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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의당 노동자 Dec 30. 2019

장훈 세월호가족협의회위원장, "기억해달라는 이유"①

① '세월호 참사'를 돌아보며

  

사단법인 4.16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지난 11월 박근혜 전 대통령과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 40명을 고소·고발한 데 이어 지난 27일, 전 감사원장과 전 기무사 참모장들, 해경, 정치인 등 총 47명에 대해 2차 고소·고발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훈 4.16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은 "세월호 사고 이후 골든타임 100분간 304명의 승객들이 탈출할 기회들은 최소 100번이 넘는다. 그날 퇴선 하라는 방송 한 번이면 모두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정부기관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불법적 행위를 거리낌 없이 저질렀다"며, "그런데도 관련 기관들은 유가족들의 진상규명 요구를 철저히 짓밟았고 온갖 파렴치한 패륜 행위를 계속했다"며 "이에 피해자들의 인권을 짓밟은 책임자들을 고소·고발 한다"고 밝혔다.


세월호 참사는 벌써 5주기를 지났지만, 진실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기에 유가족들은 힘든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세월호 참사 그날의 진실이 밝혀지는 그 날까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보겠다는 다짐을 하며 장훈 운영위원장과의 인터뷰를 공개한다.(위 인터뷰는 한 달 전(11월 23일)에 진행된 것임을 알립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으로 산다는 것    


다 아이들의 부모고, 입장이 같으니까 의견을 모으려면 평등한 위원회 구성이 낫지 않을까 해서 구성된 사단법인 4.16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2학년 8반 장준영 아빠 장훈이라고 한다.   


유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유가족들은 자기 검열이 매우 심하다. 어찌 보면 사회는 ‘피해자 다움’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유가족들도 술을 먹을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특히 트라우마를 조금이라도 해소하고 기댈 곳이 필요할 때가 있는데, 밖으로 나가서 술을 마실 수도 없다. 삶 자체가 더더욱 팍팍해진다.     



참사, 그날의 기억들     


사실 ‘세월호 사건’이 ‘세월호 참사’로 불리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2014년도부터 박근혜 정부 당시, 서울에서는 광화문 광장, 국회 등에서 투쟁을 했었다. 서울도서관에 있는 서울시 세월호 참사 기억공간 같은 경우에는 그때, 시민들과 함께했던 투쟁 모습을 담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1기 특조위 기록물이 들어와 있다. 굉장히 중요한 공간이다.       


서울도서관의 세월호 참사 기억공간


서울도서관의 세월호 참사 기억공간에 걸려있는 그림들은 참사 당시를 시간 순으로 그려놓은 그림이 있다. 이 그림에는 복잡한 감정이 있다.



기억공간 내에 있는 그림. 세월호 여행의 출발과 여정, 침몰 과정 등 행복하고 설레는 여행의 시작이 배의 침몰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담았다.
침몰 전, 아이들의 환상을 담고 있는 세월호의 모습


TV에서 배로 제주도를 가면서 저녁에 불꽃놀이 하는 것을 아이들이 보고 커서 ‘배를 타고 제주도에 가면 즐겁겠다’는 환상이 있었던 것 같다. 수학여행 당시, 제주도에 비행기로 갈 것인지, 배로 갈 것인지 선택을 할 수 있었는데 아이들이 대부분 불꽃놀이하고, 배안에서 1박 2일 지낼 생각에 배를 선택했다. 또 배가 비행기만큼 안전하다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큰 배니까.      



세월호의 그림에서 그림에서 불법으로 증축해 놓은 부분을 가리키고 있는 장훈 위원장


그림에서 배를 보면, 물이 여기로 들어간 것이다. 원래는 여기가 다 막혀 있어야 한다. 여기로 물이 들어가서 빨리 침수가 된 것이다. 안전을 생각하고 했으면, 원래대로 여기가 쇠로 막혀있었다면 좀 더 오래 떠있었을 텐데 대충 천막으로 해 놨으니까.      


이 부분이 증축된 것이다. 그 과정이 부실했다. 더 안전을 생각했었어야 했는데. 그것까지 생각을 안 했던 거지.               



이제 그만 잊으라는 사람들, 그럼에도 계속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게 있는데 ‘트라우마를 치료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트라우마는 완전히 치료가 안 된다. 상처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치료라고 하는 것은 상처가 있는 상태에서 트라우마라는 감정을 다른 감정으로 감싸준다는 그런 느낌일 텐데, 그 감정 자체는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 때는 ‘3년 안에 트라우마를 치료하라’고 해서 3년까지만 의료지원을 해준다고 했다. 아니, 그런데 어떻게 트라우마가 3년 안에 해결이 되나. 이해의 폭이 너무 좁았던 탁상공론이었던 것이다.    

트라우마는 뜬금없이 발현되곤 한다. 자꾸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을 피하게 된다. 왜냐하면 말을 공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니까. 내적인 상처는 받는다. 안 받는다면 거짓말이다. 구술, 인터뷰 등을 하고 나면 그날 저녁에는 몸살이 난다. 상처의 기억 때문에. 그날의 기억이라든지, 다시 소환되는 아픔들이다. 진상규명의 과정을 또 이야기하다 보면, 기억들이 공격을 한다. 몸을 공격하는 것 같다. 한 번은 6시간 정도 긴 인터뷰를 하고 차를 몰고 가다가 차 사고가 난 적도 있다.


그런데 말을 안 하고 있는 것보다 차라리 하는 게 상처를 덜 받는다. 이왕 받을 상처면 말을 하는 게 낫다. 말을 함으로써 그나마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건데, 계속 감추고 수그리고 있으면 상처가 내 안의 종양처럼 커진다.


유가족들 중에 맨 처음부터 숨어버린 분들이 계신다. 그분들은 오히려 아직도 상처가 더 크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도 있다. 아이가 나중에 돌아온 경우, 돌아온 모습이 너무 참혹해서 아빠들만 보고, 엄마들은 안 보여준 분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아이를 본 분과 안 본 분들의 트라우마의 크기의 차이가 크다. 안 본 분들이 오히려 더 크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교실에서 시작된 추모의 물결     

     

(연합뉴스) 세월호 참사 4주기 당시 경기 안산시 안산교육청에 마련된 '4·16 기억 교실'의 광경


2014년에 참사가 난 후, 우리 아이를 찾고 나서 자주 가보지 못하던 아이의 학교에 갔는데 포스트잇들이 붙어 있었다. 아는 친구들, 동생들 등 우리 아이들을 아는 사람들이 전부 다 오셔서 교실 칠판에다 빨리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또 사고가 난 날부터 찾아와서 포스트잇에 ‘제발 살아만 와라’, 부활절 바로 전날이었는데 성당에 다녔던 우리 아이에게 ‘같이 부활절 보내자’ 고도 남기고.


기억공간에 마련된 추모의 벽


1년 정도 지나니 포스트잇이 너무 많아서 이걸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기록 관리를 하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보존처리를 했다. 추모의 벽 또한 너무 포스트잇이 많아서 이걸 모아서 일정한 기간마다 한 번씩 싹 떼고 다시 붙이고, 방문하시는 분이 써서 붙이는 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노란 리본의 의미  
 


우리가 노란 배지를 하고, 노란 리본을 다는 이유 중 하나를 얘기하자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서울시 광장에서 합동 분향소를 했을 때 시민들께서 노란 리본에 추모의 글씨를 직접 적어서 “잊지 않겠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아이들은 직접 노란 종이배를 접어서 놓기 시작했다. 어른들이 아닌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그것이 국회 앞 잔디밭까지 가게 됐다.     


국민분들이 ‘잊지 않겠다’는 기억과 추모의 의미로 노란 리본을 해주셨는데, ‘노란색은 故 노무현 대통령 색깔이다’, ‘정치색깔이 있지 않느냐’ 하는 식의 공격을 받았다. 어이없는 내용의 보도들도 있었고. 참사 초반에는 세월호 집회나 기자회견 등을 하게 되면 ‘정치색이 있어서 안 된다’면서 많이 못하게 했었다. 대학 등에서 초청이 오면, 대학 당국에서 정치적이어서 안 된다며 불허를 하는 등으로.     


 

국민들이 추모의 메시지를 담아 달아 놓은 노란 리본


그런데 사실 이 노란 리본의 유래는 다른 곳에 있다. 외국에서도 ‘노란 리본’하면 애초부터 여러 가지 아픔을 상징화하는 것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노란 리본’으로 많이 공격하고, 색깔론을 뒤집어 씌웠다. 하물며 노란 리본을 다는 것을 가지고 빨갱이라고까지 하더라. ‘노란색이니까 노랭이라고 하면 이해하겠는데 빨갱이라 하는 건 이해 못 하겠다’며 설전도 벌인 적이 있었다.     


여기 추모공간에 있는 노란 배와 리본들은 서울시청 광장에 있던 것들 중 깨끗한 것만 추려 다시 전시한 것이다. 원래 있던 것들의 100분의 1도 안 될 것이다. 추리다 보니 이 정도가 된 것이고, 나머지는 서고 등에 다 보관해 놓았다. 참사를 당했던 것도 깜짝 놀랐던 일이었지만, 이때 정말 깜짝 놀랐었다. 국민들이 써주신 ‘기억하겠다’는 내용의 문구들을 하나하나 읽으면 눈물이 나서 다 읽지를 못할 정도로 감동적인 것들이 많다.    

 


노란 리본을 단 사람들     


운전을 하다 보면 얌체처럼 끼어들기하는 분들이 간혹 있는데, 세월호 마크를 붙이고 있는 분이면 ‘그래, 끼어들 수 있지’라는 이해가 되며 나도 모르게 공동체 의식이 생기기도 한다. 남녀노소, 진보, 보수를 떠나서 세월호 리본을 달고 있다는 것으로 ‘우리를 생각하고 있구나’ 이런 마음이 드니까. 의식적인 연대가 되고 있다.


행복의 기준, 인생의 척도를 금전적인 것에 두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돈이 많으면 뭐하나. 우리 아들의 몸무게와 같은 다이아몬드와 금덩이를 가져다줘도 나는 아들과 바꿀 생각이 없는데. 이런 마음과 같지 않을까. 지금 삶 자체가 곤궁하고 힘들지만, 함께 해주는 국민들이 계속 곁에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몇 백억 가진 부자가 된 것보다 더 자긍심을 느끼게 한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공동체적인 삶의 순기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억’한다는 것     



안산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공식적으로 서울시에 이런 기억공간이 있다는 것은 참 중요한 일이다. 전국적인 추모의 분위기를 이어갈 수 있는, ‘잊지 않겠다는 것’, 그 상징성이 여기 있다는 것이니까. 노란 리본을 맨 처음 만들던 곳이 광화문 광장이었다. 시민들께서 ‘이거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라며 자발적으로 나서서 하셨다. 그래서 똑같이 생긴 게 없었다. 지금은 일률적으로 되었지만. 이게 우리에게는 의미가 깊다.      


세월호 참사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아예 관심이 없는 분들도 있고. 당시 어렸던 아이들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알더라도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른다. 그래서 기억공간들을 통해 교육하고, 역사책에 남기고 그런 것들이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런 기억공간 같은 장소들이 눈에 띄는 곳에 있어야 하는데 마치 혐오시설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다. 성수대교 추모탑이 어디 있는지 사람들이 알지 못하지 않나. 도보로는 접근할 수 없는 그런 곳에 있으니까.     


기억공간에 대해 일반적인 추모 시설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오해가 생길 수 있다.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것 같다. 우리 아이를 추모해달라는 얘기는 안 한다. 기억해 달라고 할 뿐이다. 그래서 이름이 ‘기억 공간’이다. 물론 추모와 기억은 같이 공존할 수 있는 단어일지 모르지만 기억한다는 것에는 큰 무게감이 있다. 우리 아이들은 온전히 우리들만의 아이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아들 준형이’만이 아니라, 준형이를 알고 있는 모든 분들의 아이가 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돈 몇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먹고사는데 바쁜 삶을 살면서, 현실에 대해 눈감고 살고 있다가 이런 참사를 당했다. 그런데 이런 삶의 모습이 우리 아들이 바라는 삶일까? 하고 생각하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기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광화문 광장 세월호 기억공간 옆 故 김용균 노동자 추모 분향소


어떤 참사라든지 사건에 대해서 피해자들이 이야기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외받는 계층들, 가장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다 함께 계속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여러 가지 목소리들이 다양하게 공존하는 게 이 사회인데, ‘이건 맞고 이건 틀려’라고 엄연히 있는 것을 딱 갈라버리고 없는 것처럼 취급해버리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나.     


사회적 합의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러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려면 모두의 목소리를 다 들은 다음에 합의를 해야 한다. 모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그들 일부를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이 합의를 하는 것이 진정한 합의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세월호특별법 등, 우리의 목소리가 배제된 상태에서 만들어지니까 우리에겐 현실감이 없었다.     


광화문 광장에 세월호 천막이 5년 가까이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시민분들께 남쪽 광장 그쪽이 세월호 광장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기억관이 새로 단장되고, 매주 토요일마다 여기서 간단하게나마 1시간가량 촛불문화제를 하고 있다. 진상규명 활동을 계속하면서, 보고나 기자회견도 주로 이곳에서 하고 있다.      



이곳에 세월호 기억관이 있고 유가족들이 계속 나온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 후부터는 연대를 하자는 요청이 많이 오고 있다. 지금은 거기에 작년에 불행하게 사고를 당한 故 김용균 청년을 추모하고, 기억하기 위해 우리 기억 공간 앞쪽에 故 김용균 청년의 분향소 공간을 만들었다.      


광화문 광장 세월호 기억공간 옆 보수단체의 시위 사이를 펜스가 둘러싸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 공간은 분향소와 기억공간을 보호하기 위해 펜스로 똘똘 막아져 있다. 보수 단체의 시위를 정해진 집회 시간이 아닌 시간에도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바로 우리 옆에서 하고 있다. 펜스가 없으면 들어와서 모욕하고, 욕설을 퍼붓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두 번이 아니어서 경찰에 보호 요청을 했고, 펜스가 둘러져있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아직 나아가지 못한 그때의 이야기     



광화문 광장 안의 기억공간에는 3년 전에 만든,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집이 있다. 거기에 담겨 있는 내용과 비교했을 때 진상 규명은 한 발자국도 못 나아갔다. 의혹만 있고, 의혹 제기에 대해서 답을 안 해주기 때문에 답을 도대체 누가 해줘야 하는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거다. 대답을 듣고 싶다. 정작 대답해야 할 당시 정부, 해경은 답을 안 해주니까.


강제로라도 답을 하게 만드는 것이 재판인 것이다. 재판으로 가겠다고 고소고발에 들어갔고. 대략 40명 정도를 1차적으로 고발한 상황이다. 마침 특별수사단이 다시 만들어져서 전면 재수사를 하겠다고 해서 해경을 압수 수색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그것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소송도 함께 진행해야 한다.





           


[특별수사단 활동 등 이후의 이야기는 장훈 4·16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 인터뷰 2화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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