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의당 노동자 Oct 25. 2019

차별과 혐오에 대처하는 자세

'나도 차별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때.


물론 예전부터 이어져 온 것이기는 하나, 최근 들어 더더욱 이슈로 떠오른 가장 큰 사회문제 중의 하나가 바로 혐오와 차별에 대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아무래도 정치 분야에 몸을 담고 있기에 이에 대한 여러 생각들과, 해결책에 대한 고민들에 가장 많이 골몰했던 것 같다.   





얼마 전, 땅콩 회항으로 유명한 박창진 위원장과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갑질' 피해로 유명한 분이다 보니 우리 사회의 '갑질'과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이야기하게 되었었고, 이때 나의 그 고민들에 대한 해결책의 실마리를 얻고 싶어 질문을 던졌다. 


심오하고 어려운 주제일지도 모르지만, '우리 사회의 차별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해결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를 질문했고, 그 역시 정확한 방도는 잘 모르겠다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일련의 갑질들과 싸워가는 그 과정 속에서 느끼는 바는 하나 있었노라 덧붙였다. 


  나는 차별에서 예외라고 생각했는데, 나 역시 언제든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땅콩 회항 사건 이전, 그는 지난 10년 간을 관리자로서 일을 하며 의도치 않게 누군가를 평가하여 차별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기에 단 한 번도 본인이 차별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하지만 최상층의 권력과 대립하게 되며 권력의 외부로 떨어지게 되자, 바로 혐오와 차별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며 '나도 언제든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었구나'라는 것을 비로소 느끼게 된 것이다.


더불어 그는 "다수는 차별 속에 속해있으면서도, 나는 그 차별의 대상이 아니라고 착각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이런 것을 이용해 아랫사람들끼리의 차별을 흥행시키고, 본인들은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라고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와 닿는 것이 있었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어떤 카테고리 안에서 내가 차별의 대상에 해당하지 않게 되면, 차별의 대상에게 가해지는 혐오에 대해 작게는 침묵을 지키거나 무관심하거나, 크게는 직접적인 혐오를 가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는 모두 내가 그 '차별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암묵적인 안심이 깔려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나는 이동권 투쟁을 하는 지체 장애인들을 보며, 무의식 중에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들의 투쟁을 안쓰러워만 하거나, 마음속으로 응원만 보탤 뿐 실질적인 목소리를 낸 적은 없었지 않은가. 그런가 하면 공공장소에서 오열하는 아기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아이가 없는 나는 그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 적이 여러 번 있었지 않은가.  


그리고 이러한 차별과, 불편한 시선을 바탕으로 한 혐오를 해결할 힘이 있고, 책임을 가지고 있는 권력층에서는 이를 '개인 vs 개인'의 싸움으로 국한시키는 방법을 의도적으로 택한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효율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차별에 대한 해결책에는 큰 비용이 소요되는데, 조용히 얼굴을 숨기고 아랫사람들끼리의 차별을 조장만 하면 값싼 방법으로 책임이 회피되는 이득을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그들은 꽤 오랫동안 요구되어 온 장애인의 이동권 문제를 좀처럼 해결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극단적인 방법으로 운행해야 하는 고속버스 앞에 드러누워 시위를 벌이는 지체 장애인들과, 그로 인해 불편을 겪는 비장애인 시민들 간의 혐오 감정을 조장한다. 국가가 나서서 국민들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권유하면서도 그들이 맘 놓고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있는 복지 시설이나 시스템은 너무나도 더디게 마련하고 있다. 그리고는 아이가 있는 사람들과, 아이가 없는 사람들 간의 혐오 감정을 조장한다. '어쨌든 누구의 잘못이냐'를 가지고 싸우는 사이, 근본적인 해결의 힘과 책임을 가진 이들은 슬쩍 이 논쟁에서 발을 빼 버리는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사회를 좀 먹는 수많은 차별과 혐오 감정에 대한 해결책은 이러한 '인식의 전환'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애 발생의 원인 중 후천적 원인이 89%나 되는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결국 비장애인일지라도 누구나 장애인이 될 확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아이가 없다고 할 지라도 본인에게 아이가 생길 수도 있고, 가족 중에 아이가 생길 수도 있다. 박창진 사무장과 같이 회사 내 관리자의 위치에 있다가도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될 수도 있다. 


비정규직 vs 정규직의 관계에서 정규직으로서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해도, 임원 vs 사원의 관계에서 사원으로서 비도덕적인 임원에게 부당한 갑질을 받게 되며 철저한 을이 될 수도 있다. 브라운관 속 연예인의 모습을 보며 이것저것 외모에 대한 평가를 일삼던 이가, 어느 곳에 가서는 평가를 당하는 위치가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차별과 혐오는 특수한 어떤 대상에게 행해지는 것도 아니고,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무수한 사회의 카테고리 속에서 언제는 내가 우위의 위치를 점하고 있을 지라도, 경우에 따라 또 언제는 을의 위치에 있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차별의 문제들은 결국 먼 타인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인식의 전환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수많은 사회 속 차별의 문제들이 조금은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