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지않은 상황에서도 더 나은 삶을 고민해 온 사람, '장혜영'의 이야기
'오직 나여야 할 이유도 없지만, 내가 아니어야 할 이유도 없기에' 정치를 시작했다는 장혜영 위원장의 앞으로의 정치 활동과, 정의당 미래정치특별위원회가 그려 갈 환한 미래를 기대하며, 장혜영 미래정치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소개하는 그 두 번째 이야기.
사실 아직도 나는 세상이 이해 가는 것 보다, 안 가는 게 더 훨씬 더 많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여러 삶의 형태로 서로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살지 않는가. 사람들을 딱 나눠서 ‘나쁜 사람들 VS 좋은 사람들’로 분류하여 ‘나쁜 사람이 되지 말고, 좋은 사람이 되자’라고 이해할 수 있으면 굉장히 편할 것 같다. 근데 그게 아니지 않은가?
이를테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어떤 사람의 삶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 나름대로의 삶의 선택에 대한 이유와 관점들이 있다. 이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세계 속에서 어떤 개인으로 살아갈지를 선택하는 것은 사실은 거의 울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 같다. 옳고 그름에 대한 사리 판단을 하면서 산다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삶도 있고 저런 삶도 있으니까 도덕은 없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어떤 종류의 질서가 있다고 믿고 행해왔던 사람들을 통해 세상이 유지되어 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윤리와 도덕을 가지고,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볼 것인가. 나는 단순히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싶다. 유튜브 채널 소개에다가 그걸 썼던 것은 그런 곳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작은 플랫폼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맞다. 다양성이라고 하는 것은 나에게 굉장히 중요한 것. 단순히 추상적 의미에서의 다양성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다양성은 오직 추상적으로 이야기 될 때에만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다양성은 실제 삶으로 내려오게 되면 사실 ‘이질성’이라는 말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이질적임에도 어떻게 서로 상처 입히지 않고, 적정거리를 유지하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현실적인 고민이 ‘다양성’이라는 말 안에 담겨 있는 진짜 고민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사람하고만 살고, 보고 싶지 않은 사람하고는 멀어질 수 있다면 너무 편하겠지만 산다는 게 그런 것은 아니지 않나.
인종의 재구성, 성별 격차의 해소 등 새롭게 만나는 수많은 지점들 속에서 조금이라도 이익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것을 내려놓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며, 불평등 속에서 차별받아왔던 사람들은 권리를 찾고 싶어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전쟁 없이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문제는 나에게 굉장히 화두다.
사실 평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면 상대적으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역차별’이라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는 세상의 기존상식과 자신의 논리가 비슷하기 때문에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다.
장애의 영역으로 예를 들어보자. 장애가 있기에 여러 불편이 발생하는 것이므로 장애로 인한 사회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장애’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기존의 상식이다. 그렇지만 새로운 상식으로 바라볼 때, 문제의 원인은 장애가 아닌 차별이다. 장애가 있어도 차별을 하지 않으면 되는데, 차별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결국 기존의 상식을 새로운 상식으로 바꿔야 하는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새로운 상식을 받아들이면, 지금까지 차별해 온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인정을 하기가 싫은 것 같다. 이들이 지금까지의 차별을 인정하고 새로운 상식으로 바꿀 수 있도록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명확하고 냉철하게, 다양한 화법을 통해 지금까지 존재해왔던 차별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더는 그러지 않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확산해 나갈 필요가 있다.
그렇다.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바꿨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변화가 있고 때로는 그러한 사람들의 생각의 변화가 제도에 반영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제도적인 변화가 사람들의 생각을 드라마틱하게 바꾸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그런 의미에서 차별금지법을 제정한다거나, 다른 나라들의 케이스처럼 탈시설법을 제정하는 등의 제도적 변화로 사람들의 생각의 변화 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런 것을 하고 싶다.
동생의 탈 시설을 결정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해당시설에서 있었던 ‘인권침해 사태’였다. 내부고발을 통해 상습적이고 고질적인 시설의 인권침해가 드러났었다.
공론화와 해결의 과정에서, ‘시설은 보호를 제공하는 곳’이라는 오랜 환상이 산산조각 났다. 왜냐하면, 사실상 나를 비롯해 문제제기를 한 선생님들, 외부에서 함께 싸워준 탈 시설 관련 NGO 활동가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문제를 드러내놓고 해결하는 것보다는 덮으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상황이 이해가 아주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분들에게도 사실은 나름의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
시설의 문제가 드러나게 된다면 시설은 문을 닫게 될 것이고, 그러면 시설에 있던 장애인들은 각자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그들의 가정에는 그 사람들을 위한 자리가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이들에게 이 시설은 없어져서는 안 되고, 이 시설의 존립에 위협이 되는 모든 문제들은 감춰져야 하는 것이다. 그때 알게 된 것이 ‘시설이 제공하는 서비스’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돌봄’이나 ‘보호’가 아닌 ‘분리 그 자체’라는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장애인에 대한 돌봄은 전적으로 그 당사자와 가족들의 몫으로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 당사자를 돌보는 것을 포기하는 순간, 당사자와 가족을 분리시켜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장애인거주시설이다. 결코 이는 장애인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기 위한 서비스가 아니라는 것을 그 때 아프게 깨달았고, 장애인거주시설 문제와 동생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에 변화들이 있었다.
동생의 삶에서 일어났던 일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했다. 13살이었을 때 부모의 손에 의해 낯선 환경에 보내지고 삶의 주도권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있는 삶. 이것이 내 삶이었다면 나는 그것을 ‘보호’라고 말 할 수 있었을까?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동생의 삶을 보며, 동생의 얼굴을 한 ‘장애인의 삶’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명확하게 동생과 나를 차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비장애인이니까 시설에 갈 이유가 없고, 동생은 장애인이니까 시설에 보내질 수 있는 것이라고.
그런데 나와 동생이 정말 같은 권리를 가진 시민이라고 한다면, 내 삶에서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면 내 동생의 삶에서도 당연히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나아가서는 그 어떤 시민의 삶에서도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 ‘평등’의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면 더 이상 동생을 시설에 둘 순 없으며, 모든 사람들이 시설에 가면 안 된다는 심정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실천이 바로 동생을 시설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탈 시설 정책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그룹 중의 하나가 장애인들의 가족이다. 장애인들이 시설 밖으로 돌아왔을 때, 사회적 인프라가 전무한 상황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 이것은 상식적인 반발이다.
그런데 탈 시설이라는 것은 ‘시설에서 살던 장애인이 가족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지역 사회의 한 사람의 시민으로 돌아오는 것’이고 그 준비를 같이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회복지사를 많이 양성 했음에도, 과연 사회복지사들이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와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들 간의 연계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삶의 질이 서비스를 받는 사람들의 삶의 질로 이어질 수 있는 체계를 가지고 있는가?’, ‘관련 예산을 집행할 수 있는가?’ 이런 종류의 질문들이 선행되어야 한다.
아주 단적으로 말해서, 24시간 활동지원 서비스가 우리 사회에 확립이 되면 그것이 가장 단단한 탈 시설의 초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자식을 시설에 보내고 싶어서 보내는 분은 없다. 돌보다 못 해서 스스로도 엄청난 상처를 입으며 보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내려놓고 장애 당사자의 그림자로서 계속 서포트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건 누가 봐도 아주 행복한 시민의 삶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 사회가 사회 공동의 자원을 가지고 장애 당사자의 곁에서 삶을 서포트하는 노동을 제공해줄 수 있다면 가족들이 자기 삶을 포기해야 하는 이유가 사라지고,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체계를 그냥 지금 만들면 된다. 이렇게 우리가 재정건전성을 자랑하는 정부인데...(웃음) 현재 장애등급제 폐지에 대해 알맹이가 없는 ‘가짜 폐지’라고 하는 것도 장애등급제가 폐지가 되면 24시간 활동지원제도를 위한 예산이 마련이 되어야 하는데, 예산 마련 없이 그냥 이름만 폐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뭘 해야 되는지는 이미 나와 있고, 그냥 하면 된다. 그런데 안 되는 이유는 국회에 있거나, 정부에 있거나.
가장 단적인 예는 시선의 폭력이다. 동생과 어딜 같이 외출하려 하면 늘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쳐다본다. 그들에게는 길거리에 성인여성 발달장애인이 돌아다니는 거 자체가 보통의 풍경이지가 않은 것이다. 가끔은 버스정류장 등에서 서 있으면 동생을 빤히 바라본다. 그럴 때면 나도 그분을 빤히 본다. 그러면 내가 쳐다보는 것을 인식하고 딴 데를 보다가 내가 다른 데를 보면 다시 또 쳐다본다. 이 시선의 교차를 두 번 정도 하면 내가 묻는다.
“왜 보세요?” 단 한 사람도 이 말에 대답하지 못 했다. 시선을 피한다거나, 못들은 척 한다거나 자리를 피한다. 그것이 부끄러운 행동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분리되고 배제되는 삶을 살았다는 하나의 증거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장애아와 비장애아가 있다면 똑같은 실수를 해도 비장애아의 실수는, 훈련과 학습을 통해 나아질 수 있는 단순한 실수라고 여긴다. 하지만 장애아가 그런 실수를 하면 장애라서, 고칠 수 없는 것으로 단정지어버린다. 당장 더 많은 기회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아예 기회가 주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사회가 장애인들을 너무나 많이 배제한다.
‘PEOPLE, FIRST' 라는 장애인권에 관한 중요한 얘기가 있다. 장애인이기 전에 사람으로 취급하고 나서, 그 다음에 장애에 대해 얘기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장애인은 사람이기 전에 ’장애‘가 그 사람의 삶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비장애인들은 아무리 비참한 삶을 살아도 장애인 보다는 행복하다‘와 같은 관점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대화 속에서 너무 많이 만난다. 동정과 시혜의 태도를 가지게 되는 건 사실 그런 관점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장애’ 그 자체를 불행의 표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마 이것을 보시는 분들 중에서도 그런 생각을 갖고 계신 분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장애는 그냥 장애일 뿐이고. 아까도 말 했듯이 차별하지 않으면 장애는 아무 문제가 없다. 불행의 상징도 아니고 그냥 하나의 삶의 조건일 뿐이다.
어려운 질문만 하시는데... 우리 인터뷰가 이렇게 수준이 높습니다(웃음)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얘기가 있지 않나, 가장 강도 높은 차별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라고. 동생하고 살며 2년 반 동안 전국 어디에서든 불러주시면 가서 강연을 하고, 영화를 보여드리며 말씀을 나누는 등의 일들을 했는데 강의를 하러 가보면 장애인이 있는 경우가 별로 없다.
장애 활동가들의 모임에 가거나, 시설에 가거나, 특수학교에 가지 않는 이상 정말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의 삶의 공간이 유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등록 장애인 수로 따지면 인구의 5%가 장애인이다. 우리가 정말 차별 없는 사회를 살고 있다면, 어느 공간에 가든 약 5% 정도의 사람들은 장애인이어야 한다. 그런데 장애인을 만날 수 있는 공간에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장애인이고, 비장애인들의 공간에서는 거의 100%가 비장애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로 인해 그런 상태가 ‘자연 상태’라고 사람들이 느껴버림으로써 문제가 영속화 되는 것 같다. 사회적 차별이나 분리와 같은 것들은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차별적인 제도를 우리가 갖고 있어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개개인의 실천이 결국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당장은 정책적, 제도적 결단이 너무나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번 정부에서는 장애인 정책에 관해 굉장히 혼란스러운 정책기조를 가지고 있다. 장애인 복지 서비스 중 주요한 서비스의 하나로 장애인거주시설을 뽑으면서, 동시에 탈 시설을 얘기하고 있다. 장애인거주시설을 유지하기 위해 돈을 엄청나게 쓰면서 동시에 탈 시설을 얘기하는 것은, 사실 헷갈리고 있다는 뜻이다. 명확한 관점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 차별이 존속되면서 차별이 개선될 수는 없다.
사람들은 화해를 좋아하기 때문에 차별에서 곧장 화해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반성과 사과의 과정 없이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반성과 사과가 없는 일방적 화해는 이전에 차별받았던 사람들에 대한 기만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좋다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지금 그 정책을 봤을 때 그것이 어떤 시민들의 시민적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었다면 그것에 대해 반성하고, 사과하고 다음으로 이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이 변화하는 토양이 만들어질 것이다.
뭐 별 게 있겠나,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을 더 가열차게 해 나가는 것일 텐데. 처음에 정의당을 들어와서 함께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얘기를 공개적으로 했을 때 만화를 그리면서, ‘굳이 나여야 할 이유는 없지만 굳이 내가 아닐 이유도 없어서 한 번 해보기로 했다’고 쓴 것이 정확하게 지금 가지고 있는 마음이다. 책임과 권한을 가지고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정치로 펼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의당이 힘을 가져야겠지?
그렇기 때문에 정의당 안에서도 우리가 좀 더 힘 있는 정당, 좋은 정당, 정체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힘 있는 정당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해 애를 많이 쓸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시민들에게 “그러니까 우리에게 힘을 달라”는 설득을 해야 한다. 정치의 과정이라는 것은 대화의 과정, 신뢰를 얻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답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국민의 일부로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국민들이 모르는 것 같지만 사익을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공익적 판단은 무엇인지 말하는 사람들을 못 알아보지는 않는 것이다. 실력이 있고, 사익을 내려놓고 공익을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분명히 알아보고 기회를 줄 것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활동을 해야겠지.
임명은 받았는데, 그 이후에 어떤 방식으로 공식적인 활동을 펼쳐나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는 않았다. 나도 소시민이기 때문에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부분도 있고,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정치활동 시작 준비를 하는 와중에 있다. 그래서 앞으로 보여드릴 모습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해나갈지 알 수 있게 되실 것 같다.
나는 일찌감치 창작을 시작했다. 고등학교도 애니메이션고등학교를 나왔고. 그래서 계속 창작하는 사람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지금도 변하지 않았는데, 어쩌다보니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됐다. 사실 유튜브 채널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은 다 했다. 책 리뷰를 하기도 했고, 영상 만든 걸 보여주기도 했고, 시를 읽기도 했다. 지난 박근혜 정부 때는 탄핵 촛불시위 브이로그를 찍어서 올리기도 했다.
하고 싶은 걸 다 했기 때문에 그걸 봐 온 사람들이라면 내가 아주 새로운 것을 한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을 것 같다. 아마 내가 정치를 할 것을 예상하지 못 했겠지만. 그런데 예상한 분들도 좀 있더라. 그게 더 신기했다. ‘새롭지만 재밌다’, ‘기대한다’ 와 같은 긍정적인 반응들을 많이 보여주셔서 고마웠다. 사실 장르가 뭐가 됐든 우리의 관심사는 삶이지 않나. 잘 살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는 아주 일관된 작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걸 굳이 가져오려고 한 것은 아닌데 어떻게 잘 들어맞는다. ‘오언 존슨’의 ‘기득권층’이라는 재밌는 책이다. 저자가 영국 분인데, 영국 사회의 기득권 카르텔이 있지 않은가. 몇몇 개인들이 아니라, 어떤 이익과 관습과 관계를 공유하는 촘촘한 네트워크가 뭔지를 파헤치는 재밌는 책이다. 르포 같은 장르를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매우 재미있을 것 같다. 그리고 정치를 하는 분들에게는 매우 추천하고 싶다.
한 부분을 발췌해서 읽어드리겠다. “이 책은 오늘날의 기득권이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기득권층의 사상이 어떻게 그런 승리를 거두고도 도전받지 않았는지, 그들이 어떻게 보이는지, 자기네 행동을 어떻게 정당화 하는지, 그리고 기득권층이 왜 우리의 민주주의에 위협적인지를 탐구할 것이다. 나는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주장과는 다르게 국민을 섬기지 않음을 드러낼 것이다. 그들을 자기 자신을 섬긴다.”
지금은 없다. 사실 나는 영상을 가지고 소통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서 영상베이스의 인간일 것이라는 오해를 받는데 진짜 글자 형 인간이다. 책이 훨씬 좋다. 영상을 나의 제1매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지나가버릴 때 거기에 멈춰 설 수가 없는 게 버겁더라.
벌자의 일기! 너무 잘 보고 있다. 벌자가 매일 피곤해 하고 있어서 마음이 아프다(웃음). 훌륭한 시도라고 생각하고 나도 조력하도록 하겠다.
맞다. 완전 삶을 전시하고 있다(웃음)
단순하지만 가장 어려운 질문이다. 나는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인간답게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 않나. 그렇지만 ‘상황이 녹록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기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런 평가를 받고 싶다.
한 둘이 아니다(웃음). 한둘이 아닌데, 정말 당면한 고민은 생존의 고민이다. 앞으로 점점 더 정치일정을 통해 바빠지게 될 것이지 않은가? 그 시간동안에 동생의 곁을 지켜줄 사람들을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가 가장 현실적인 고민이다.
이 인터뷰를 끝까지 봐주셨다는 뜻은 정의당에 많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일 텐데, 그 애정과 진심에 정말로 감사를 드린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나는 왠지 이번엔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에 와 있고, 그렇기 때문에 함께 기운내서 기분 좋은 미래를 같이 맞이하고 싶다.
그리고 정의당의 뉴스레터, 브런치를 많이 사랑해 달라. 앞으로 더 재밌어질 것이고, 흥미로워질 것이니 함께 해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