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스스로의 공신력에 대한 재고와 반성이 필요한 때.
언론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얼마 전 연예인 설리 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를 세상과 작별하게 한 숱한 이유들을 함부로 추측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적어도 언론이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포털 사이트의 뉴스 카테고리에는 생전 그의 이름이 매일 같이 오르내렸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사 속에서 늘 그의 이름 앞에는 자극적인 수식어와 태그가 따라붙어 있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그렇다면 그가 떠난 후에는 또 어떠한가. 자살기사 보도윤리도 지키지 않은 채, 조회수에 급급해 시시각각으로 자극적인 내용의 기사를 양산하는 모습을 보여 눈살을 찌푸리게 한 것으로도 모자라, 일부 언론은 태그에 고인을 모독하는 자극적인 수식어를 달아놓기까지 했다.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악플을 방조하고, 부추긴 데에 큰 책임을 갖고 있으면서 최소한의 자성의 태도도 없이 악플에 대한 비판을 늘어놓는 기사만 연이어 올라오고 있다.
전국을 강타한 '태풍 미탁' 때에는 또 어떠한가. 10명의 사망자를 비롯한 18건의 인명 피해를 비롯해 2000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한 상황에도 그들은 조국 전 장관과 관련한 뉴스, 양 진영에서 벌어진 시위 대립에 대한 뉴스 보도를 우선으로 쏟아냈다. 국민의 생존권이 걸려있는 국가적 재난의 상황에서 그들은 국민의 안전을 우선으로 하지 않았다.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자극적인 헤드라인과 분열을 부추기는 기사, 왜곡된 사실로 여론을 호도하려는 의도를 가진 기사 등 언론의 윤리를 지키지 않은 기사들을 마구잡이로 생산해 스스로 공신력을 잃게 만든 것이 언론의 현주소다.
최초의 언론윤리강령은 미국에서 1923년 만들어졌다. 그보다 30여 년 뒤인 1957년 4월 7일 '신문의 날' 제정과 함께 '신문윤리강령'을 처음으로 마련한 것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역시 언론윤리강령이 존재한다.
총 7개 조로 구성된 현재의 신문윤리강령을 살펴보면, 제1~3조에서 언론의 자유와 책임 그리고 독립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2조에서는 언론의 책임으로서 건전한 여론 형성, 공공복지의 증진, 문화의 창달, 국민의 기본권 수호를 천명하고 있다. 제4조에서 언론의 진실 보도, 객관 보도, 공정 보도를 결의하고 있으며, 제5조는 개인의 명예와 사생활 존중을, 그리고 제6조에서 반론권의 존중과 매체 접근권의 허용, 제7조에서 바른 언어 사용을 포함한 언론인의 품위 유지를 명시하고 있다.
언론의 역할은 다른 조직이나 집단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감시자', '비판자'다. 누군가를 감시하고 비판해야 하는 역할에는 당위적으로 엄격한 윤리성이 따라야만 한다. 그렇기에 위 윤리를 어기는 순간 언론의 존재 이유도, 그 근간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언론은 어떠한가. 과연 언론이 해당 윤리 강령을 잘 지키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현재 수많은 매체 중 다른 분야들과 마찬가지로 정치, 사회 분야에서 역시 강세를 보이고 있는 매체는 바로 유튜브가 아닐까 싶다.
언론에게만 감시자와 비판자의 역할을 맡겨두었던 과거와 달리 한 개개인들이 직접 스마트폰과 카메라를 들고 수많은 정치·사회의 현장으로 나와 스스로 감시자와 비판자의 역할을 기꺼이 떠맡고 있다.
물론 미디어의 형태와 환경 변화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그러나 '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공중파, 신문에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는 데에 반해 유튜브에서 나온 정보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신뢰하고, 주 매체로서 찾아보고 있는 것인지.' 이 대목에서 분명 언론이 느끼는 바가 있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